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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슈 난 애들이 좋아, 맛있거든 (스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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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5.25 16: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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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나는 누구?



난 애들이 좋아, 맛있거든 (스압)

Albert Fish 1870.05.19~1936.01.16
"I like children, they are tasty"
"난 애들이 좋아, 맛있거든."
한 개인이 이러한 모든 성적 이상증세를 보유했다고 하는 기록은 법학이나, 의학 역사에 유례가 없는 일이란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피쉬의 정신감정을 담당한 워댐 박사의 말

1. 개요2. 어린 시절3. 살해 수법4. 그레이스 사건
4.1. 체포4.2. 희생자들
5. 최후

1. 개요[편집]

인간의 모습을 하고 있지만, 절대로 인간이 아닌 희대의 인간 말종 개쓰레기. 그냥 인간의 탈을 쓴 악마라고 보면 된다.

미국판 미야자키 츠토무. 미야자키 츠토무는 50여년 뒤 일본에서 그와 비슷한 짓을 저지른 천하의 개쌍놈이다. 범행 수법이나 동기, 어린 시절의 생활 등이 알버트/앨버트[1] 피쉬와 유사한데, 2008년 사형이 집행되어 피쉬와 마찬가지로 죽음을 맞이했다.

회색 남자, 웨스터리의 늑대 인간, 브루클린 뱀파이어, 달 미치광이, 부기맨(Boogieman)이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다. 흔히 해외의 연쇄살인범이라고 한다면 잭 더 리퍼에디 게인[2]테드 번디 등을 떠올리지만, 미국 사람들에게 가장 끔찍한 연쇄살인범으로 남아 있는 사람은 이 앨버트 피쉬다. 미국 사람들뿐만 아니라 심리학자, 프로파일러들 역시 앨버트 피쉬의 사례를 연쇄살인범 사례들 중에서도 가장 지독한 사례로 뽑으며, 앨버트 피쉬를 미국 역사상 희대의 살인마로 뽑는 데 주저하지 않는다. 그 이유는 아동 연쇄 유괴 살인이라는, 인간으로서 저지를 수 있는 가장 극악무도한 범죄를 저질렀기 때문이다. 물론 전 세계적으로 보면 루이스 가라비토 등 그보다 더한 인간말종들이 넘쳐나지만, 살해 수법의 잔인성과 이상 성욕을 알고 나면, 피쉬가 최악의 연쇄살인마라는 사실을 부정하기가 어렵다.

2. 어린 시절[편집]

아버지가 일찍 죽고 난 후, 피쉬는 워싱턴에 있는 고아원으로 보내진다. 그곳에서 지내는 동안, 무자비한 구타를 당하거나,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자위할 것을 강요당하는 등 무척이나 힘든 생활을 했다. 그런데 이때에도 맞는 것을 통해 쾌락을 느끼는 마조히스트여서, 그런 학대와 고통을 즐겼다고 한다. 그렇게 고아원에서 2~3년을 지낸 후에, 앨버트 피쉬는 다시 어머니에게로 돌아가 생활하게 된다. 얼마 뒤, 그는 체리나무에서 떨어져 머리에 심한 상처를 입는다. 그 체리나무만 없었어도…. 그 후 현기증과 두통을 경험했다. 이때의 사고가 그의 이상 성격을 형성하게 된 원인이라고 보는 전문가들도 있다. 특히 어린아이의 경우는, 성인에 비해 두개골이 충격을 완화시켜주는 정도가 1/8밖에 되지 않기 때문에, 이 추락으로 전두엽 피질이 손상되었을 가능성이 높다.[3] 이 사고 이후 그는 단순한 마조히스트에서 잔혹한 살인마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난 애들이 좋아, 맛있거든 (스압)

앨버트 피쉬와 그 아내.

앨버트 피쉬는 낮은 수준의 공교육을 받았고, 페인트공이나 잡역부로 공사현장에서 일을 했다. 스물여섯 살의 피쉬는 열아홉 살의 여자와 결혼했지만, 피쉬의 아내는 바람이 나게 되는데, 그 상대는 자기 집에서 하숙하던 잡역부였다. 피쉬는 아내에게 그 사내와의 관계를 정리할 것을 요구했지만, 아내는 오히려 자기가 낳은 아이들이 자야 할 매트리스까지 가지고 사라졌다. 그 일이 일어난 후 피쉬는 이상한 행동을 했는데, 달빛 아래에서 알몸으로 자신이 그리스도다라고 말하거나, 생고기를 씹는 행동을 했다. 어떤 사람들은 그가 아내 때문에 미쳤다고 생각하기도 했지만, 그는 이미 미쳤을 가능성이 높다.

그 후 자학행위는 점점 심해졌고, 여자들에게 음란편지를 발송하거나, 어린아이에게 강간을 시도하다가 실패하여 교도소에 투옥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후술(後述)될 그의 잔악행위들이 피쉬의 자식들에게 행해지는 일은 없었다. 오히려 자식들이 그는 상냥한 아버지였다고 법정에서 증언할 정도였다. 다만 자식들에게 자신을 때려달라고 부탁하기는 했다(…). 충분히 막장 아버지 같은데?!?

이렇게 힘든 생활을 하기도 했지만, 애초에 태어난 집안부터가 불우했다. 피쉬 일가는 그의 조상들, 할아버지와 아버지부터가 정신병력을 가지고 있었으며, 가정에서도 어머니와 아버지에게 학대를 당했다. 하지만 이 사실이 그가 이후 저지른 범죄에 대한 면죄부가 될 수는 없다.

3. 살해 수법[편집]

피쉬가 그토록 악명을 떨치게 된 이유는, 아동을 유괴, 끔찍한 방법으로 살인한 후, 잡아먹는 미친 짓을 했기 때문이다. 훗날 체포된 후 그의 증언에 따르면, 그는 아이들의 살이 맛있다며 아이들을 잡아 무자비하게 구타하고, 아이들에게 대바늘을 몸에 쑤셔넣는 행동을 한 뒤 신체를 분해하여 살들을 스튜로 끓여먹거나 구워먹었다. 그러고서 그는 그 음식의 맛을 맛있다고 말했다. 거기에 살만 먹은 게 아니라, 아이들의 똥이나 오줌, 심지어 자궁 같은 생식기도 먹었다. 다만 남자 성기는 질겨서 도저히 먹을 수가 없어서, 변기에 던져 넣었다고 한다. 게다가 한 번에 죽이지 않고, 살려둔 채 신체를 해체해 가는 와중 출혈 과다로 죽게 내버려 뒀다.

그가 증언한 내용에 따르면, 아이가 살려달라고 울부짖는 상황에서도, 그는 개의치 않고 아이의 안구(眼球), 즉 눈알을 파내고, 성기를 자르고, 내장을 파헤치거나, 이로 신체를 잘라내는 등 상상만으로도 끔찍한 짓들을 자행했다. 훗날 그렇게 잔인한 일을 한 이유를 질문받자, 그는 자신이 피에 대한 갈증이 엄청났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4. 그레이스 사건[편집]

연쇄살인범으로서 피쉬의 악명을 드높인 또 한 가지 이유는, 그의 체포 과정이 드라마틱했기 때문이다. 한 편의 범죄 영화를 방불케 하는 이야기였다.

수많은 아이들을 죽이고 먹어치우는 생활을 하던 피쉬는, 어느 날 신문에 광고를 싣는다. 자신을 농장주라 하며 거짓 구인 광고를 내서, 광고에 응답하는 청년을 사로잡아 죽일 생각이었던 것. 이 당시 피쉬는 노인이었지만, 숙련된 살인 경험으로 청년을 간단히 무력화시킬 자신이 있었다고 한다.

이에 광고를 본 한 청년이 피쉬에게 연락을 취하고, 피쉬는 그 청년을 만나기 위해 그의 집으로 간다.[4] 그리고 그 집에서 청년의 여동생인 그레이스를 만난 후, 타겟을 그쪽으로 수정한다. 피쉬는 그레이스의 어머니에게, 자신의 손녀가 이 근처에서 생일파티를 열고 있는데, 그레이스를 데려가고 싶다고 말한다. 어머니는 마땅찮아 했지만, 아버지는 상류층의 문화를 접할 수 있는 기회라며, 피쉬가 그레이스를 데려가는 것을 허락해 준다. 실로 안타까운 결정이었다. 그레이스는 다시는 집으로 돌아오지 못했다. 피쉬는 나타나지 않았다. 경찰에 연락하고 나서야, 그레이스의 가족들은 피쉬가 쓴 이름이 가명이고, 신문 광고에 나온 농장 따위 존재하지도 않는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레이스의 생사는 피쉬가 잡힌 뒤에, 그가 다 털어놓고 나서야 밝혀질 수 있었다.

당시 퇴직을 1년 앞둔 형사 윌리엄 킹은 퇴직까지 반납하며 이 사건에 6년간 매달리지만, 실마리가 보이지 않았고, 결국 마지막 조치로 수사를 종결했다는 가짜 기사를 신문에 싣게 한다. 그러자 피쉬는 안심을 했는지, 그레이스 가족을 자극하는 편지를 보낸다. 내용은 여기에서 확인할 수 있다. 매우 폭력적이고 자극적인 내용이니 주의. 다른 추가적 내용 또한 위에서 확인 할 수 있다. 형사들은 위의 편지를 분석했는데, 피쉬가 말했던 중국에서 일어난 사건들은 없었던 것으로 확인되었다. 그러나 이 편지의 내용이 상당히 신빙성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고, 그 편지를 사실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 편지를 믿는다는 것은, 그레이스가 잔인하게 살해되어 피쉬에게 먹혔다는 끔찍한 일이 현실이라는 이야기도 된다. 어쨌든 수년 만에 생긴 단서로, 킹은 피쉬를 역추적할 수 있었고, 결국 그를 체포하는 데 성공한다.

