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한상 사건
박한상은 1971년 대형 한약상을 운영하는 아버지 박순태와 어머니 조순희 사이에서 2남 중 장남으로 출생하였으며 부유한 집안에서 경제적으로 여유로운 삶을 살았다.
그러나 박한상은 굉장히 이기적이고 난폭한 성격으로, 중고등학생 시절 술담배를 일삼고 폭력을 휘두르는 등의 비행을 일삼았으며 정신질환으로 수차례 치료를 받는 등 좋지 못한 삶을 살아왔다.
박한상은 본래 자동차에 관심이 많아 차량 튜닝 샵을 운영하는 것이 목표였으나 아버지는 박한상이 한의대에 진학하여 가업을 이어가는 것을 원했기 때문에 이를 탐탁치 않게 여겼고, 둘은 진로 문제로 잦은 갈등을 빚었다.
이후 박한상은 전북 W 대학교 공과대학 토목공학과에 90학번으로 입학했다.
그러나 공부를 싫어했던 박한상은 수업에 거의 매일 결석하였고, 이때부터 룸살롱에 드나드는 방탕한 삶을 일삼았다.
또한 방위병(現 사회복무요원)으로 군 복무를 하던 시절에도 사치와 향락을 멈추지 않았고, 박한상의 대학 동창 혹은 군 동기들은 그를 '자동차, 돈, 여자 자랑하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 '힘든 일은 늘 열외받으려던 사람'과 같이 부정적으로 기억하고 있다고 한다.
이러던 도중, 2살 터울의 차남이 한의대에 진학하면서 더이상 박한상은 집안의 기대주가 아닌 '허구한 날 사고나 치고 합의금이나 축내는 집안의 골칫덩어리' 신세로 완전히 떠밀리게 된다.
결국 박한상은 소집 해제 이후 학교를 자퇴했고, 1994년 1월 18,000$를 손에 쥔 채 미국으로 유학을 떠난다.
아니나 다를까 안에서 새는 바가지 밖에서도 샌다고 박한상은 미국에서도 공부는커녕 술, 도박, 마약에 빠진 채 허송세월을 보내고 있었다. 아버지로부터 받은 18,000달러도 도박과 유흥으로 전부 탕진하였고, 이 과정에서 친구에게 빚보증까지 서게 하는 등 그의 도박 중독은 심각한 수준이었다. 같은해 4월 부모 몰래 신용카드를 발급받고 사채업자에게 빚을 꾼 뒤 나이트클럽을 전전하다 나흘만에 발각되어 미국으로 돌아가야 했고, 미국으로 돌아간 뒤 박한상은 그곳에서도 한화 약 3,700만 원의 빚을 지게 된다. 박한상의 증언에 의하면 아버지의 호출로 귀국하였다가 자신이 사고 싶은 승용차를 살 돈을 주기는커녕(실제론 아버지에게 차를 살 돈을 받았는데 도박으로 전부 탕진함) '넌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능한 놈', '내 아들이 아니니 호적을 파거라'와 같은 심한 꾸지람을 들었고 이를 계기로 범행을 계획하였다고 한다.
박한상은 1994년 5월 13일 범행에 사용할 등산용 칼과 휘발유를 구입한 뒤 엿새 간 치밀하게 범행 계획을 수립하였고, 1994년 5월 19일 자정 삼성동 자택에서 알몸으로 부모의 방에 침입, 그 곳에서 자고 있던 어머니와 아버지를 흉기로 40여 차례 난도질했다. 부모님은 과다출혈로 즉사했고, 증거 인멸을 위해 집에 방화를 한 뒤 도주하였다. 이 과정에서 다른 방에서 자고 있던 국민학교 6학년인 조카 이 모군마저도 연기에 질식, 목숨을 잃고 말았다. 자신의 범행을 은폐하기 위해 무고한 어린 생명마저도 잔인하게 유린한 것이다.
이후 박한상에 머리에 피가 묻어있었다는 증언과 종아리에 남은 이빨자국, 같은 방에서 자고 있었지만 그는 무사했던 점 등을 수상하게 여긴 경찰이 그를 집중적으로 심문했고, 결국 그는 재산 상속을 노리고 부모를 살해했다고 자백하였다. 사건 발생 6일만에 그는 검거되었고, 존속살인 및 현주건조물방화치사 혐의로 구속 기소되었다.
동정의 여지가 전무한 패륜아에게 법원은 관대할 이유가 전혀 없었고, 그는 1 ~ 3심 모두 사형을 선고받았다. 현재도 사형수 신분으로 구치소에서 복역 중이다.
아래는 그를 만난 사람들의 증언이다.
박한상과 6년간 상담을 한 교화위원 양순자 "아무리 흉악한 범죄자라도 그들과 이야기하고 나면 일말의 동정심은 드는 경우가 많지만, 박한상만큼은 전혀 그렇지 않으며 지금도 용서할 수가 없다. 면회를 갔을 때 피자를 사갔더니만 고마워 하기는커녕 '왜 내가 먹는 브랜드로 안 사왔냐'고 짜증을 내거나 가석방을 호시탐탐 노리는 등 여전히 유산을 상속받는 데에만 혈안이 되어 있다." (참고로 박한상은 존속 살인을 저지른 순간부터 단 1원도 상속받을 자격이 없으며, 무기징역이 아닌 사형을 선고받았으므로 탈옥이라도 하지 않는 이상 절대 살아서 감옥을 나갈 수 없다.)
박한상의 동생 "딱 한 번 형을 면회하러 갔는데, 참회는커녕 '나는 무죄'라고 주장했다." (이 이후로 박한상의 동생은 두 번 다시는 형을 찾아가지 않았다고 한다. 박한상의 동생은 현재 지방에서 한의원을 운영하고 있다.)
인권변호사 황산성 "일말의 교화 가능성을 기대하고 그의 변호를 자처했으나 그는 일관되게 '나는 누명을 썼다'고 주장했다." (결국 황 변호사는 3개월만에 사의를 표명하였다.)
그 외에 박한상은 교도소에서 다른 수감자와 주먹다짐을 했다가 독방으로 이감되기도 했다는데, 이로 미루어 보아 지금도 반성은 눈곱만큼도 하지 않는 모양이다. 범죄자 중에서도 극히 질이 나쁜 케이스라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