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theqoo.net/2358051759 0편 (첫편)
https://theqoo.net/2362070882 11편 (전편)
https://theqoo.net/2362616129 13편 (다음편)
주의사항
중간중간 이해를 돕기 위해 쓴 사진들은 실제 상황과는 조금 다를수도 있음. 조금씩 각색한 부분도 있음
인터뷰, 취재기사, 책, 특집다큐 등 여러 개를 참고해서 쓴 글
정보가 서로 다른 경우가 많기때문에 가장 직접적으로 연관된 인물의 발언이나 좀더 극적인ㅋㅋ 자료를 참고해서 씀
-1인자이자 이상주의자-
1960년대 중후반부터 한국 바둑의 패권을 잡은 김인
당시에는 몰랐지만 훗날 김인의 발목을 잡게될 약점이 있다고 어그로를 끌어놨는데
그건 뭐였을까?
https://img.theqoo.net/uoMFU
바로 그가 바둑 이상주의자였다는 것
김인은 승패를 떠나서 아름다운 승부를 추구했고
악착같이 상대를 물고 늘어지기보다는 깔끔한 대국을 좋아했지
이기는 방법을 추구하기보다 어떻게하면 깔끔하게 이길수 있을까를 갈구했어
이게 어느정도였는지 체감시켜주기위해 한 일화를 소개해주자면
한창 김인이 전성기를 구가하던 1969년 최고위전
디펜딩 챔피언 김인을 상대로 선배 강철민이 선전하며 마지막 5국까지 끌고 온 상황
바둑이 초중반에 접어들 80수에서 김인이 실수를 범하며 악수를 뒀어
악수를 두긴 했지만 그래도 형세가 엄청 기울었다고 보기는 힘든 상황이었어
그랬는데...
"제가 졌습니다."
https://img.theqoo.net/JWbft
".....? 어어 무슨 소리야 이 사람. 얼른 두지 않고."
"아니에요 제가 졌습니다. 좋은 대국이었습니다."
타이틀이 걸린, 상금이 걸린 마지막 대국에서
자신이 추구하는 바둑의 길이 막히고, 본인만의 돌맛(바둑 둘 맛이라고 보면 됨)이 떨어지자 쿨하게 돌을 던져버린 김인
김인은 반상 위에 자신만의 철학을 그리는걸 좋아했던 이상주의자였던거야
이상주의를 추구하면서 승리를 따내면 되는거 아니냐고 반문할 수 있지
맞아
맞긴 한데
본인에게 대적할만한 상대가 한국에 없었다는 것이 이상주의와 겹쳐져 김인한테 다소 안 좋은 영향을 끼쳤어
https://img.theqoo.net/nUiyY
예술적 감수성, 이상주의가 강했던 김인이 1인자를 차지하고 나니 목표의식과 경쟁의식이 빠르게 식어버린거지
그는 적수가 없는 헛헛함과 고독함을 채우기 위해 자기관리보다는 매일 술을 마셨어
https://img.theqoo.net/nCLDQ
지금과 달리 당시에는 바둑 기사들 중 애주가가 꽤 있긴 했지만 김인은 유독 많이 마셨지
물론
김인의 전성기에는 다른 한국 기사들과 격차가 압도적으로 많이 났기때문에 사실 별 문제는 아니었어
어떤 바둑을 추구하던 김인이 이겼으니까!ㅋㅋㅋ
그리고 저렇게 말해놓긴 했지만 그렇다고 김인의 시대가 엄청 짧았던 것도 아니었어
저런 성향은 그때 김인을 좋아했던 팬들이 다소 아쉬워하는 부분이기도 하고
반대로 이상주의자, 한국 바둑의 신사 김인만의 독특한 매력이기도 해
저런 부분도 짙은 낭만으로 남게 됐으니까
-TMI, TMI 2-
이 부분은 말그대로 TMI니까 스킵해도 별 상관 없어ㅋㅋ
TMI 4
김인이 바둑 매너가 좋아서 바둑계의 신사로 불렸다는데 그럼 한국 현대바둑의 개척자 조남철은 어땠을까?
