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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종은 인현왕후가 죽은 지 1년도 안 됐는데도 새 왕비 간택을 서둘렀는데,
이는 연잉군을 중심으로 날로 세력이 팽창하고있는 숙빈 최씨와 노론을 견제하기 위해서라는 해석이 지배적이다.
실제로 인원왕후의 집안이 소론인 것을 보면 거의 확실한듯.
입궁하자마자 1년 만에 쓰러진 것을 시작으로 숙종이 사망할 때까지 종기, 피부병, 전염병 등, 이런 저런 병을 달고 살았다.
그런 탓에 조선왕조실록에 남아 있는 왕비 시절 인원왕후에 대한 기록은 "중궁(中宮)이 무슨 무슨 병을 앓다가 자리를 털고 일어나니 내가 몹시 기쁘다"라는 숙종의 상투적이고 의례적인 발언이 전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
숙종 사후 영빈 김씨와 함께 연잉군 코인을 탔다
인원왕후릉은 다른 왕릉과 다르게 뭔가 이질적인 형태로 되어있는데,
이것은 명릉이 애초에 숙종과 인현왕후의 능으로만 조성되었다가 이후 인원왕후가 본인도 명릉에 묻히고 싶다고 영조에게 요구해 인원왕후의 능이 우격다짐으로 조성되었기 때문이다.
온후(穩厚)하면서도 심지 강한 성격으로 보인다.
인원왕후는 어려서 일찍 궁에 들어와서 그런지 왕실의 법도를 엄하게 가르쳤다.
일례로 대천록(大遷錄)에 따르면 영조의 후궁인 숙의 문씨가 세자의 생모인 영빈 이씨에게 함부로 대들었다.
당시 궁중 예법상으로 세자의 어머니에게 함부로 해서는 안 될 일이었다.
인원왕후는 이를 알고 크게 노해서,
세자와 영빈 앞에서 숙의 문씨의 종아리를 회초리로 때렸다고 한다.
혜경궁 홍씨도 한중록에서 인원왕후를 "궁중 예법을 잘 지킨 사람"이라고 적었다.
혜경궁 홍씨와 영조의 옹주들이 같이 있을 때면, 가장 어른인 인원왕후가 나서서 장차 왕비가 될 혜경궁 홍씨를 늘 상석에 앉혔다고 한다. 당시 궁중 위계질서 중 하나로 윗사람 앞에 앉을 때는 아랫 사람이 정면으로 앉지 않고 옆으로 조금 돌아앉아야 한다는 곡좌(斛挫)라는 예법이 있었는데,
인원왕후는 이를 엄격히 지키도록 했다.
화유옹주가 좁은 방에서 의도치 않게 법도를 어기자 인원왕후가 엄하게 옹주를 지적하였다고 한다.
이러한 궁중의 예법을 통해서 왕실의 권위가 흔들리지 않게 되었다. 인원왕후 사후 권위가 흔들리기 시작하자 이는 세자의 악화되는 광증과 죽음으로 이어졌다.
한편으로는 의붓손자인 사도세자를 무척 아끼고 사랑했으며, 아버지에게 사랑받지 못했던 사도세자 역시 인원왕후를 잘 따랐다. 인원왕후가 매일 사도세자를 끼고 밥을 먹여서 애가 뚱뚱해졌다고 영조가 투덜거릴 정도였다. 만약 인원왕후가 좀 더 장수했더라면, 사도세자는 정신병이 심해져서 미치광이가 되지 않고 죽음을 면했을 수도 있었을지도 모른다. 실제로 사도세자는 믿고 따르던 할머니 인원왕후와 적모 정성왕후가 죽자 정신건강이 크게 나빠졌다.
사도세자는 생의 마지막 순간 인원왕후의 빈소인 통명전(通明殿)의 부속 건물에 머물렀다.
숙종은 인현왕후가 죽은 지 1년도 안 됐는데도 새 왕비 간택을 서둘렀는데,
이는 연잉군을 중심으로 날로 세력이 팽창하고있는 숙빈 최씨와 노론을 견제하기 위해서라는 해석이 지배적이다.
실제로 인원왕후의 집안이 소론인 것을 보면 거의 확실한듯.
입궁하자마자 1년 만에 쓰러진 것을 시작으로 숙종이 사망할 때까지 종기, 피부병, 전염병 등, 이런 저런 병을 달고 살았다.
그런 탓에 조선왕조실록에 남아 있는 왕비 시절 인원왕후에 대한 기록은 "중궁(中宮)이 무슨 무슨 병을 앓다가 자리를 털고 일어나니 내가 몹시 기쁘다"라는 숙종의 상투적이고 의례적인 발언이 전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
숙종 사후 영빈 김씨와 함께 연잉군 코인을 탔다
인원왕후릉은 다른 왕릉과 다르게 뭔가 이질적인 형태로 되어있는데,
이것은 명릉이 애초에 숙종과 인현왕후의 능으로만 조성되었다가 이후 인원왕후가 본인도 명릉에 묻히고 싶다고 영조에게 요구해 인원왕후의 능이 우격다짐으로 조성되었기 때문이다.
온후(穩厚)하면서도 심지 강한 성격으로 보인다.
인원왕후는 어려서 일찍 궁에 들어와서 그런지 왕실의 법도를 엄하게 가르쳤다.
일례로 대천록(大遷錄)에 따르면 영조의 후궁인 숙의 문씨가 세자의 생모인 영빈 이씨에게 함부로 대들었다.
당시 궁중 예법상으로 세자의 어머니에게 함부로 해서는 안 될 일이었다.
인원왕후는 이를 알고 크게 노해서,
세자와 영빈 앞에서 숙의 문씨의 종아리를 회초리로 때렸다고 한다.
혜경궁 홍씨도 한중록에서 인원왕후를 "궁중 예법을 잘 지킨 사람"이라고 적었다.
혜경궁 홍씨와 영조의 옹주들이 같이 있을 때면, 가장 어른인 인원왕후가 나서서 장차 왕비가 될 혜경궁 홍씨를 늘 상석에 앉혔다고 한다. 당시 궁중 위계질서 중 하나로 윗사람 앞에 앉을 때는 아랫 사람이 정면으로 앉지 않고 옆으로 조금 돌아앉아야 한다는 곡좌(斛挫)라는 예법이 있었는데,
인원왕후는 이를 엄격히 지키도록 했다.
화유옹주가 좁은 방에서 의도치 않게 법도를 어기자 인원왕후가 엄하게 옹주를 지적하였다고 한다.
이러한 궁중의 예법을 통해서 왕실의 권위가 흔들리지 않게 되었다. 인원왕후 사후 권위가 흔들리기 시작하자 이는 세자의 악화되는 광증과 죽음으로 이어졌다.
한편으로는 의붓손자인 사도세자를 무척 아끼고 사랑했으며, 아버지에게 사랑받지 못했던 사도세자 역시 인원왕후를 잘 따랐다. 인원왕후가 매일 사도세자를 끼고 밥을 먹여서 애가 뚱뚱해졌다고 영조가 투덜거릴 정도였다. 만약 인원왕후가 좀 더 장수했더라면, 사도세자는 정신병이 심해져서 미치광이가 되지 않고 죽음을 면했을 수도 있었을지도 모른다. 실제로 사도세자는 믿고 따르던 할머니 인원왕후와 적모 정성왕후가 죽자 정신건강이 크게 나빠졌다.
사도세자는 생의 마지막 순간 인원왕후의 빈소인 통명전(通明殿)의 부속 건물에 머물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