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납토성은 현재로서는 백제의 수도 위례성으로 보고 있지만,
1,500년 가량이나 그냥 역사에서 완전히 잊혀져 있었고 무관심했던 성이었다.
이런 풍납토성의 진가가 세상에 드러난건 우연한 계기였다.
일제 시대였던 1925년, "을축년 대홍수" 가 발생했다.
기록에 남은 이 엄청난 홍수로 갑자기 풍납토성 자리에서 온갖 백제 유물이 튀어나오기 시작한 것이다.
이때 일제 학자인 아유카이 후사노신은 "이거 위례성 아냐?" 고 주장하기도 했으나
해방 이후 이병도가 "이건 백제가 고구려를 막기 위해 지은 사성(蛇城)이다." 라고 하여
흔한 방위용 성 하나로 치부되서 중요성이 잊혀지게 되었다.
오히려 그 옆에 있는 '몽촌토성'이 위례성이라는게 당시 학계의 대세였기 때문에
자연히 풍납토성은 아오안이 되었고,
제대로 뭔가 발굴 해보기도 전에 그 자리에는 개발이 진행되어 건물들과 아파트가 올라갔다.
반면 몽촌토성은 백제 위례성으로 알려져 엄청난 주목을 받으며 난개발을 그나마 좀 피해가면서
비교적 활발하게 발굴 작업이 진행되며 여러 유물을 발굴하는 성과가 나왔다.
그런데 문제는 파도 파도 결정적인 한방이 나오질 않았다.
그런데 연구자 중에 이형구 교수는 "백제 왕성은 풍납토성이다" 이라고 오래전부터 주장해왔다.
그러다가 97년 겨울, 이형구 교수는 현대리버빌 아파트 공사현장으로 잠입했고
여기서 조사를 해본 결과 몽촌토성에서는 그닥 안나오던 온갖 백제 유물들이 미친듯이 나오기 시작했다.
풍납토성의 동쪽 성벽 두 군데를 10m 간격으로 골라 성벽을 잘라보니
맨 아래쪽 폭이 무려 40m, 높이만 9m에 달했다.
풍납토성이 백제 왕성이라는것에 대해 결정적인 전기를 맞이한 셈이었다.
이렇게 풍납토성이 재조명 받고 난 뒤에도 한동안은 학설이 대립했다.
그러다가 2006년, 풍납토성의 중심부를 가로지르는 도로가 발견되면서
풍납토성이 백제의 수도 위례성이라는 사실은 이제 학계에선 별다른 반론이 없는 상황에 이르렀다.
현재는 풍납토성이 위례성이거나,
풍납토성과 몽촌토성이 모두 위례성인데
평상시에는 풍납토성에 있다가 전쟁시에 몽촌토성으로 이동하는 형태 아닌가로 추측하고 있다.
어떤 식으로 보건 중요한 main 왕성은 풍납토성이라는것.
1997년까지만 해도 풍납토성이 아니라 몽촌토성이 백제 위례성으로 알려졌기 때문에
풍납토성은 몽촌토성처럼 문화재 보호를 받지 못하고
그 위에 풍납동 주민들의 삶의 터전이 그대로 자리잡은 상태
풍납토성의 존재를 세상에 밝힌 이형구 교수가
풍납동 주민들에게 맞아죽을 뻔 했던것도 결국 재산권 문제 때문.
국가에서는 개인 소유 토지를 조금씩 매입해가는 방법으로 장기적인 발굴을 계획하고 있다고 함
아파트 공사현장에 몰래 숨어들어서 파낸 유물만도 어마어마하게 나오는데
진짜 각잡고 뒤집어보면 우리나라 고대사와 백제 역사 연구에 상당한 진전이 있을것으로 보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