반상 위에서 과묵하고 포커페이스를 유지하는 김인과 달리 조남철은 바둑을 두면서 비교적 독특한 습관이 많았어
조남철은 대국 중에 "졌네.", "망했네."라고 중얼거리며 엄살을 자주 부렸고 어쩔때는 "에라 모르겠다!" 외치며 돌을 쾅 내려놓기도 했어ㅋㅋㅋ
https://img.theqoo.net/vxIIs
가끔은 갈!!!이라고 외치며 바둑돌을 내려놓기도 했는데 바둑돌이 자주 부서졌다고...ㅋㅋㅋㅋㅋ
TMI 5
국수전의 상금은 어땠을까? 처음에는 규모가 작았다고 해. 5000원으로 알고 있어
당시에는 타이틀전 우승하고나면 동료 기사와 신문사 기자들에게 거하게 술을 쏘는게 관습이었는데
https://img.theqoo.net/lEAjM
국수전 우승상금이 이 회식비용으로 거의 다 나갔다고;;
그래서 조남철이 총대를 메고 동아일보, 기아자동차와 협상했고
8~9회에는 10배 올려줘서 5만원 / 10회에는 10만원으로 상금을 올려줬대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10만원으로 올라간 10회는 김인이 우승해서 조남철이 그 돈을 받지는 못했어
물론 조남철은 "나는 그전에 누릴만큼 누려서 상금은 괜찮다."며 쿨하게 넘겼다고
-김인의 시대. 누가, 어떻게 반기를 드는가?-
60년대 후반 한국 바둑계를 완벽하게 제패한 김인
https://gfycat.com/CreativeWideeyedCougar
70년대에 접어들어서도 강력한 위용을 보이며 자신의 성에 접근하는 동료 기사들을 모두 패퇴시켜버렸어
김인과 동세대에서 기재로 손꼽혔던 윤기현, 강철민, 김재구가 도전했으나
일본에서 귀국한 후의 김인과는 꽤나 격차가 벌어져있었어
김인의 시대에 종종 도전하며 공방전을 펼쳤던 도전자에는 이전세대 최강자였던 조남철도 있었어
조남철은 하나둘 김인에게 타이틀을 뺏긴 후 바둑 연구에 몰두했어
https://img.theqoo.net/UjNfC
조남철의 나이가 40대 중후반. 지금이라면 말도 안되는 바둑 노장이지만 그때는 아직 제2의 전성기를 불태울수 있는 나이였거든
바둑 보급 활동은 이제 후배 관계자들에게 위임하고 김인의 바둑에 대항할 수를 연구하고 도전을 거듭했는데
김인의 기력은 절정에 달해있었고, 조남철의 변화 유도에도 끄떡없이 문을 걸어잠그고 차분히 응전했어
한국 바둑의 1인자다운 기력에 조남철도 결국 맥을 못추고 패배했지
그럼에도 조남철은 마지막 불꽃을 불태우며 1971년 4번의 타이틀 도전권을 따내며 김인과 정면충돌했어
왕위전 0-3, 패왕전 1-3, 국수전 2-3. 3번 연속 타이틀전에서 패하긴 했지만 김인의 절대아성에 조금씩 따라가는 모습을 보였고
https://gfycat.com/UnfortunateHilariousAbalone
끝끝내 마지막 타이틀전이었던 명인전에서 3-2로 승리를 거두며 유종의 미를 거둬
이게 조남철의 마지막 공식 타이틀 획득이야
이렇듯 조남철한테 일격을 먹긴 했지만 단 1순간이었을뿐
1인자의 자리에 오른 김인은 70년대 초반까지 동료 기사들을 찍어누르며 타이틀을 방어해냈어
왕위전 7연패, 국수전 6연패, 패왕전 7연패
김인은 조남철의 뒤를 이어 새로운 한국바둑의 얼굴이 되었고, 이 시기 한국바둑은 폭발적인 인기를 누리게 시작해
https://img.theqoo.net/uqFNK
(68년 김인 vs 조남철 13회 국수전 야외해설)
특히 전세대 최강 조남철과 현세대 최강 김인의 격돌은 엄청난 화제성을 불러모았지
인기와 화제성이 높아졌으니
김인의 독주를 도대체 누가, 도대체 어떻게 저지할지에 대한 토론도 이뤄졌어
그런 논쟁이 벌어져도 김인의 바둑을 파훼하는 해답은 없었지만 그래도 김인의 바둑을 따라잡기 위해 노력했지
특히 김인과 동세대 중 가장 기대받고 있던 윤기현이 악전고투했어
노력과 고민 끝에 1968년, 윤기현은 후배들이 있는 일본으로 유학을 가기로 결정했어
아 내가 말을 안하고 넘어갔지만 62년에 김인이 일본 유학을 간 후
62~63년에 연달아서 김인보다 훨씬 어린 한국 바둑 유망주들이 일본으로 바둑을 배우러 넘어갔었거든!
https://gfycat.com/BaggyWaryBellfrog
말을 안하고 넘어갔으니 김인의 시대인 1960년대 중후반~70년대 초반에서
1960년대 초반으로 시점을 돌려보자
1963년 10월
한국에서 온 바둑 사절단과 아이가 기타니 도장으로 가기 전 세고에 켄사쿠의 집에 인사하고자 들른 시기
세고에는 기타니보다도 20살 위인 일본 바둑계의 대부였고, 오청원의 스승이기도 했어
(오청원: 현대바둑 기사 중 위대한 기사 투톱으로 꼽히는 천재)
"난 오청원 말고 천재를 본 적이 없어. 천재는 그런 애를 두고 하는 말이지."