형사가 늙은 연쇄살인범 앨버트 피쉬를 체포하려던 순간, 피쉬는 주머니에 있던 흉기로 저항하려고 했으나, 금세 제압당하고 형사는 그를 체포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I've got you now."
"넌 이제 잡혔어"
난 애들이 좋아, 맛있거든 (스압)

앨버트 피쉬와 윌리엄 F. 킹(William F. King) 형사. 노형사의 기개에 개발살난 악마.

4.1. 체포[편집]

피쉬는 잡힌 뒤 모든 것을 체념한 듯 자신의 모든 범행을 깨끗하게 털어 놓았는데, 이때의 자백 내용들이 검열되어 일부분만이 세간에 알려졌음에도, 그 내용은 대단히 충격적이고 엽기적이었다. 피쉬의 자백으로 인해, 다른 미국 지역의 미제사건이나 음란편지들의 발송자가 누구인지 밝혀졌다. 그리고 피쉬는 단순히 살인뿐만이 아니라, 엽기적인 자학으로도 수많은 관계자들을 경악케 했다. 요도에 장미 줄기 삽입하기, 항문을 불로 지지기, 사타구니에 대바늘 20개 박아 넣기 기타 등등. 그리고 자신의 자식들에게, 못이 달린 주걱으로 자신을 때려서 피가 나게 해달라고 하거나, 손톱 밑에 날카로운 물건을 넣으라는 것 등을 해줄 것을 부탁하기도 했다.

그러나 보통사람이라면, 이러한 엽기적인 자학행위가 사실이라고 믿기는 결코 쉽지 않았다. 형사나 워댐 심리상담가들 또한, 피쉬가 자신의 처벌을 피하기 위해 일부러 정신병자로 위장하기 위한 술책이 아니냐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특히 사타구니에 대바늘을 박아 넣었다는 이야기는 처음에는 아무도 믿지 않았지만, 엑스레이를 찍은 결과 정말로 이십 여개의 대바늘이 그의 골반 안쪽에 박혀 있었다. 웬만한 영화나 매체에 나오는 가공의 싸이코패스들 보다 훨씬 지독한 게 현실에 나타난 셈이다. 이러한 사실을 종합해보면, 피쉬의 삶은 '전대미문(前代未聞)의 도착적인 삶이었다’.

4.2. 희생자들[편집]

앨버트 피쉬에 주장에 따르면, 자신은 약 100명의 아이들을 죽이고 식인을 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심리상담가들은 그가 17명 정도의 아이들을 살해하거나 상해를 입혔다고 추정했다. 그의 증언의 상당 부분은 허언증(虛言症)으로 추정된다. 피쉬에 의해 피살된 것이 명백하게 확인된 피해자는 단 3명. 이외 6명의 아동 및 청소년이 실종됐는데, 이들도 살해된 것으로 추정됐지만, 피쉬와 연관성이 있는지는 증명되지 않았으며, 관련 조사를 끝내기 전에 그의 사형이 집행됨으로써 생사조차 끝내 밝혀지지 않았다.

* 살해된 것이 확인된 피해자.
프란시스 X. 맥도넬 8세 1924년 7월 15일
빌리 프니 4세 1927년 2월 11일
그레이스 버드 10 세 1928년 6월 3일

* 의심되는 피해자. 이들은 현재도 생사불명 상태다.
엠마 리처드슨 5세 1926년 10월 3일
예타 아브라모 위츠 12세 1927.
에밀 아일링 4세 1930년 7월 13일
로빈 제인 리우 6세 1931년 5월 2일
메리 엘렌 오코너 16세 1932년 2월 15일.
벤자민 콜링 17세 1932년 12월 15일.

5. 최후[편집]

취조 과정을 거친 뒤 피쉬의 재판이 시작되었다. 피쉬는 정신병자가 확실했고, 담당의사들은 소견서를 작성해 피쉬를 정신병원에 넣어야 한다고 말했다. 변호사 역시 정신이상을 근거로 그의 무죄를 주장했다.

그러나 아무리 미쳤다고는 하지만, 교활한 방법을 통해 수사망을 피하고 자기 몸을 지킬 줄은 알았던 인물이라, 완벽한 정신병자라고 하기에는 좀 애매했고, 이 때문에 당시 판사와 배심원들은 유죄 판결 유무를 놓고 혼란스러워할 수밖에 없었는데, 결국 정상인은 아니지만, 자기 책임능력은 있다고 판단, 유죄판결이 내려졌고 이후 자동으로 사형이 확정되었다.

법정에서 피쉬는 내내 체념한 듯이 행동했고, 재판의 결과에도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5] 다만 그는 잠깐 죽지 않기를 바란다고 말했는데, 그 이유는 자신은 신이 시키신 일이 있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신은 개뿔병신일지도. 판결을 마치고 마지막으로 한 배심원은 이렇게 말했다.
"그 사람이 미쳤다는 건 누가 봐도 알 수 있었지만, 우리 앞에 있는 그것을 살려둬선 안 된다는 공포감이 사형을 선고하게 만들었다."


결국 1936년 1월 16일, 사형이 집행되었다. 사형 당일 그의 행위도 사람들을 경악하게 만들었는데, 그는 사형집행에 대한 기대감을 가지고 집행실로 걸어들어갔다. 사형 판결 자체에는 불만을 표했지만, 전기의자형이라는 말을 듣고 자신을 짜릿하게 할 수 있는 경험이라며 기대감을 나타내면서, 자신의 몸에 전극을 붙이는 집행관을 손수 도와주는 등 죽는 순간까지도 끝까지 자학적인 짓을 서슴지 않았다고 한다.

피쉬는 그의 변호사에게 자신의 마지막 편지를 전했다. 기자들이 그 편지를 공개해 줄 수 있냐고 물었지만, 피쉬의 변호사는 이 편지를 절대로 공개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기자가 그 이유를 물어보자, 자신이 태어나서 이렇게 음탕하고 더러운 내용의 문체는 도저히 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라고 말하였다. 그 뒤 피쉬의 편지는 아직도 공개되지 않고 있다.

그렇게 미국역사상 가장 잔혹한 연쇄살인마의 죽음으로 이 전대미문의 살인극은 종료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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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29개의 바늘



111111.jpg 난 애들이 좋아, 맛있거든 (스압)


그의 골반에 박혀있는 29개의 바늘 (x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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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그레이스 사건



에드워드 버드(Edward Budd)는 모험심이 강한 18세 소년이었다. 그는 부모님이 처한 절망적인 가난으로부터 탈출하기 위해 자신이 무언가 해야 한다고 결심했다. 1928년 5월 25일, 에드워드는 뉴욕 월드 신문의 일요일 판에 작은 광고를 실었다. “18세 청년, 농촌 일자리를 구함. 에드워드 버드. 15번가 서쪽 406번지”. 에드워드는 열심히 일해서 가족의 생계를 돕고 싶어하는 건강한 청년이었다. 아버지와 어머니, 어린 동생 4명과 함께 낡아빠진 아파트와 더럽고 냄새 나고 혼잡한 환경에 갇혀 살던 에드워드는, 신선하고 깨끗한 공기가 있는 시골에서 일하고 싶어했다.


그 다음주 월요일인 5월 28일, 몸집이 무척 컸던 에드워드 어머니 델리아(Delia) 부인은 한 노인의 방문을 받고 문을 열었다. 남자는 자신을 프랭크 하워드(Frank Howard)라고 소개했고, 롱 아일랜드의 파밍데일에서 농부로 일하고 있으며 에드워드의 광고를 보고 그를 면접하러 왔다고 말했다.


델리아 부인은 5살짜리 어린 딸 베아트리스(Beatrice)를 시켜 친구 아파트에 가 있던 오빠를 불러 오게 했다. 노인은 베아트리스를 보고 환하게 미소 짓더니 동전 한 개를 주었다. 에드워드를 기다리는 동안, 델리아 부인은 노인을 더 자세히 볼 수 있었다. 노인의 얼굴은 매우 온화해 보였고, 회색 머리털에 풍성하게 늘어진 회색 콧수염을 기르고 있었다. 노인은 델리아 부인에게 자신이 수 십 년 간 도시에서 실내 장식가로 일했으며 은퇴 후에는 그 동안 저축해 둔 돈으로 농장을 샀다고 말했다. 10년 전 아내가 아이들을 버리고 떠난 후에는 6명이나 되는 자녀들을 혼자 키우고 있다고도 말했다.


자녀들과 5명의 일꾼, 그리고 스웨덴 인 요리사의 도움으로, 노인은 농장을 성공적으로 운영하여 수 백 마리의 닭과 6마리의 젖소를 키우게 되었다. 그리고 이제 일꾼 중 한 명이 떠나게 되었기 때문에 새 일꾼이 필요하다는 이야기였다. 그 때 에드워드가 돌아와 하워드를 만났고, 노인은 에드워드를 보며 그의 몸집과 근력에 대해 언급했다. 에드워드는 노인에게 열심히 일하겠다고 다짐했다. 하워드는 임금으로 주당 15달러를 주겠다고 제안했고 에드워드는 기쁘게 수락했다. 하워드는 심지어 에드워드의 가장 친한 친구인 윌리도 함께 고용해 주겠다고 말했다.


