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이슈 안 망했어요, 우리 좋은 실패들을 해요.txt
23,757 185
2022.03.28 21:20
23,757 185
LyHHa
안 망했어요, 우리 좋은 실패들을 해요

살아가는 모두에게 인생은 아직 열린 결말이니까.

2019 . 12 . 12
TyLeH

아나운서 준비를 오래 한 후배가 있다. 대학에 입학하자마자 학교 방송국에 들어갔고, 아카데미를 다니고, 시사상식 스터디를 하고, 한국어능력시험을 보러 다녔다. 매일 리딩하는 모습을 영상으로 찍어서 올리는 스터디도 했다. 여러 번 고배를 마신 뒤 지금은 일반 회사 취업 준비로 전향한 후배는 오랜 준비를 끝내기로 마음먹었을 때, 한동안 정말 힘들었다고 한다.

왜 안 그랬을까. ‘그동안 허튼 데 시간을 너무 많이 쓴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덮쳐올 때마다 아무것도 결정된 것 없는 미래가 막막하게 여겨지곤 했다고. 나도 안다, 그 기분. 공들여 애써온 일을 그만둘 때, 가던 길을 되돌아 나오는 기분. 이 길로 오지 말았어야 하는데, 나에게만 막혀 있는 길인 걸 알았더라면 애초에 들어서지 않았을 텐데, 예전의 그 갈림길에서 다른 쪽을 선택했더라면 지금쯤 뭐가 돼도 되어 있을 텐데… 하는 생각들. 그럼 우린 괜한 시간을 산 걸까? 정말 그 시간을 허튼 데 쓰고 만 걸까?

후배는 지금, 누구보다 프레젠테이션을 잘하는 사람이 되어 있다. 등을 곧게 펴고 청중들과 차분하게 아이 컨택을 하면서 정확한 발음과 전달력 좋은 목소리로 자신이 준비한 이야기를 전하는 사람이. 한번은 인턴으로 일하고 있는 회사에서 프레젠테이션을 할 기회가 있었는데, 지켜보던 사람들 모두 발표장을 나오며 ‘타고난 것처럼 발표를 잘하더라’ 입을 모아 칭찬했다고 한다. 타고난 걸로 보이는 노력의 결과라니.

그 에피소드를 듣고 나 역시 조금 감명(!)을 받아버려서 답했다. 사람들 앞에서 프레젠테이션 하는 분야의 일을 하게 된다면 너는 누구보다 잘 해낼 거라고. 꼭 그게 아니어도 너의 이 역량이 빛을 발할 기회가 분명히 올 거라고.

eLezR

그렇게 치면 지난 몇 년은 후배가 걱정한 대로 ‘허튼’ 시간은 아니었던 셈이다. 비록 원하던 일을 이루진 못했지만, 그동안 쌓인 경험과 실력이 내 안에 남아서 삶의 어느 때든 적절하게 도움이 되어줄 테니까. 지인 중에는 방송사 PD를 준비하다가 시험에 계속 떨어지며 결국 다른 회사에 취직한 사례도 있는데, 지금은 신입 사원 연수 프로그램을 운영하면서 이전에 없던 센스 넘치는 교육 영상을 만들어 훌륭한 평가를 얻고 있다.

수많은 PD 지망생 중 돋보이는 1인이 되지는 못했지만, 그 회사에서 그는 누구도 하지 못한 일을 해내는 하나뿐인 인재로 인정받고 있다. 그런 인생을 단순히 실패 뒤에 찾은 ‘플랜 B’라고 함부로 요약해버릴 수 있는 걸까? 요약은 언제나 중요한 디테일을 지우고, 하나의 경험을 가장 호명하기 쉬운 낱말로 대체한다. ‘실패’라는.

OgWOM
물론 불합격은 쓰라리다. 나 역시 나를 뽑지 않다니 어디 잘되나 보자(잘 되더라), 언젠가 복수할 거야(복수할 기회도 없다), 혼자만 벼르는 회사들이 몇 군데 있는데 시간이 지난 뒤 돌아보면 탈락했다고 그 경험이 바로 ‘아무것도 아닌’ 게 되는 건 아니었다. 지원서를 쓰면서 현재 내 상황을 새로 고침 하듯 들여다보았고, 숱한 질문들 앞에 나는 어떤 대답을 가진 사람인가 고민해볼 수 있었다.

지원한 회사에 대해 알아보는 동안 업계의 분위기나 동향도 알게 되었다. 잘못 생각하고 있던 것, 어설프게 알던 것을 수정할 기회도 있었다. 덕분에 다른 데 가서 그것들을 써먹을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그때 알았다. 경험은 대답이 된다는 걸. 인터넷에서 찾아 외우는 모범답안이 아니라, 단단한 목소리로 말할 수 있는 나만의 대답이.

jgfJA

그러니까 실패가 결코 다 실패는 아니다. 우리가 소설 속 주인공이라면,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하고 끝나는 모든 이야기가 새드 엔딩은 아닌 것처럼. 그런 소설은 항상 주인공의 마음이 이야기의 시작과 달리 성장한 것을 보여주며 끝난다. 책 『소설가의 일』에는 이런 문장이 나온다.

jKgGB
사실 긴 인생에서 우리가 진짜 실패라 부를 만한 것은 별로 없는 게 아닐까? 무언가를 원했지만 이런저런 제약으로 이루지 못한 것뿐. 해봤는데 생각대로 안 된 것뿐. 그런 경험에 대해 어쩌면 이 사회가 너무 자주 ‘실패’라는 꼬리표를 붙이고 있는지도 모른다.