"하하...그렇죠. 이 아이도 한국에서는 신동 소리 들었는데..."
"아무한테나 그런 호칭을 붙여주니까 아이들이 한껏 기만 살은거야."
"아...하하...네...맞습니다."
한국나이로 74세의 노령이었던 세고에는 사절단을 보고 예의상 인사를 하고 보내려했어
애초에 사절단도 그냥 인사차 들른거였고
하지만 아이를 보고 변덕이 생겼는지 세고에는 심심풀이용으로 지도대국을 둬보자고 했어
"제법 재미난 행마를 가지고 있구나."
"......? 나 일본어 못하는데..."
평소에 대국을 잘하지도 않던 양반이 무슨 일인지 지도대국을 연달아 2판이나 뒀지
https://img.theqoo.net/wkAqI
아이는 일본어를 할 줄 몰라서 세고에가 중얼거릴때마다 갸우뚱했어
대국이 끝나고 세고에는 모호한 한숨을 내뱉으며 옆에 있는 한국 바둑 사절단에게 중얼거렸어
"내가 앞으로 얼마나 살까?"
"선생님 오래오래 사셔야죠. 20년은 거뜬하실겁니다."
"그래. 그래...오늘은 2층방을 내줘야겠네."
"아 그건 감사하지만 저희가 오늘 기타니 선생 댁에도 가야하는..."
"아니 2층방은 자네들 것이 아냐."
"네?"
https://img.theqoo.net/LUGQL
“음... 내가 늙고 몸이 불편해 언제 죽을지 모르나 이 아이는 오늘부터 내가 죽는 날까지 데리고 있겠네.”
조훈현
세고에 9단 문하에 내제자로 입문
자 이제부터는
한국바둑사의 3번째 주인공
조훈현을 만나보도록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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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간중간 이해를 돕기 위해 쓴 사진들은 실제 상황과는 조금 다를수도 있음. 조금씩 각색한 부분도 있음
인터뷰, 취재기사, 책, 특집다큐 등 여러 개를 참고해서 쓴 글
정보가 서로 다른 경우가 많기때문에 가장 직접적으로 연관된 인물의 발언이나 좀더 극적인ㅋㅋ 자료를 참고해서 씀
-1인자이자 이상주의자-
1960년대 중후반부터 한국 바둑의 패권을 잡은 김인
당시에는 몰랐지만 훗날 김인의 발목을 잡게될 약점이 있다고 어그로를 끌어놨는데
그건 뭐였을까?
https://img.theqoo.net/uoMFU
바로 그가 바둑 이상주의자였다는 것
김인은 승패를 떠나서 아름다운 승부를 추구했고
악착같이 상대를 물고 늘어지기보다는 깔끔한 대국을 좋아했지
이기는 방법을 추구하기보다 어떻게하면 깔끔하게 이길수 있을까를 갈구했어
이게 어느정도였는지 체감시켜주기위해 한 일화를 소개해주자면
한창 김인이 전성기를 구가하던 1969년 최고위전
디펜딩 챔피언 김인을 상대로 선배 강철민이 선전하며 마지막 5국까지 끌고 온 상황
바둑이 초중반에 접어들 80수에서 김인이 실수를 범하며 악수를 뒀어
악수를 두긴 했지만 그래도 형세가 엄청 기울었다고 보기는 힘든 상황이었어
그랬는데...
"제가 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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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어 무슨 소리야 이 사람. 얼른 두지 않고."
"아니에요 제가 졌습니다. 좋은 대국이었습니다."