하워드는 그 날은 다른 약속이 있다며 그냥 떠났고, 토요일에 돌아와 에드워드와 윌리를 데려가겠다고 약속했다. 두 소년은 기대에 부풀었으며, 버드씨 가족들은 에드워드가 조그만 광고를 싣고 나서 그토록 빨리 이렇게 친절한 노신사가 제공하는 좋은 일자리를 얻게 되어 기뻐했다.


토요일인 6월 2일, 하워드는 나타나지 않았다. 대신 하워드는 손으로 적은 메모를 보내어 자신의 일이 지연되고 있으니 다음 날 아침에 전화하겠다고 전했다. 다음 날 아침 11시경, 하워드는 딸기와 신선한 크림 치즈 항아리를 선물로 들고 버드 씨 아파트를 방문했다. “제 농장에서 직접 가져온 겁니다.” 노인은 그렇게 말했다. 델리아 부인은 노인에게 점심 식사를 하고 가라고 권했다. 덕분에 집안의 가장인 앨버트 버드 시니어(Albert Budd Sr.)씨는 아들의 새 고용주와 이야기할 기회를 가질 수 있었다. 버드 씨는 노인과 이야기를 나누며 매우 기분이 좋아졌다. 친절하고 겸손한 이 노인은 자신의 20에이커짜리 농장과 순박한 농장 일꾼들, 그리고 시골의 단순하고도 건강한 생활에 대해 열정적으로 묘사하고 있었다. 이것은 아들에게 딱 맞는 일자리라고 버드 씨는 확신했다.


이퀴터블 생명 보험 회사(Equitable Life Assurance Company)에서 청소원으로 일하던 버드 씨는 늘 순종적인 분위기의 사람이었다. 그는 구겨진 푸른 양복을 입은 프랭크 하워드의 행색에는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 노인은 신뢰감 있고 품위 있는 사람이었다.


점심 식사를 시작할 무렵, 사랑스럽게 생긴 10살짜리 소녀 그레이스(Grace)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그레이스는 노래를 흥얼거리고 있었다. 그레이스의 큰 갈색 눈과 짙은 갈색의 머리털은 하얀 피부 및 분홍색 입술과 대조를 이루었다. 아이는 훗날 가슴이 설레는 미인으로 자랄 것이 분명했다. 교회에서 갓 돌아온 그레이스는 아직 교회 복장 그대로였다. 하얀 실크 드레스와 하얀 실크 스타킹, 여기에 반짝이는 진주 목걸이로 인해 그레이스는 실제보다 10살 정도 더 성숙해 보였다.

 

난 애들이 좋아, 맛있거든 (스압)

앨버트 피쉬의 희생자 중 한명인 그레이스


그레이스의 눈부신 얼굴을 본 남자들이 대부분 그렇듯이, 하워드는 이 아름다운 소녀로부터 눈을 떼지 못했다. “어디 네가 숫자를 얼마나 잘 세나 보자.” 하워드는 그레이스에게 큰 돈 다발 한 뭉치를 세어보라고 건네면서 이렇게 말했다. 가난한 버드씨 가족 사람들은 하워드가 가지고 다니는 돈의 액수를 보고 깜짝 놀랐다. “92달러 50센트요.” 그레이스는 금방 대답했다. “참 똑똑한 아이구나.” 하워드는 이렇게 말하고는 그레이스에게 어린 동생 베아트리스와 캔디를 사 먹으라며 50센트를 주었다. 하워드는 저녁 때 돌아와 에드워드와 윌리를 데려가겠으며, 그 전에 먼저 그의 여동생이 그녀의 아이를 위해 여는 생일 파티에 가 보아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에드워드와 윌리에게 영화 구경이나 하고 오라며 2달러를 주었다.


떠나기 직전, 하워드는 그레이스에게 자기 조카 생일 파티에 함께 가지 않겠느냐고 말했다. 그는 그레이스를 잘 돌봐 주겠으며 그 날 밤 9시가 되기 전에 집에 데려다 주겠다고 약속했다. 델리아 부인은 하워드의 여동생이 어디에 사느냐고 물었고, 하워드는 여동생이 137번가 콜럼부스에 있는 아파트에 살고 있다고 대답했다. 델리아 부인은 그레이스를 보내도 좋을지 몰라 주저했지만, 버드씨가 나서서 그레이스를 보내는게 좋겠다고 부인을 설득했다. “가게 해 줍시다. 그 아이도 재미있는 시간을 가져야지.”


델리아 부인은 그레이스가 가장 좋은 코트를 입고 장식 달린 회색 모자를 쓰는 걸 도와주었다. 부인은 그레이스와 하워드를 집 밖으로 배웅하며 두 사람이 거리를 내려가 사라지는 걸 지켜 보았다. 그 날 밤, 하워드는 아무런 소식이 없었고 그레이스도 돌아오지 않았다. 아름다운 딸아이로부터는 아무런 소식도 없는 가운데 고통스런 불면의 밤이 지났다. 다음 날 아침, 에드워드는 경찰서로 찾아가 동생이 실종되었다고 신고했다.


사무엘 드리븐(Samuel Dribben) 경위는 “프랭크 하워드”가 자기 여동생이 산다며 말해 준 주소가 거짓이라며 이것이야말로 가장 나쁜 점이라고 버드씨 가족에게 말했다. 그 친절한 노인은 사기꾼이었다. 프랭크 하워드라는 사람은 없었고, 롱 아일랜드 파밍데일에는 농장이 없었다. 모든 게 거짓이었다. 경찰은 일상적인 조사 활동을 시작했다. 경찰은 “프랭크 하워드”가 버드씨 가족에게 말한 모든 것을 확인했다. 또한 버드씨 가족에게 경찰들끼리 “악당 갤러리”라 부르던 사진첩을 살펴보게 했는데, 여기에는 알려진 모든 아동 성추행범과 정신병자들의 사진이 담겨 있었다. 그러나 아무 소득도 없었다. 그레이스는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6월 7일, 뉴욕 경찰은 그레이스의 사진과 “하워드”의 인상착의를 담은 1000장의 전단을 전국 각지의 경찰서로 발송했다. 전단발송과 지역홍보 활동으로 인해 그레이스 수색과 협박 편지의 열풍이 몰아쳤고, 투고된 협박편지들은 이 사건에 배당된 20여명의 형사들에 의해 철저하게 조사되었다. 유력한 단서도 두 가지 있었다. 경찰은 “프랭크 하워드”가 버드씨 가족에게 보낸 메시지를 작성한 곳이 맨하탄의 웨스턴 유니언(Western Union) 사무실이라는 것을 알아냈고, 손으로 쓴 메시지 원본도 발견했다. 필체와 문법으로 미루어 볼 때, “하워드”는 일정 수준 이상의 교육을 받은 것이 분명했다. 경찰은 또한 “하워드”가 버드씨 집에 선물하기 위해 크림 치즈를 구매한 노점상도 찾아냈다. 두 지역 모두 주소지가 동부 할렘이었고, 때문에 이 지역은 집중적인 수색과 조사의 중심지가 되었다.


뉴욕 경찰에게 있어 아동 유괴 사건은 낯선 일이 아니었다. 사실은 1년 전에도 기묘할 만큼 유사한 사건이 있었다. 1927년 2월 11일, 4살이던 빌리 개프너(Billy Gaffney)는 아파트 현관 바깥에서 이웃에 사는 같은 이름의 3살짜리 빌리와 놀고 있었다. 어린 여동생을 돌보던 12살 소년이 이들과 함께 놀려고 밖으로 나왔다가, 여동생이 깨어 우는 소리를 듣고 재빨리 아파트로 들어갔다. 몇 분 후, 12살 소년은 밖에 있던 두 빌리가 없어진 것을 발견하고 3살짜리 빌리의 아버지에게 이 사실을 알렸다. 필사적인 수색 끝에, 아이 아버지는 건물 옥상에서 자기 아들을 발견했다. 아이는 지붕 위에 올려져 있었다.


“빌리 개프니는 어디 있니?” 남자는 아들에게 물었다.
“부기맨(boogeyman, 못된 아이를 데려간다는 귀신)이 데려갔어요.”


다음 날 형사들 한 무리가 소년 개프니의 실종 사건을 수사하기 위해 찾아왔지만, 그들은 단순한 설명을 반복하는 3살짜리 목격자의 진술을 무시했다. 애초에 경찰은 아이가 근처의 공장 지대에 들어가 길을 잃었거나, 더 운이 나쁜 경우에는 몇 블록 떨어진 고와누스(Gowanus) 운하에 빠졌을지 모른다고 생각했다. 이웃 사람들이 수색대를 조직했고 운하 바닥을 준설하기도 했지만, 어린 빌리의 흔적은 찾을 수가 없었다.


시간이 흐르면서, 몇몇 사람들은 “부기맨”의 인상착의를 묘사한 3살짜리 목격자의 진술에 귀를 기울였다. 부기맨은 회색 머리와 회색 콧수염을 기른 호리호리한 체격의 노인이었다. 허나 경찰은 이러한 진술에 별로 관심을 두지 않았고, 수 년 전 “회색 남자(Gray Man)”가 저지른 범죄와도 연계시키지 못했다.


