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인조의 정비 <인열왕후>
세조의 정희왕후 못지않은
조선의 내조 퀸이라고 해도 손색이 없음
1610년 (광해군 2년) 인조가 능양군이던 시절에 가례를 올렸고
그때 살림이 궁핍했는데 왕족인 인조는 돈을 못벌고, 그걸 인열왕후가 현부인의 신분으로
본인이 가지고 있던 재산을 팔아 살림을 꾸렸다고 함
1612년에 장남 이왕 (소현세자)을 낳았고 7년 후에 차남 이호 (봉림대군(훗날 효종))를 낳았어
왕자들을 많이 낳았기 때문에 입지가 굳건 했으며
(그녀는 6남 1녀를 낳았다)
그 때문에 소용 조씨 같은 나부랭이들은
감히 언감생심 숨소리도 못내고 눌려서 지냈으며
왕가에 시집을 왔지만 중전과는 거리가 멀었음에도 후덕하면서도 강단있는 성격으로 보였다고 함
왕비가 된 이후에 내명부를 다스리게 되었는데, 중전으로서 엄하게 다스려 내명부가 안정되었으며 자녀교육에도 엄격했다고 한다.
다만 자애롭고 관대한 면모도 보인 일화가 있는데, 인열왕후는 광해군과 폐비 류씨를 따른 내인들을 바꾸지 않고 그대로 기용했다.
그러던 중 "오랫동안 광해군을 모신 한보향이라는 상궁이 광해군을 그리워하며 통곡한다"는 것을 밀고받았다.
그런데 이를 듣고 인열왕후는 '이는 의로운 사람이다' 며 한보향을 불러 '우리 임금이 하늘의 덕으로 보위에 있지만
훗날 폐조처럼 왕위를 잃게 될지 어찌 알겠느냐? 너의 마음가짐이 이러하니 내 아들을 보육할 만하다' 며 소현세자를 그녀에게 맡겼다고 한다.
반면 밀고한 이에게는 '오늘 날 너의 행동이 다른 날의 마음을 알 수 있다'며 모두가 보는 앞에서 종아리를 때렸다.
이는 광해군을 모신 상궁 내인들에게 찬탈자로 인식된 인조정권에 대한 반감을 없애고 궁인들이 모두 안심하고 복종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와 같이 인열왕후는 인조반정 이후 피를 보는 일을 줄이려고 노력했으며,
남편 인조에게도 항상 "살생을 하지 말고, 긴장의 경계를 풀지 말라"고 조언했다.
그녀의 노력으로 인해 민심은 인조에게 향했다고 한다.
둘의 금술도 좋아서 자식들을 후기 왕비들 중에서 제일 많이 낳았는 데
막내 아들을 낳은 후 사산해서 그 충격으로 산욕열까지 얻어서 결국 사망해 버렸다고 한다
꼼짝도 못하고 살던 인조는
인열왕후 사후에 고삐가 풀리면서
우리가 알고있는 병자호란, 삼전도의 굴욕
소현세자 민회빈강씨 원손들의 참극 등
조선 역사상 가장 쪽팔린 일들이 줄줄이 터짐
또한 나이어린 새 계비 장렬왕후를 간택한 뒤
방치하는 바람에 내명부의 질서가 무너지고
소용 조씨 같은 후궁 나부랭이들이 설치는 계기가 됨
인열왕후 그녀가 살아있었으면
민회빈 내외도 죽지 않았을거란 평가가 지배적이며
조선 왕비중에 평가가 아주 좋은 왕후 중에 한명
ㅊㅊ더쿠
요즘 훗날의 인조 짤을 보고 생각나는 여자가 난 인렬왕후여서 ㅋㅋㅋ
https://gfycat.com/AffectionateEqualArgal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