타이틀이 걸린, 상금이 걸린 마지막 대국에서
자신이 추구하는 바둑의 길이 막히고, 본인만의 돌맛(바둑 둘 맛이라고 보면 됨)이 떨어지자 쿨하게 돌을 던져버린 김인
김인은 반상 위에 자신만의 철학을 그리는걸 좋아했던 이상주의자였던거야
이상주의를 추구하면서 승리를 따내면 되는거 아니냐고 반문할 수 있지
맞아
맞긴 한데
본인에게 대적할만한 상대가 한국에 없었다는 것이 이상주의와 겹쳐져 김인한테 다소 안 좋은 영향을 끼쳤어
https://img.theqoo.net/nUiyY
예술적 감수성, 이상주의가 강했던 김인이 1인자를 차지하고 나니 목표의식과 경쟁의식이 빠르게 식어버린거지
그는 적수가 없는 헛헛함과 고독함을 채우기 위해 자기관리보다는 매일 술을 마셨어
https://img.theqoo.net/nCLDQ
지금과 달리 당시에는 바둑 기사들 중 애주가가 꽤 있긴 했지만 김인은 유독 많이 마셨지
물론
김인의 전성기에는 다른 한국 기사들과 격차가 압도적으로 많이 났기때문에 사실 별 문제는 아니었어
어떤 바둑을 추구하던 김인이 이겼으니까!ㅋㅋㅋ
그리고 저렇게 말해놓긴 했지만 그렇다고 김인의 시대가 엄청 짧았던 것도 아니었어
저런 성향은 그때 김인을 좋아했던 팬들이 다소 아쉬워하는 부분이기도 하고
반대로 이상주의자, 한국 바둑의 신사 김인만의 독특한 매력이기도 해
저런 부분도 짙은 낭만으로 남게 됐으니까
-TMI, TMI 2-
이 부분은 말그대로 TMI니까 스킵해도 별 상관 없어ㅋㅋ
TMI 4
김인이 바둑 매너가 좋아서 바둑계의 신사로 불렸다는데 그럼 한국 현대바둑의 개척자 조남철은 어땠을까?
반상 위에서 과묵하고 포커페이스를 유지하는 김인과 달리 조남철은 바둑을 두면서 비교적 독특한 습관이 많았어
조남철은 대국 중에 "졌네.", "망했네."라고 중얼거리며 엄살을 자주 부렸고 어쩔때는 "에라 모르겠다!" 외치며 돌을 쾅 내려놓기도 했어ㅋㅋㅋ
https://img.theqoo.net/vxIIs
가끔은 갈!!!이라고 외치며 바둑돌을 내려놓기도 했는데 바둑돌이 자주 부서졌다고...ㅋㅋㅋㅋㅋ
TMI 5
국수전의 상금은 어땠을까? 처음에는 규모가 작았다고 해. 5000원으로 알고 있어
당시에는 타이틀전 우승하고나면 동료 기사와 신문사 기자들에게 거하게 술을 쏘는게 관습이었는데
https://img.theqoo.net/lEAjM
국수전 우승상금이 이 회식비용으로 거의 다 나갔다고;;
그래서 조남철이 총대를 메고 동아일보, 기아자동차와 협상했고
8~9회에는 10배 올려줘서 5만원 / 10회에는 10만원으로 상금을 올려줬대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10만원으로 올라간 10회는 김인이 우승해서 조남철이 그 돈을 받지는 못했어
물론 조남철은 "나는 그전에 누릴만큼 누려서 상금은 괜찮다."며 쿨하게 넘겼다고
-김인의 시대. 누가, 어떻게 반기를 드는가?-
60년대 후반 한국 바둑계를 완벽하게 제패한 김인
https://gfycat.com/CreativeWideeyedCougar
70년대에 접어들어서도 강력한 위용을 보이며 자신의 성에 접근하는 동료 기사들을 모두 패퇴시켜버렸어
김인과 동세대에서 기재로 손꼽혔던 윤기현, 강철민, 김재구가 도전했으나
일본에서 귀국한 후의 김인과는 꽤나 격차가 벌어져있었어
김인의 시대에 종종 도전하며 공방전을 펼쳤던 도전자에는 이전세대 최강자였던 조남철도 있었어
조남철은 하나둘 김인에게 타이틀을 뺏긴 후 바둑 연구에 몰두했어
https://img.theqoo.net/UjNfC
조남철의 나이가 40대 중후반. 지금이라면 말도 안되는 바둑 노장이지만 그때는 아직 제2의 전성기를 불태울수 있는 나이였거든
바둑 보급 활동은 이제 후배 관계자들에게 위임하고 김인의 바둑에 대항할 수를 연구하고 도전을 거듭했는데
김인의 기력은 절정에 달해있었고, 조남철의 변화 유도에도 끄떡없이 문을 걸어잠그고 차분히 응전했어