1924년 7월, 당시 8살이던 프랜시스 맥도넬(Francis McDonnell)은 스테이튼(Staten) 섬의 전원지대 찰튼 우즈(Charlton Woods)에 있던 자기 집 현관에서 놀고 있었다. 근처에 앉아서 아직 아기인 어린 딸을 보살피고 있던 소년의 엄마는, 회색 머리와 회색 콧수염을 기른 깡마른 노인이 길거리 한 가운데에 서 있는 것을 보았다. 초라한 행색의 낯선 노인은 끊임없이 주먹을 쥐었다 폈다 하면서 무언가 중얼거리고 있었다. 노인은 소년의 엄마를 향해 모자를 살짝 벗어 인사하고는 거리를 따라 내려가 사라졌다.


그 날 늦은 오후, 노인이 다시 나타나 프랜시스와 다른 아이들 4명이 공놀이 하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노인은 프랜시스를 자기 쪽으로 불렀다. 몇 분 후, 프랜시스와 노인 두 사람 모두 사라졌다. 이웃 사람 하나가 프랜시스로 보이는 소년이 그 날 오후 숲 속으로 걸어 들어가는 모습을 목격했으며, 회색 머리의 노인이 소년 뒤를 따라 터벅터벅 걷고 있었다.


그 날 저녁식사 전까지는 아무도 프랜시스가 없어진 것을 알지 못했다. 경찰이던 소년의 아버지는 즉각 수색대를 조직했다. 소년의 시체는 숲 속에서 나뭇가지에 덮힌 채 발견되었다. 시체는 끔찍하게 손상되어 있었다. 옷이 몸에서 찢겨져 나갔으며 멜빵으로 목이 졸려 죽어 있었다. 프랜시스의 시체가 너무나 심하게 두들겨 맞은 상태였기 때문에, 경찰은 “늙은” 떠돌이 남자가 실제로는 외모 만큼 늙거나 연약한 사람이 아닐 것이라고 생각했다. 구타 흔적으로 보아 어쩌면 늙은 떠돌이에게 아이를 두들겨 팰 만한 힘을 가진 공범이 있는지도 몰랐다.


얼마 후, 맨하탄의 지문 전문가들과 경찰 소속 사진사들, 그리고 250명의 사복경찰들이 이 사건에 투입되었다. 대규모의 범인 수색 결과 유력한 용의자들이 몇몇 지목되었지만, 그 중 누구도 회색 머리에 회색 콧수염을 기른 노인의 모습이 아니었다. 노인의 얼굴은 소년의 엄마 안나 맥도넬(Anna McDonnell)의 기억 속에 영구히 낙인 찍혀 있었다. “그 남자는 길을 따라 느릿느릿 걸어왔는데, 무언가 중얼대면서 이상한 손짓을 하고 있었어요. 그 손짓을 잊을 수가 없어요. 전 그 손짓을 보면서 두려움을 느꼈죠. 주먹을 쥐었다 폈다가, 쥐었다 폈다가, 또 쥐었다 폈다가…남자는 프랜시스와 아이들을 바라보았어요. 남자는 무성한 회색 머리털과 늘어진 회색 콧수염을 기르고 있더군요. 남자 주변의 모든 것들이 빛이 바랜 회색으로 느껴졌어요.”
경찰과 지역 주민들의 헌신적 노력에도 불구하고, “회색 남자”는 공중으로 사라졌다.


1934년 11월, 그레이스의 실종 사건은 공식적으로는 여전히 수사 중이었으나 해결될 것이라 믿는 사람은 없었다. 오직 한 사람, 윌리엄 킹(William F. King) 형사만이 계속 수사를 진행하고 있었다. 킹 형사는 가끔씩 칼럼니스트 월터 윈첼(Walter Winchell)에게 사건 수사가 끝날 것이라는 거짓 정보를 흘리곤 했다. 1934년 11월 2일, 윈첼은 이 떡밥을 물었다.
“그레이스 버드의 실종사건 수사 상황에 대해 알아보았다.” 윈첼은 자기 칼럼에서 이렇게 적었다. “그레이스는 6년 전 실종 당시 8살이었다. 실종사건 수사본부는 이 사건을 4주 안에 종결 짓거나 종결을 검토할 것으로 예상된다.”


열흘 후, 델리아 부인 앞으로 편지 한 통이 배달되었다. 다행히 부인은 문맹이었기 때문에 이 편지를 읽는 사태를 피할 수 있었다. 아들 에드워드가 대신 편지를 읽고는 즉시 문을 박차고 나가 킹 형사에게 달려갔다. 편지 내용은 극도로 야만적이었다.


“친애하는 버드 부인께
1894년, 제 친구 하나가 존 데이비스 선장이 이끄는 증기선 타코마 호에서 선원으로 일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샌프란시스코를 떠나 차이나의 홍콩으로 항해했지요. 도착 후 제 친구는 동료 두 명과 함께 육지에 올라가 술을 마셨죠. 그리고 돌아왔을 때 배는 이미 떠나고 없었습니다.


당시 차이나는 기근에 시달리고 있었죠. 고기라는 건 종류를 막론하고 한 파운드 당 1달러에서 3달러 정도는 줘야만 살 수 있었습니다. 가난한 사람들의 고통은 너무도 심한 것이어서, 그들은 결국 굶어 죽지 않기 위해 12살 미만의 모든 아이들을 음식거리로 내다 팔았습니다. 14살 미만의 어린 아이들은 안심하고 길을 다닐 수가 없었죠. 어느 가게든 들어가서 스테이크나 스튜(역주 : 재료를 한데 섞어 소스 팬에 넣고 장시간 푹 끓여 만드는 서양식 찌개 요리)를 해먹을 고기를 살 수가 있었습니다. 어린 아이들의 잘려진 신체 일부를 가지고 나와서 원하는 부위를 잘라주곤 했지요. 얇게 썬 송아지 고기처럼 팔리던 아이들의 엉덩이 고기는 맛이 가장 좋았기 때문에 값도 제일 비쌌습니다.


제 친구 존은 그 곳에 머무르면서 인육의 맛을 알게 되었죠. 뉴욕으로 돌아오면서, 그는 각각 7살과 11살인 소년 두 명을 몰래 잡아서 데려왔습니다. 자기 집에 데려가 옷을 벗기고는 묶어서 옷장 속에 가두었죠. 그리고 아이들의 소지품을 모두 태웠습니다. 친구는 날마다 밤낮을 가리지 않고 몇 차례씩 아이들을 때리고 고문했습니다. 그래야 고기가 부드러워지고 맛있어지니까요.


친구는 우선 11살짜리 아이를 먼저 죽였는데, 왜냐하면 그 아이의 엉덩이가 더 살이 쪄서 살점이 많았기 때문입니다. 친구는 머리와 뼈, 내장을 제외한 모든 신체 부위를 요리해서 먹었습니다. 엉덩이 살은 모두 오븐에 구워 먹었고, 나머지는 끓이거나, 익히거나, 튀기거나, 스튜 요리를 해서 먹었습니다. 다음 차례는 7살짜리였고 같은 방식으로 해먹었죠. 당시 저는 100번가 동쪽 409번지, 그러니까 바로 옆에 살고 있었습니다. 친구는 사람고기가 얼마나 맛있는지를 종종 말해주었고 저도 한 번 먹어봐야겠다고 결심하게 되었죠.


1928년 6월 3일, 저는 15번가 서쪽 406번지에서 부인에게 전화를 걸었습니다. 치즈 항아리 1개와 딸기를 선물로 가져 갔구요. 우리는 점심을 함께 먹었습니다. 그레이스는 제 허벅지에 앉아서 저에게 키스했지요. 저는 그 아이를 잡아먹기로 결심했습니다.


그레이스를 파티에 데려가겠다고 했을 때 말인데요. 아이에게 가도 좋다고 허락한 건 부인입니다. 저는 미리 준비해 둔 웨스트체스터(Westchester)의 빈 집에 아이를 데려갔죠. 집에 도착한 후 저는 그레이스에게 밖에서 기다리라고 말했습니다. 아이는 들꽃을 꺾고 있더군요. 저는 위층으로 올라가서 옷을 모두 벗었습니다. 안 그러면 아이의 피가 옷에 묻을 테니까요.


준비가 끝나자 저는 창문으로 가서 그레이스를 불렀습니다. 그리고 아이가 방에 들어올 때까지 옷장에 숨어 있었죠. 그레이스는 저의 벗은 몸을 보자마자 울음을 터뜨리더니, 계단 쪽으로 달려가 도망치려 하더군요. 제가 잡아끌자 엄마에게 이르겠다고 말했죠.


우선 저는 아이의 옷을 벗겼습니다. 어찌나 발길질을 하며 물고 할퀴던지. 저는 목을 졸라 아이를 죽인 후, 살점을 제 집으로 옮기기 편하도록 시신을 여러 조각으로 잘랐습니다. 그리고 요리해서 먹었죠. 아이의 작은 엉덩이 살을 오븐에 구워 먹었는데 그렇게 달콤하고 부드러울 수가 없었습니다. 다 먹어 치우는데 9일 걸리더군요. 아이를 겁탈할 수도 있었지만 그렇게는 하지 않았습니다. 따님은 처녀로 죽은 겁니다.”