실패하면 망한다, 적당히 보장된 길로 가라, 그런 목소리들 때문에 두려워하다 보면 안전한 선택만을 하게 된다. 그리고 안전한 선택은, 대체로 마음을 속이는 선택이 되기 쉽다. 망할까봐 두려워 아무 선택도 하지 않거나, 생각대로 되지 않은 일을 스스로 ‘실패’라 부르는 대신, 계속 해보고 싶다. 우리를 앞으로 나아가게 해줄 좋은 실패, 실은 좋은 경험들을.

그럼에도 좌절에서 빠져나오기 힘들 땐 ‘열린 결말’이라 생각해보기로. 우리의 이야기는 아직 쓰여지는 중이고, 살아가는 모두에게 인생은 열린 결말인 셈이니까. 이 경험이 나를 어떤 길로 이끌어갈지, 어디까지 데려갈지 지켜보는 마음으로 걷고 싶다. 덜 낙담하면서 더 씩씩하게. 결말이 정해지지 않은 한 편의 이야기 속을.
[913호 – think]
Illustrator 강한
댓글 185
댓글 더 보기
새 댓글 확인하기

번호 카테고리 제목 날짜 조회
이벤트 공지 [사포렐X더쿠] 씻고 나서도 촉촉한 촉촉보습 여성청결제 체험 이벤트 104 07.23 35,409
공지 [🚨필독🚨] 로그인 보안 강화📢시크릿모드 사용자들 필독 (사용안함 옵션 추가)📢 07.13 151,995
공지 📢📢【매우중요】 비밀번호 변경 권장 (현재 팝업 알림중) 24.04.09 13,409,242
공지 공지가 길다면 한번씩 눌러서 읽어주시면 됩니다. 23.11.01 13,815,408
공지 ◤더쿠 이용 규칙◢ [스퀘어 정치글은 정치 카테고리에] 20.04.29 36,756,844
공지 정치 [스퀘어게시판 정치 카테고리 추가 및 정치 제외 기능 추가] 25.07.22 1,217,439
공지 정보 더쿠 모바일에서 유튜브 링크 올릴때 주의할 점 791 21.08.23 8,669,096
공지 정보 나는 더쿠에서 움짤을 한 번이라도 올려본 적이 있다 🙋‍♀️ 276 20.09.29 7,571,358
공지 팁/유용/추천 더쿠에 쉽게 동영상을 올려보자 ! 3640 20.05.17 8,794,852
공지 팁/유용/추천 슬기로운 더쿠생활 : 더쿠 이용팁 4023 20.04.30 8,673,205
공지 팁/유용/추천 ◤스퀘어 공지◢ [9. 스퀘어 저격판 사용 금지(무통보 차단임)] 1236 18.08.31 14,693,620
모든 공지 확인하기()
3124350 이슈 자체 목베개 장착한 푸바오.jpg 3 09:48 417
3124349 유머 누구인가? 지금 누가 기침소리를 내었어? 대사를 음악으로 만들어보기 09:47 53
3124348 기사/뉴스 [속보] 네이버 이해진 “엔비디아·브룩필드서 100억달러(14.6조) 투자” 8 09:46 708
3124347 기사/뉴스 李 대통령 만난 젠슨 황 "SK와 5000억弗 파트너십 발표" 9 09:42 560
3124346 유머 세븐틴 김민규 명찰 팔아요 2 09:40 885
3124345 이슈 대피상황인데 편안해보이는 댕댕이 1 09:38 591
3124344 이슈 현재 전국 날씨.jpg 25 09:35 3,271
3124343 기사/뉴스 [단독] 이서진x김광규, 비비 워터밤 공연 매니저된다…'비서진' 출격 7 09:34 1,093
3124342 유머 사진에서 그시절 냄새 확남 5 09:31 2,492
3124341 이슈 한 번도 안 가봤는데 왜 다들 페스티벌 가는지 알 것 같음 4 09:28 2,133
3124340 유머 출근을 하면 쾌감이 들어요 09:28 720
3124339 이슈 SBS 드라마 김부장 시청률 추이 6 09:25 2,419
3124338 이슈 페달 없이 작동하는 특이한 워킹자전거 7 09:24 1,158
3124337 이슈 레고로 원형을 만들 수 있다? 2 09:19 774
3124336 이슈 멜로눈 강아지 4 09:17 620
3124335 정보 20260724 하마다 가요제 - 성시경 / ハナミズキ (히토토 요) 14 09:13 1,044
3124334 이슈 핫게 피의게임 신승용 블로그 글 중 굳이 왜 썼나싶어 의아한 부분...(사무직?) 53 09:13 3,757
3124333 유머 휘파람소리에 집으로 돌아가는 산책냥이 13 09:13 1,376
3124332 유머 치킨먹을때 엄마가 진짜 퍽퍽살을 좋아한다,아니다로 투닥거리는 리센느 08년생 막내들 37 09:10 1,532
3124331 정보 저한테는 통넓은 여름바지가 있었는데, 어젯밤 귀갓길 이후 앞니가 없습니다. 28 09:08 4,94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