한국 바둑의 1인자다운 기력에 조남철도 결국 맥을 못추고 패배했지
그럼에도 조남철은 마지막 불꽃을 불태우며 1971년 4번의 타이틀 도전권을 따내며 김인과 정면충돌했어
왕위전 0-3, 패왕전 1-3, 국수전 2-3. 3번 연속 타이틀전에서 패하긴 했지만 김인의 절대아성에 조금씩 따라가는 모습을 보였고
https://gfycat.com/UnfortunateHilariousAbalone
끝끝내 마지막 타이틀전이었던 명인전에서 3-2로 승리를 거두며 유종의 미를 거둬
이게 조남철의 마지막 공식 타이틀 획득이야
이렇듯 조남철한테 일격을 먹긴 했지만 단 1순간이었을뿐
1인자의 자리에 오른 김인은 70년대 초반까지 동료 기사들을 찍어누르며 타이틀을 방어해냈어
왕위전 7연패, 국수전 6연패, 패왕전 7연패
김인은 조남철의 뒤를 이어 새로운 한국바둑의 얼굴이 되었고, 이 시기 한국바둑은 폭발적인 인기를 누리게 시작해
https://img.theqoo.net/uqFNK
(68년 김인 vs 조남철 13회 국수전 야외해설)
특히 전세대 최강 조남철과 현세대 최강 김인의 격돌은 엄청난 화제성을 불러모았지
인기와 화제성이 높아졌으니
김인의 독주를 도대체 누가, 도대체 어떻게 저지할지에 대한 토론도 이뤄졌어
그런 논쟁이 벌어져도 김인의 바둑을 파훼하는 해답은 없었지만 그래도 김인의 바둑을 따라잡기 위해 노력했지
특히 김인과 동세대 중 가장 기대받고 있던 윤기현이 악전고투했어
노력과 고민 끝에 1968년, 윤기현은 후배들이 있는 일본으로 유학을 가기로 결정했어
아 내가 말을 안하고 넘어갔지만 62년에 김인이 일본 유학을 간 후
62~63년에 연달아서 김인보다 훨씬 어린 한국 바둑 유망주들이 일본으로 바둑을 배우러 넘어갔었거든!
https://gfycat.com/BaggyWaryBellfrog
말을 안하고 넘어갔으니 김인의 시대인 1960년대 중후반~70년대 초반에서
1960년대 초반으로 시점을 돌려보자
1963년 10월
한국에서 온 바둑 사절단과 아이가 기타니 도장으로 가기 전 세고에 켄사쿠의 집에 인사하고자 들른 시기
세고에는 기타니보다도 20살 위인 일본 바둑계의 대부였고, 오청원의 스승이기도 했어
(오청원: 현대바둑 기사 중 위대한 기사 투톱으로 꼽히는 천재)
"난 오청원 말고 천재를 본 적이 없어. 천재는 그런 애를 두고 하는 말이지."
"하하...그렇죠. 이 아이도 한국에서는 신동 소리 들었는데..."
"아무한테나 그런 호칭을 붙여주니까 아이들이 한껏 기만 살은거야."
"아...하하...네...맞습니다."
한국나이로 74세의 노령이었던 세고에는 사절단을 보고 예의상 인사를 하고 보내려했어
애초에 사절단도 그냥 인사차 들른거였고
하지만 아이를 보고 변덕이 생겼는지 세고에는 심심풀이용으로 지도대국을 둬보자고 했어
"제법 재미난 행마를 가지고 있구나."
"......? 나 일본어 못하는데..."
평소에 대국을 잘하지도 않던 양반이 무슨 일인지 지도대국을 연달아 2판이나 뒀지
https://img.theqoo.net/wkAqI
아이는 일본어를 할 줄 몰라서 세고에가 중얼거릴때마다 갸우뚱했어
대국이 끝나고 세고에는 모호한 한숨을 내뱉으며 옆에 있는 한국 바둑 사절단에게 중얼거렸어
"내가 앞으로 얼마나 살까?"
"선생님 오래오래 사셔야죠. 20년은 거뜬하실겁니다."
"그래. 그래...오늘은 2층방을 내줘야겠네."
"아 그건 감사하지만 저희가 오늘 기타니 선생 댁에도 가야하는..."
"아니 2층방은 자네들 것이 아냐."
"네?"
https://img.theqoo.net/LUGQL
“음... 내가 늙고 몸이 불편해 언제 죽을지 모르나 이 아이는 오늘부터 내가 죽는 날까지 데리고 있겠네.”
조훈현
세고에 9단 문하에 내제자로 입문
자 이제부터는
한국바둑사의 3번째 주인공
조훈현을 만나보도록 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