아무도 이 편지의 내용이 사실이라고 믿으려 하지 않았다. 이것은 변태적이고 사디스트적인 똘아이의 헛소리여야 했다. 그러나 킹 형사는 버드 가족 및 그레이스와의 만남에 대한 편지의 세부 내용이 정확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또한, 이 끔찍한 편지의 필체는 6년 전의 늙은 유괴범이 웨스턴 유니언 직원을 통해 보냈던 편지의 필체와 일치했다.


편지봉투는 중요한 단서가 되었다. 봉투에 찍힌 6각형의 작은 문장에는 N.Y.P.C.B.A 라는 여섯 글자가 들어 있었는데, 이는 뉴욕 민간 택시기사 복지연합회(New York Private Chauffeur’s Benevolent Association)의 약자였다. 연합회 회장의 도움으로 회원들을 대상으로 한 긴급 회의가 소집되었다. 한편으로, 경찰은 연합회 회원들이 적어낸 가입원서를 대상으로 “프랭크 하워드”와 동일한 필체가 있는지 조사했다. 회원들 모두의 필체를 조사한 후 용의자를 찾지 못하자, 킹 형사는 회원들에게 연합회의 편지지와 봉투 등을 사적으로 이용한 사람이 있으면 말해달라고 요청했다.


건물의 젊은 관리인이 앞으로 나와, 자신이 편지지와 봉투 몇 장을 자기 집으로 가져 갔었다고 실토했다. 가져간 곳은 52번가 동쪽 200번지에 위치한 낡은 하숙집 이었다. 하숙집 여주인은 “프랭크 하워드”의 인상착의를 듣고 깜짝 놀랐다. 그 집에서 두 달간 살았던 노인의 모습과 너무나 흡사했기 때문이다. 노인은 불과 이틀 전에 하숙집을 떠난 상태였다.


노인의 이름은 앨버트 피쉬(Albert H. Fish)였다. 노인은 노스 캐롤라이나에서 민간자원보존단(Civilian Conservation Corps. 대공황시절 실업구제 프로그램의 이름)으로 일하는 아들이 자신에게 편지를 보내올 거라고 여주인에게 말한 적이 있었다. 노인의 아들은 늙은 아버지에게 정기적으로 돈을 보내고 있었다.
마침내, 우체국에서 앨버트 피쉬를 수신인으로 하는 편지를 가로챘다고 킹 형사에게 연락해 왔다. 킹 형사는 피쉬가 하숙집 여주인에게 연락을 해오지 않아 초조해하던 참이었다. 경찰은 그가 무언가에 놀라 달아난 것은 아닐까 우려하고 있었다.


1934년 12월 13일, 여주인은 킹 형사에게 전화했다. 앨버트 피쉬가 편지를 찾으러 하숙집에 와 있었다. 킹 형사가 문을 열고 들어섰을 때, 노인은 차를 마시며 앉아 있었다. 자리에서 일어선 피쉬는 킹 형사가 앨버트 피쉬가 맞느냐고 묻자 고개를 끄덕였다.
순간, 피쉬는 주머니에서 면도칼을 꺼내더니 앞으로 내밀며 위협했다. 분노한 킹 형사는 노인의 팔을 잡아 힘껏 비틀었다. “넌 이제 잡혔어.” 형사는 의기양양하게 말했다.


피쉬의 자백은 많은 사법관계자들과 정신과 의사들이 검토했다. 극히 일부분만이 신문에 공개되었다. 그것은 성도착과 입에 담지 못할 타락의 서사시였으며 세부적으로 하나하나 확인하기 전까지는 믿기 힘들어 보였다. 연약하고 순하게 보이는 피쉬의 외모를 감안하면 더욱 놀라운 일이었다. 그는 구부정하고 허약해 보이는 노인으로서 몸무게는 130파운드(약 58.9kg)에 키는 5피트 5인치(약 165cm) 밖에 되지 않았다.


킹 형사가 최초 심문을 맡았다. 피쉬는 자신이 1928년 여름에 “피의 갈증”, 곧 살인 충동에 사로잡혔다고 말했다. 에드워드 버드의 구직광고를 보고 접근했을 때, 피쉬의 목표는 그레이스가 아닌 에드워드였다. 그는 에드워드를 먼 곳으로 유인한 뒤 결박하여 성기를 잘라내고는 피를 흘리다 죽도록 내버려 둘 생각이었다.


버드씨 집을 처음 방문한 후, 피쉬는 소년을 살해하고 신체를 잘라내기 위한 도구를 미리 구입했다. 고기 써는 큰 칼과 톱, 정육점용 칼이었다. 그는 이 흉기들을 한데 묶은 후 버드씨 집을 두 번째이자 마지막으로 방문하기 직전에 신문 가판대에 맡겨두었다.


피쉬는 성인 몸집의 건장하고 젊은 에드워드와 그의 친구 윌리를 보고도 자신이 두 사람을 충분히 제압할 수 있다고 확신했다. 피쉬는 이미 그런 일에 대해 많은 경험을 쌓고 있었다.


피쉬가 마음을 바꿔 자신의 계획을 수정한 것은 그레이스를 만난 직후였다. 그레이스야말로 그가 진정 죽이고픈 대상이었다. 아무런 의심도 없는 그레이스를 데리고, 피쉬는 가판대에 들러 짐을 찾은 후 브롱스행 기차를 타고 웨스트체스터의 워씽톤(Worthington) 마을로 향했다. 그레이스의 기차표는 편도로 끊었다. 그레이스는 시골로 향하는 40분간의 기차 여행에 신이 났다. 아이는 도시 밖으로 나간 경험이 딱 두 번 밖에 없었다. 그것은 정말 멋진 외출이었다.


위씽톤에 도착하자, 피쉬는 자신의 사악한 계획에 너무 몰두한 나머지 흉기가 든 짐을 기차 선반에 두고 내렸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레이스가 알려주는 바람에 짐을 챙길 수 있었다. 두 사람은 한참을 걸은 끝에 위스테리아 별장(Wisteria Cottage)이라 불리던 숲 속 한가운데 버려진 2층집에 도착했다. 그레이스가 마당에서 들꽃을 구경하는 동안, 피쉬는 2층의 침실로 올라가 흉기가 든 짐을 풀고는 옷을 벗었다. 그리고 위층으로 올라오라고 그레이스를 불렀다.


기다리는 동안 꺾은 들꽃으로 만든 꽃다발을 손에 든 채, 그레이스는 집안으로 들어와 2층 침실로 올라왔다. 피쉬의 알몸을 본 그레이스는 엄마를 찾으며 비명을 지르고 도망치려 했다. 그러나 피쉬는 그레이스를 붙잡아 목을 졸라 죽였다. 그는 아이의 목을 조르면서 성적인 흥분을 느꼈다. 피쉬는 낡은 페인트 통에 아이의 머리를 댄 후 목을 잘랐고, 대부분의 피는 페인트 통에 쏟아졌다. 그는 피가 담긴 페인트 통을 마당으로 던져 버렸다. 목이 잘린 시체의 옷을 벗긴 후, 정육점용 칼과 고기 써는 큰 칼을 이용해 시체를 둘로 잘랐다.


피쉬는 잘라낸 시체 일부를 신문지에 싸서 가져갔다. 나머지는 그냥 두었다가 며칠 후 돌아와 집 뒤에 있는 돌담 너머로 던졌다. 흉기도 같은 방식으로 처리했다. 피쉬의 자백이 끝난 후, 킹 형사는 마지막 질문을 던졌다. 무엇 때문에 이런 끔찍한 짓을 했느냐고.
“글쎄요.” 피쉬는 대답했다. “나도 도무지 이유를 모르겠소.”


존 스테인(John Stein) 경위는 왜 버드씨 집으로 편지를 보냈느냐고 물었고 피쉬는 자기도 모르겠다고 대답했다. “난 그저 편지 쓰는 걸 좋아할 뿐이오.” 그 날 경찰은 위스테리아 별장으로 출동해 그레이스의 유해를 수습했다. 앨버트 피쉬도 근처에 서 있었으며, 아무런 감정의 동요도 보이지 않았다. 그 날 밤 10시, 프랜시스 마로(P. Francis Marro) 지방검사보가 피쉬를 심문했다. 그레이스를 왜 죽였느냐고 묻자, 피쉬는 “일종의 피에 대한 갈증”이 자신을 압도했기 때문이라고 대답했다. 그레이스를 죽이고 난 후, 그는 깊은 슬픔에 빠졌다. “죽이고 나서 30분도 지나지 않아, 나는 그 아이를 다시 살릴 수만 있다면 내 목숨이라도 바치고 싶었소.”


마로 검사보는 피쉬가 그레이스를 강간했는지 물었으나 피쉬는 완강히 부인했다. “그런 생각은 결코 하지 않았소.” 피쉬가 버드씨 집으로 보낸 편지에 언급된 식인 이야기에 대해서는 당시 누구도 묻지 않았고 피쉬도 아무 진술을 하지 않았다. 경찰은 그것이 사실로 보기에는 너무도 정신 나간 이야기라고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또는, 아마도 경찰은 식인에 관한 상세한 내용을 조사할 경우 분명히 정신 이상을 주장할 변호인의 주장에 힘을 실어줄 것이라고 이미 생각하고 있었을 것이다.


