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에서는 자신의 나이를 기준으로 위·아래 10년 차이까지는 그냥 친구라고 부릅니다.
자신의 나이보다 10년 이상 아래면 어린 친구(小朋友)라 하고 10년 이상 위면 늙은 친구(老朋友)라고 합니다.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2223174
중국에서는 마음을 같이하며 지낼수 있는 또는 같은 동질성이나 목적의식을 갖고 친하자 라며 우리나라보다는 계층간의 범위제안을 두지 않았다는 부분이 다소 차이가 있습니다.
이렇듯, 중국인들의 사고나 문화에서 비롯된 "친구"라는 개념을 이해 못 하고 우리나라 방식으로 접근하다 보니 그들과 친구되기가 쉽지 않는 겁니다.
무슨 뜻이냐면, 정식적으로 한국에서 교육을 받고 성년이 되기까지 자란 사람들은 나이와 직위에 관계없이 친구되기가 쉽지 않습니다. 반대로 말하면 중국인들이 말하는 친구라는 개념정리가 안 되는 분들도 있겠지만, 설령 이해했다 했더라도 한국인으로서는 그런 친구를 받아 들이기기 쉽지 않다는 뜻입니다.
http://blog.daum.net/aplace/13912487
나이 따지는 문화의 원흉으로 지목되는 것이 ‘장유유서’다. 나이순으로 서열을 정하는 유교적 잔재가 이 모든 문제의 근원이라는 것이다. 하여간 나쁜 건 전부 유교적 잔재란다. 한국 사회의 모든 문제를 유교적 잔재 탓으로 돌리는 건 게으른 사회학자의 핑계에 불과하다. 문제를 해결하려면 원인을 정확히 파악해야 한다. 결론부터 말하면 장유유서는 나이와 무관하다.
장유유서는 <맹자>에 나오는 말이다. 먼 옛날 순임금이 다섯 가지 유형의 인간관계에서 지켜야 할 윤리를 제시했다. 부자유친은 부자관계, 군신유의는 상하관계, 부부유별은 부부관계, 붕우유신은 수평관계, 그리고 장유유서다. 장유유서는 어떤 관계에 적용되는 윤리일까? 형제관계, 조금 더 확대하면 친족관계의 윤리다. 사회윤리가 아니라 가족윤리라는 말이다. 그러니 장유유서를 찾고 싶으면 집에 가서 찾든가 명절에 친척들 모인 자리에서 찾는 것이 좋겠다.
같은 유교문화권인 중국과 일본은 우리처럼 나이를 따지지 않는다. 그렇다면 나이 따지는 문화의 원흉은 유교 아닌 다른 데서 찾아야 하지 않겠는가.
나이 따지는 문화는 전근대적 유산처럼 보이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근대의 산물이다. 근대적 학제의 도입은 취학연령과 교육과정을 법제화했다. 모든 학생이 같은 나이에 입학해서 정해진 기간 동안 공부하고 같은 나이에 졸업했다. 자연히 취업과 결혼, 승진과 정년에 적합한 나이도 대충 정해졌다. 제 나이에 정해진 경로를 따라가면 성공한 인생이고, 따라가지 못하면 실패한 인생이다. 나이에 민감해지지 않을 수 없다.
정해진 경로를 따라가는 인생에서 나이는 사회적 서열을 가늠하는 기준이다. 결국 나이 따지는 문화는 서열에 민감한 우리 사회의 단면이다. 서열이 자주 바뀌면 덜 민감하겠지만, 한 번 정해진 서열은 좀처럼 바뀌지 않는다. 월반과 유급이 사라진 학교, 능력과 성과보다 근속연수가 중요한 직장, 개성과 다양성을 무시하고 획일화를 지향하는 사회, 이것이 나이 따지는 문화가 사라지지 않는 이유다.
원숭이 무리조차 서열이 자주 바뀌는데 그보다 높은 잠재력을 가진 인간의 서열이 바뀌지 않는다면 문제다. 서열이 고착화된 사회는 병든 사회다. 서열을 없앨 수 없다면 최소한 바뀌기 쉽게 만들어야 한다. 하지만 반발이 만만치 않을 것이다. 갑작스러운 서열 변화를 반기기보다는 두려워하는 사람이 많을지도 모르겠다. 나이 따지는 문화가 불만이라면, 엄한 유교를 탓하기 앞서 우리 사회가 교육과 노동의 전면적인 변화를 감수할 준비가 되어 있는지 묻는 것이 순서다.
실제로 같은 유교문화권인 중국인들(+일본인들)도 한국 왔을때
제일 이해하기 힘든 문화 중 하나였던게 나이문화라고 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