앨버트 피쉬의 체포 소식은 그 날 밤 신문사들에 유출되었고, 버드씨의 아파트에는 소식을 들은 기자들이 몰려들었다. 얼마 후, 킹 형사는 버드씨와 아들 에드워드를 경찰서로 데려가 피쉬가 범인이 맞는지 확인하도록 했다. 에드워드는 확인하는 정도로 그치지 않았다. 그는 피쉬에게 달려들었다. “이 나쁜 자식! 더러운 개자식아!”


버드씨는 무표정한 피쉬의 얼굴을 보고 놀랐다. “날 모르겠소?” 그는 피쉬에게 물었다.
“압니다.” 피쉬는 공손히 대답했다. “버드 선생 아니오.”“당신은 우리 집에 손님으로 찾아와 내 어린 딸을 빼앗아갔소.” 버드씨는 울면서 말했다.


당연한 일이지만, 앨버트 피쉬는 경찰에게 낯선 인물이 아니었다. 그의 전과기록은 중절도죄로 복역한 1903년부터 시작되었다. 이후에도 그는 음란 편지 발송이나 좀도둑질 같은 여러 가지 잡다한 범죄를 저질러 6차례나 체포되었다. 그 중 3번은 그레이스의 유괴사건이 발생한 무렵의 일이었다. 매 번 그의 혐의는 기각되었다. 그는 1차례 이상 정신병원에 수감된 적도 있었다.


자신의 배경에 대해 질문 받자 피쉬는 이렇게 대답했다. “나는 1870년 5월 19일 워싱턴 DC에서 태어났소. 우리는 2구와 3구 사이의 N.E. B 거리에 살았죠. 선장이던 아버지 이름은 랜달 피쉬(Randall Fish)로, 아버지는 프리메이슨의 32급 단원이셨으며 지금은 의회 묘지의 프리메이슨 본부 구역에 묻혀 계시다오. 아버지는 포토맥 강을 따라서 워싱턴 DC와 버지니아 주 마샬 홀(Marshall Hall)을 오가던 배의 선장이셨소.”


“1875년 10월 15일, 아버지는 가필드 대통령이 저격 당한 낡은 펜실베니아 역에서 쓰러져 돌아가셨고 나는 워싱턴의 성 요한 고아원에 맡겨졌소. 9살이 될 때까지 그 곳에 있었는데, 내가 잘못되기 시작한 것도 바로 그 때부터요. 우리는 채찍으로 무자비하게 얻어맞았지. 소년들이 해서는 안될 짓을 하는 것도 많이 보았소. 1880년부터 1884년까지는 성 요한 고아원의 성가대 활동을 하면서 소프라노를 맡았지. 그러다 뉴욕으로 왔고, 난 페인트공 일을 잘했기 때문에 실내 인테리어 같은 일을 했다오.”

“나는 아파트를 구하고 어머니를 워싱턴에서 모셔왔지. 우리는 101번가 서쪽 76번지에 살았고, 난 거기 살면서 아내를 만났소. 아이 여섯을 낳고 나서 아내는 나를 떠났어요. 아내가 떠나면서 가구를 모두 가져갔기 때문에 나는 아이들을 재울 매트리스 하나도 없었지.”

“지금도 아이들이 걱정이오.” 피쉬는 훌쩍거리며 말했다. 그의 여섯 자녀들은 막내가 21살, 맏이가 35살이었다. “늙은 아버지가 감옥에 있으면 면회를 올 만도 한데, 아이들은 한 번도 오지 않더군요.”


앨버트 피쉬는 맨하탄과 웨스트체스터 두 지역에서 기소되었다. 먼저 웨스트체스터 지역이 피쉬를 1급 살인 혐의로 기소했고, 맨하탄 지역은 그를 유괴 혐의로 기소하려 준비하고 있었다.


한편 경찰은 사건 수사에 큰 진전을 보았다. 신문에서 피쉬의 사진을 본 브룩클린 지역의 전차 운전사가 경찰을 찾아왔는데, 운전사는 1927년 2월 11일 전차 안에서 어린 소년과 함께 앉아 소년을 조용히 시키려 애쓰던 신경질적인 노인을 보았으며 그가 바로 피쉬라고 증언했다. 증언 시점에는 이미 은퇴한 상태였던 전차 운전사 조세프 미한(Joseph Meehan)은 당시 두 사람을 유심히 지켜보았다. 아무런 자켓이나 코트도 입지 않은 소년은 계속해서 엄마를 찾으며 울먹였고, 노인은 소년을 억지로 끌면서 전차를 타고 내렸다. 나중에 밝혀진 대로, 어린 소년은 유괴된 아이 빌리 개프니였다.


결국, 피쉬는 자신이 빌리 개프니에게 저지른 입에 담기 힘든 짓을 털어놓았다. “난 그 아이를 라이커 거리에 있는 쓰레기장으로 데려갔소. 거기엔 외딴 집이 한 채 있는데, 내가 아이를 데려온 곳에서 멀지 않은 곳이오. 난 아이를 집 안으로 데리고 들어갔지. 옷을 벗기고 손과 발을 묶은 후 쓰레기장에서 주운 더러운 천 조각으로 입을 틀어막았소. 아이의 옷은 태워 버렸죠. 신발은 쓰레기더미에 던져버렸소. 나는 걸어나가 전차를 타고 새벽 2시에 59번가에 도착했고 거기부터는 걸어서 집으로 갔다오.”
“다음날 오후 2시, 나는 연장과 상태 좋고 묵직한 아홉 갈래 고양이 꼬리 채찍(cat-of-nine tails)을 챙겨 갔소. 집에서 만들었지. 손잡이가 짧았소. 허리 띠 하나를 반으로 자른 후, 각각의 반쪽을 8인치(약 20cm) 길이의 6 가닥으로 쪼갠 것이오. 나는 이것으로 아이의 벗은 엉덩이를 다리 사이로 피가 흘러내릴 때까지 채찍질했소. 칼로 귀와 코를 잘라내고 입을 양쪽 귀 밑까지 찢었죠. 안구도 도려냈지. 아이는 그 때쯤에 죽어 있더군요. 나는 아이의 배에 칼을 꽂았고 아이 몸에 입을 댄 채 흘러나오는 피를 마셨소.”
“나는 낡은 감자 포대 네 개를 주워 그 안에 돌멩이를 모아 담았지. 그리고 나서 아이의 시체를 잘랐소. 자루도 하나 준비했어요. 자루 안에는 아이의 코와 귀, 그리고 뱃살 조각들을 집어넣었지요. 그리고 아이의 몸을 두 토막으로 잘랐소. 배꼽 바로 아래였죠. 다음에는 엉덩이 아래 2인치(약 5cm) 부분에서 다리를 잘라냈소. 잘라낸 건 종이 뭉치로 감싸서 자루에 넣었다오. 머리와 발, 팔, 무릎 아래 부분 다리도 잘라냈죠. 이것들은 돌이 담긴 감자 포대에 넣었지. 포대 주둥이를 묶은 뒤 노스 비치(North Beach)로 가는 길가에 쭉 널려 있는 흙탕물 구덩이에 던져 버렸소.”


심문이 진행되면서 피쉬는 다른 사실도 털어놓았다. “난 고기를 들고 집으로 돌아갔지요. 내가 가장 좋아하는 부위인 신체 앞부분이었소. 꼬마의 고환과 성기와 작고 통통한 엉덩이 살은 오븐에 구워 먹을 생각이었소. 우선 귀와 코, 얼굴 살 및 뱃살로 스튜를 만들어 먹었죠. 양파, 당근, 무우, 셀러리, 소금과 후추를 곁들여 먹었다오. 아주 맛이 좋았소.”
“그 다음엔 엉덩이 살을 두 조각으로 나누고, 고환과 성기의 껍질을 벗긴 후 물로 씻었소. 베이컨 두 조각을 엉덩이 살에 하나씩 얹은 후 오븐에 넣고 구웠지. 양파 4개를 준비하고 고기를 15분 정도 구은 다음, 육수를 내기 위해 물을 0.5리터 정도 붓고는 양파를 넣었소. 그리고는 우러난 육수를 나무 스푼을 이용해 계속 고기 위에 끼얹어 주었지요. 그래야 고기와 육즙의 맛이 좋아지니까요.”
“2시간쯤 지난 뒤, 고기는 골고루 익어서 갈색으로 변했소. 내가 먹어본 그 어떤 칠면조 요리도 작고 통통한 엉덩이 고기의 달콤한 맛을 반도 따라오지 못한다오. 난 나흘 정도에 걸쳐 고기를 모두 먹었소. 아이의 고환은 땅콩처럼 맛있었지만 성기는 씹지 못하겠더군요. 화장실 변기에 던져 버렸죠.”


며칠 후, 스테이튼 섬에서 한 남자가 경찰을 찾아왔다. 남자는 피쉬가 1924년 당시 8살이던 자신의 딸을 꾀어 3일 후 프랜시스가 살해된 장소에서 멀지 않은 숲으로 데려가려 한 남자와 동일인임을 확인해 주었다. 이제 십대 후반이 된 소녀는 감방에 있는 피쉬를 보고 즉시 알아보았다. “회색 남자”가 발견된 것이다.


피쉬는 또한 1932년에 파 락워에이(Far Rockaway)에서 발생한 15살 소녀 매리 오코너(Mary O’Connor)의 살인사건에도 연관되어 있었다. 심하게 상처 입은 소녀의 시체는 당시 피쉬가 페인트칠을 하고 있던 집의 근처 숲에서 발견되었다.


여러 지역에서 이처럼 다양한 혐의로 기소를 당했기 때문에, 앨버트 피쉬가 무죄 판결을 받을 가능성은 거의 없었다. 그가 사형 판결을 피할 유일한 방법은 정신과 의사나 법의학자들이 그를 정신병자라고 진단하기를 기대하는 것뿐이었다.


프레데릭 워담(Frederic Wertham) 박사는 자신의 저서 “폭력의 발현(The Show of Violence)”을 통해 앨버트 피쉬와 감옥에서 가진 첫 만남을 묘사하고 있다. 박사는 피쉬가 얼마나 “유순하고, 신사적이고, 인자하고, 공손하게” 보이는지 깜짝 놀라고 말았다. “만일 당신이 당신 자녀를 맡길 사람을 구한다면, 피쉬는 분명 그 대상으로 선택될 사람이었다.”


피쉬는 자신의 상황에 대해 완전히 초연한 태도를 보였다. “나는 특별히 살고 싶은 마음이 없어요. 특별히 죽고 싶은 마음도 없구요. 나는 그런 문제에 무관심합니다. 내 생각에도 내가 완전히 정상은 아닌 것 같군요.”
워담 박사는 피쉬의 그 말이 자신이 미쳤다는 의미냐고 물었다. 피쉬는 대답했다. “꼭 그런 건 아니죠…난 한 번도 내 자신을 이해할 수가 없었어요.”


워담 박사의 조사 결과, 정신이상은 피쉬 집안의 가계를 관통하고 있는 듯 보였다. “숙부 한 명은 종교 광신도가 되어 주립병원에서 죽었다. 배다른 형제 한 명도 주립병원에서 죽었다. 의지 박약아였던 동생 한 명은 뇌수종으로 죽었다. 그의 어머니는 ‘매우 기묘한’ 것들에 몰두했고 목소리를 듣거나 형체를 보았다고 한다. 고모 한 명은 ‘완전히 미친’ 사람으로 간주되었다. 형제 한 명은 만성 알코올중독에 시달렸다. 여동생 한 명은 일종의 ‘정신적 고통’에 시달렸다.”


피쉬는 자신의 본명이 해밀톤 피쉬(Hamilton Fish)이며, 그랜트 대통령 시절 국무장관을 지낸 먼 친척의 이름을 딴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름 때문에 놀림을 많이 받은 피쉬는 스스로 이름을 앨버트로 바꾸었다.
피쉬는 26살이던 해에 19살의 아내를 맞아들여 6명의 자녀를 낳았다. 막내가 3살일 때 아내는 다른 남자와 도망쳤고, 피쉬는 혼자 아이들을 키워야 했다. 피쉬는 그 뒤에도 세 번이나 “결혼”을 했지만, 첫 아내와 이혼한 사이가 아니었기 때문에 이 결혼들은 합법적인 게 아니었다.


워담 박사는 피쉬의 비교 불가능한 사악함이 정신의학 역사와 범죄 문학을 통틀어 독보적 위치에 있다고 생각했다. “어린이, 특히 소년을 향한 새도-마조키즘이 그의 성적 퇴행을 주도했다.”
피쉬는 말했다. “나는 언제나 타인에게 고통을 주고 싶은 욕망과 타인이 나에게 고통을 주었으면 하는 욕망을 가지고 있었소. 고통을 주는 건 무엇이든 재미있어 보였죠.”


워담은 말했다. “배설물을 이용한 모든 상상 가능한 행위들이 그에 의해 능동적 혹은 수동적으로 자행되었다. 그는 솜 조각을 구해 알코올로 적신 뒤, 자신의 항문에 쑤셔 넣고 불을 붙였다. 자신이 죽인 어린이들에게도 똑같이 했다.”


피쉬는 워담 박사에게 자신이 오랜 기간에 걸쳐 아이들을 먹었으며 그 수가 “최소한 100명”이라고 말했다. 피쉬는 돈이나 캔디로 아이들을 꼬시곤 했다. 그는 대개 흑인 아이들을 노렸는데, 흑인 아이들은 설령 다치거나 실종 되더라도 경찰이 별로 신경 쓰지 않을 것이라 믿었기 때문이다.


그는 한 번 살았던 지역에는 절대 되돌아가지 않았다. 그는 자신이 최소 23개 주에서 살았으며 각 주마다 최소 한 명 이상의 어린이를 죽였다고 말했다. 간혹 그는 아이들의 죽음 혹은 피습과 관련되어 있다는 의심을 받아 페인트공 일자리를 잃기도 했다.


그는 음란 편지를 쓰고 싶은 충동을 느꼈고 실제로 종종 썼다. 워담 박사에 따르면, “그것은 대리 만족을 얻으려는 환상이나 백일몽에 기초한 전형적인 음란편지가 아니었다. 그것은 자신이 그림처럼 자세히 적어 보낸 암시를 받는 사람들에게 그의 성적 취향대로 실행해 보자고 제의하는 것이었다.”


애초에, 워담 박사는 피쉬가 자신에게 거짓말을 하고 있지 않은지 우려했으며 특히나 피쉬가 자신의 음낭과 항문 사이 부분에 몇 년에 걸쳐 바늘을 꽂아 왔다고 정신과 의사들에게 말했을 때는 더 그러했다. “그는 그런 짓을 다른 사람들, 특히 아이들에게도 했다고 말했다. 그의 말로는, 처음에는 바늘을 꽂았다가 다시 뽑아냈다고 한다. 나중에는 바늘을 너무 깊이 꽂아서 빼낼 수 없게 되었고, 결국 바늘은 몸 속에 남았다.” 의사들은 그의 엑스레이 사진을 찍었는데, 그의 골반 부위에는 최소 29개의 바늘이 들어 있었다.


55세 무렵, 피쉬는 환상 혹은 환각을 경험하기 시작했다. “그는 예수와 주의 천사들을 보았다…그는 자신의 부정과 죄악을 씻어내고 육체적 고통과 자기 고문, 인신 제물을 통해 속죄한다는 종교 이론에 몰두하기 시작했다. 그는 성서 구절과 자기 자신의 말이 뒤섞인 인용구를 무수히 반복해 말하곤 했다. 예를 들어 ‘자신의 어린 자식을 잡아 그들의 머리를 돌에 찧는 자는 복이 있도다.’ 같은 것이었다.”
피쉬는 신이 자신에게 어린 소년들을 고문하고 거세하라는 명령을 내렸다고 믿었다. 그는 이를 수없이 실천에 옮겼던 것이다.


워담은 피쉬가 빌리 개프니의 신체를 먹은 끔찍한 식인 행위를 묘사하는 걸 들으며 놀랐다. “그 일을 세세한 부분까지 묘사하는 그의 마음 상태는 기묘한 혼돈의 양상을 띠고 있었다. 그는 마치 가정주부가 자신이 가장 자신 있는 요리를 설명하는 듯한 차분한 태도로 이야기 했다…그러나 때때로 그의 목소리와 표정은 일종의 만족감과 희열에 찬 감동을 나타냈다. 나는 나 자신에게 이렇게 말했다. 정상이라는 것의 의학적이고 법적인 경계를 어떻게 정의하건, 이 자는 분명 그 경계 너머에 있는 자라고.”


워담 박사가 보기에, 피쉬가 일종의 종교적 정신병에 걸려 있다는 것은 기정사실이었다. 피쉬의 자녀들은 그가 “못이 잔뜩 박힌 주걱으로 자신의 벗은 몸을 피로 뒤덮힐 때까지 때리는 광경을 보았다. 또한 그가 언덕 위에 혼자 올라가 두 손을 들어 올리며 ‘내가 그리스도다.’라고 외치는 모습도 보았다.”
피쉬는 말했다. “제가 한 일은 분명 옳은 일이었고, 아니었다면 천사가 막았을 겁니다. 성서에서 천사가 아브라함을 (아들을 제물로 바치지 못하도록) 막은 것처럼 말이죠.”


변호인측 정신과 의사였던 워담 박사는 피쉬가 법적인 정신이상자라고 믿었다. “나는 그가 내성적이고 극도로 소아병적인 성격이라고 판단했다…나는 그의 비정상적 정신 세계의 구조와 그의 정신 질환에 대한 개요를 요약했고, 그를 편집증적 정신이상으로 진단했다…피쉬는 환상에 시달렸고 특히 형벌, 죄악, 속죄, 종교, 고문, 자기 징계 등의 문제가 온통 뒤섞여 있었기 때문에, 그는 옳고 그름에 대한 변태적이고 왜곡된, 굳이 말하자면 정신이상적인 지식을 가지게 되었다. 아브라함을 천사가 막았듯 그가 잘못하고 있다면 제재 받을 거라는 게 그의 판단 기준이었다.”


워담은 피쉬가 15명 정도의 아동을 실제로 죽였으며 100여명 정도를 불구로 만들었을 거라고 판단했다. 이 수치는 나중에 경찰에 의해 수 차례에 걸쳐 확인되었다. 변호인측의 다른 정신과 의사 두 명도 피쉬가 정신이상자라고 증언했다. 검찰측이 소환한 정신과 의사 네 명은 피쉬가 정상인이라고 증언했다. 검찰측 정신과 의사 중 한 명은 정신병원 원장이었는데, 피쉬는 그레이스 사건과 다른 살인사건 발생 2년 후 세부 관찰을 위해 그 병원에 수용되었다가 “무해하고 정상”이라는 판정을 받은 적이 있었다.


피쉬의 재판은 그레이스 버드에 대한 계획살인 혐의로 1935년 3월 11일 월요일 뉴욕 주 화이트 플레인에 있는 프레데릭 클로즈(Frederik P. Close) 판사의 법정에서 시작되었다. 수석 지방검사보인 엘버트 갈라거(Elbert F. Gallagher)가 검찰측 대표였고 제임스 뎀프시(James Dempsey)가 변호사를 맡았다.


뎀프시는 1930년에 피쉬를 진찰하고도 그를 정상이라 판정한 벨레부(Bellevue) 병원 정신과 의사들의 신뢰성을 공격한다는 전략을 세웠다. 그는 또한 피쉬가 페인트공들에게 종종 치매 증상을 유발하던 “납 중독”에 걸려있음을 입증한다는 전략도 세웠다.


검찰측인 갈라거의 주요 전략은 재판 초기에 제시되었다. “이 사건에는 정상 추정의 원칙이 적용됩니다. 간단히 말해서, 증거에 따르면 피고는 법적으로 정상이고 옳고 그름의 차이 및 자신의 행동이 지닌 본성과 특성을 알고 있으며, 정신적 결함이 없고, 나이에 비해 기억력도 뛰어나며, 직면한 상황에 완벽히 적응하고, 정신적 쇠퇴의 기미도 없으며, 반면에 성적으로 비정상으로서 의학적으로 볼 때 성도착자 내지는 성적 정신질환자이며, 행동 또한 비정상이지만, 1928년 6월 3일 그레이스를 집에서 데리고 나올 때, 소녀를 죽일 도구를 챙기고 소녀를 이 곳 웨스트체스터 지역으로 데려오면서, 그리고 소녀를 숲 속의 빈 집으로 데려가면서, 그는 그 일이 잘못된 일이라는 걸 알고 있었으며 따라서 그는 법적으로 정상이고 마땅히 자신의 행동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합니다.”


변호사 뎀프시는 피쉬의 기이한 삶과 못이 박힌 주걱 및 바늘을 이용한 자기 학대에 초점을 맞추었다. 또한 피쉬의 아버지로서의 능력과 자녀에 대한 사랑을 내세웠다. “이 모든 야만적이고 범죄적이고 흉포한 성향에도 불구하고, 피고에게는 다른 면도 있습니다. 피고는 매우 좋은 아버지였습니다. 피고는 평생 단 한 번도 자녀들에게 손을 댄 적이 없습니다. 피고는 매 식사 때마다 신에게 감사 기도를 올렸습니다. 1917년, 피고의 여섯 자녀 중 막내 아이가 겨우 3살이던 때에 피고의 아내는 피고를 떠났습니다. 그 때부터 1928년의 그레이스 살해 사건 직전까지 피고는 자녀들에게 아버지이자 어머니였습니다.” 뎀프시는 배심원들에게 아이들을 죽여 잡아먹은 사람이 정상이라면 그건 검찰이 증명해야 할 몫이라고 환기시키며 발언을 마쳤다.


그레이스의 부모와 동생 앨버트 주니어(Albert Jr.)가 증언대에 올랐다. 델리아 부인과 앨버트 시니어씨 두 사람이 모두 그레이스가 피쉬를 따라 생일파티에 가도록 허락했음을 지적하려는 것이 뎀프시의 의도인 듯 했다. 자신이 증언할 차례가 왔을 때, 그레이스의 부친은 감정이 격앙되어 크게 흐느끼기 시작했다.


재판 3일째 날, 변호인 측의 격렬한 항의 속에 그레이스의 유해를 담은 상자가 법정에 증거로 제출되었고, 킹 형사는 피쉬의 자백을 근거로 그레이스가 어떻게 죽었는지를 재현했다. 그런 후 갈라거는 박스에서 죽은 소녀의 작은 두개골을 꺼내어 보였다. 그것은 매우 극적인 장면이었다. 뎀프시는 무효심리를 주장했다.


뎀프시는 정신이상이라는 변론의 주요 근거로서 식인 행위에 집중했다. 피쉬가 죽은 소녀의 신체 일부를 먹은 건 정상인이라면 결코 하지 않을 행위라는 걸 강조하는 것이 뎀프시의 전략임이 분명했다. 그러나 뎀프시는 피쉬가 자신의 말대로 정말 소녀의 시체에 그런 짓을 했는지를 입증하는데 성공하지 못했다.


피쉬는 재판 내내 완전히 무관심한 태도를 보였다. 딱 한 번, 변호사에게 자신도 살고 싶다고 말한 적은 있는데, 그 이유는 “아직 신께서 시키신 일이 남아 있기 때문”이었다.
뎀프시는 피쉬의 자녀 몇 명을 증언대에 세워 종교적 환상을 비롯하여 자기 몸에 바늘을 꽂는 자기학대 행위 등 아버지의 기이한 행동에 대해 증언하게 했다. 자녀들은 또한 피쉬가 늘 자녀들을 보살피는 좋은 아버지였으며 자신들을 학대한 일도 전혀 없다고 증언했다.


피쉬의 이상 행동을 더 자세히 보여주기 위해, 뎀프시는 피쉬로부터 음란 편지를 받은 적이 있는 여인을 증인으로 채택했다. 뎀프시가 피쉬의 음란 메일을 낭독하기 전, 법정 안에 있던 여인들은 모두 퇴장조치 되었다. 변호인측이 내세운 또 다른 증인은 피쉬의 17살 먹은 수양딸 매리 니콜라스였다. 그녀는 피쉬가 그녀를 비롯한 자녀들에게 가르친 게임에 대해 설명했다. “아버지는 당신 방에 들어가서 짧은 갈색 반바지를 입고 나왔어요. 아버지는 반바지 차림으로 거실로 나와서는 손과 무릎을 바닥에 대고 엎드렸고, 페인트를 묻힌 페인트 붓도 가지고 있었죠.”
“아버지가 붓을 우리에게 주고 나서 손과 무릎을 바닥에 대고 엎드리면, 우리는 돌아가며 한 명씩 우리 등이 아버지 머리 쪽을 향하는 자세로 아버지 등 위에 앉곤 했어요. 그리고 나서 우리가 손가락을 아버지 등에 대면, 아버지는 우리가 댄 손가락이 몇 개 인지를 맞추는 거에요. 아버지가 맞추면 우린 아버지를 안 때려도 되는 건데, 아버지는 한 번도 맞춘 적이 없어요. 가끔 아버지는 우리들의 손가락 전체 개수보다 더 많은 숫자를 말하기도 했어요. 아버지는 맞춘 적이 한 번도 없었기 때문에 우리는 늘 우리가 댄 손가락 개수만큼 아버지를 때려야 했죠.”
어떤 때는 페인트 붓 대신 머리솔이 사용되었다. 피쉬는 자녀들이 보는 앞에서 자기 손톱 밑에 핀을 박아 넣기도 했다.


뎀프시는 마침내 검찰측 정신과 의사를 공격할 기회를 얻었다. 찰스 램버트(Charles Lambert) 박사는 3시간에 걸쳐 피쉬를 면담한 뒤 피쉬가 “정신병적인 성격을 지녔으나 정신이상자는 아니다.”라고 판정했었다. 뎀프시는 램버트 박사에게 물었다. “이 남자가 소녀를 죽인 후 소녀의 시체를 먹었다고 가정합시다. 9일에 걸쳐 사람고기를 먹은 남자를 그래도 정신이상자가 아니라고 말하시겠습니까?”
램버트는 대답했다. “글쎄요, 음식에 대한 취향을 일일이 설명할 수는 없는 일입니다.”
뎀프시는 계속 질문했다. “그럼 선생님이 의사 생활을 하면서 인분을 실제로 먹는 사람은 몇 번이나 보셨는지 말씀해 주시죠.”
“아, 저는 사회 저명인사들을 알고 있습니다…특히 우리 모두가 알고 있는 사람 한 명은 그걸 샐러드에 곁들여 먹곤 했지요.” 램버트는 대수롭지 않다는 말투로 대답했다.


뎀프시는 변호인측의 정신과 의사 한 명을 통해 피쉬의 행동에 나타난 정신이상 징후를 더 잘 부각시킬 수 있었다.
재판은 열흘 간 지속되었고, 배심원들은 결론을 내리는데 한 시간도 채 걸리지 않았다.
“우리는 피고가 기소된 대로 유죄라고 판단합니다.” 배심원단 대표가 말했다.


피쉬는 판결 결과에 만족하지 않았지만, 전기의자로 처형된다는 점에는 매력을 느꼈다. 데일리 뉴스지의 기자는 이렇게 적었다. “자신의 변태적 욕구를 만족시키기 위해 종종 자기 살을 지질 때 쓰던 불길보다 더 강력한 열기로 타오르게 될 것임을 생각하자, 그의 축축한 두 눈은 순간 번득였다.”


피쉬는 전기의자 처형 판결을 내려준 판사에게 감사했다. 1936년 1월 16일, 앨버트 피쉬는 처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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