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란과 미국이 끊임없이 부딪히면서 중동은 물론 세계의 정세를 불안하게 한다. 중동에 에너지를 의존해야 하는 한국으로선 조마조마할 수밖에 없다. 두 나라는 전쟁을 치른 적도 없는데 어떻게 서로 가장 증오하는 나라가 되었을까. 여기에는 오랜 원한과 증오의 축적이 자리 잡고 있다.
[채인택의 글로벌 줌업]
이란·미국, 왜 이토록 미워하는가
53년 CIA 조종 이란 쿠데타 발단
석유국유화 모사데그 총리 축출
권력 강화한 샤, 국민 억압 독재
급속 서구화 이슬람·보수 적으로
친이스라엘 정책에 국민 등 돌려
이란, 대사관 인질극으로 미 모욕
서로 대리인 내세워 계속 괴롭혀
증오외교, 내부정치 도움 돼 문제
미움·한풀이 악순환 고리 끊어야
2015년 이란 수도 테헤란 시내에서 시위대가 미국과 이스라엘, 그리고 사우디아라비아의 국기를 불태우고 있다. 국기 훼손은 모욕을 부르고, 모욕은 증오와 원한으로 이어지게 마련이다. [위키피디아]
■민족주의자 이란 총리, CIA가 53년 몰아내
제2차 세계대전 뒤 현대사에서 이란인이 미국에 큰 반발을 갖기 시작한 근원은 1953년 모하마드 모사데그 총리(1882~1967년, 재임 1952~1953년) 축출 사건이다. 민족주의자였던 모사데크 총리는 외국 기업이 지배하던 이란 석유산업을 국유화하려고 시도했다. 1913년 설립된 앵글로페르시아 석유회사(APOC)를 이란 정부가 접수해 그 이익을 모두 갖겠다는 말이다.
그러자 당시 영국과 ‘특별한 관계’였던 미국의 중앙정보국(CIA)이 영국 해외정보기관인 비밀정보국(MI6)과 함께 이란의 모하마드 레자 샤와 군부에 공작해 쿠데타를 일으키게 했다. 모사데그는 축출돼 해외로 추방됐으며 모하마드 레자 샤는 군주로서 권력을 강화했다. 영국은 이란에서 석유 이권을 계속 유지하게 됐다. 합헌적이고 합법적으로 선출된 정치 지도자이자 행정 최고 책임자인 총리가 외국 정보기관이 사주한 군사 쿠데타로 쫓겨난 사건은 이란 국민에게 두고두고 상처로 남을 수밖에 없었다. 이란 국민은 이를 외국의 부당한 개입으로 국내 정치와 정책이 벽에 부딪힌 사건으로 기억한다.
1953년 쿠데타로 쫓겨난 이란의 모하마드 모사데그 총리.
■군주가 주도한 서구화 ‘백색혁명’에 국민 불만
이를 통해 권한을 확대한 모하마드 샤는 1963년 ‘백색 혁명’이라는 이름으로 더욱 급속한 서구화·근대화 정책을 시작했다. 우선 석유 대신 숲과 초지, 그리고 수자원을 국유화하고 대신 산업 분야의 국유기업은 민영화했다. 지주로부터 토지를 사들여 농민들에게 시세보다 30% 싸게 분배하는 토지개혁도 벌였다. 모든 공장과 기업은 이익의 30%를 직원들에게 상여금으로 주도록 의무화했다. 물가를 안정시킨다며 가격을 비상식적으로 올린 공장주와 체인점 업주를 적발해 무거운 벌금을 물리고 감옥에 보내는 한편, 조업권이나 영업권을 몰수했다. 특정 상품은 국가가 정하는 가격에 소비자에게 팔게 했다. 젊은이들에게 군 복무 대신 농촌 등에서 문맹자에게 문자를 가르치는 문맹퇴치단에서 근무하게 했으며, 교육을 무상화했다. 4500개 의료그룹을 양성해 무의촌에서 근무하도록 했으며, 주택 건설단도 조직해 전국에서 주택공급을 확대했다. 하지만 이러한 급진적인 정책은 지주와 기업인, 상인들을 반정부로 돌아서게 했다. 여성 참정권을 확대하는 등 사회 개혁도 추진했다. 무슬림 여성에게 강요하던 차도르(얼굴과 손발을 제외한 온몸을 가리는 복장)와 머리에 쓰는 히잡은 벗도록 했다. 이는 시아파 성직자는 물론 전통을 중시하는 농촌 주민들을 군주의 적으로 돌리는 결과를 가져왔다.
■국민감정 무시한 친이스라엘 정책 화근
모하마드 레자 샤는 자신을 샤에 앉힌 영국에는 물론 1953년 쿠데타로 자신의 권한을 강화시켜준 미국을 철저히 추종했다. 그는 외교에서 철저한 친미·반공 노선을 걸으면서 서구화를 가속화했다. 미국은 냉전시기에 중동에서 서방의 이익을 지켜줄 대리인으로 사우디아라비아와 이란을 지목했다. 두 나라 모두 군주제 국가로 강력한 군대와 경찰, 그리고 외세가 필요한 상황이었다. 이란은 중동을 대표하는 친미국가로서 핵비확산조약(NPT)에 가입하고 그 대가로 미국서 핵연료와 기술을 도입해 원자력의 평화적 연구를 위한 기반을 조성했다. 이는 나중에 역설적이게도 이란 핵개발의 단초가 된다.
이란의 무하마드 레자 샤 정권은 반이스라엘로 일관했던 사우디아라비아의 사우드 왕가와 달리 친이스라엘 정책도 추구했다. 군주제 이란은 터키에 이어 무슬림 국가로는 둘째로 이스라엘과 대사급 관계를 수립하고 돈독한 관계를 유지했다. 1967년 6일전쟁(제3차 중동전쟁)에서 이집트·시리아·요르단·레바논 등 아랍권이 24만의 병력, 2500여 대의 전차, 950여 기의 항공기로 병력 10만, 전차 800여 대, 항공기 300여 대의 이스라엘을 공격했다가 6일 만에 궤멸적인 타격을 입은 전쟁이다. 이 전쟁으로 이스라엘은 요르단으로부터 이슬람 성지인 알아크사 모스크가 포함된 동예루살렘과 요르단강 서안, 이집트로부터 시나이 반도와 가자지구, 시리아로부터 골란고원을 빼앗았다. 아랍어를 쓰는 아랍권은 물론 대부분의 이슬람권은 일제히 분노와 허탈감에 빠졌지만 이란은 이 전쟁 뒤에도 이스라엘과 돈독한 관계를 유지했다. 6일전쟁 뒤 이스라엘에 석유를 공급했으며, 파이프라인 공동건설과 미사일 공동개발도 추진했다. 이는 대부분 무슬림(이슬람 신자)인 이란 국민의 감정과는 맞지 않는 것이었다.
■비밀경찰 사바크로 불만 누르다 정권 무너져
게다가 모하마드 레자 샤 정권은 독재와 부패 속 폭력적인 억압정치 계속하면서 국민의 분노를 불렀다. 특히 비밀경찰인 사바크(국가정보안보기구)를 앞세워 국민을 감시하고 억압했다. 특히 백색혁명에 불만을 토로하는 사람, 공산당 추종자 등을 혹독하게 탄압했다. 공식 통계로도 정치범이 3200명을 넘었다. 그의 급속한 근대화와 세속화 정책은 시아파 성직자에 이어 지주, 기업인, 지식인의 반발을 샀으며 노동자까지 비판에 가세했다. 그런 상황에서 왕족과 지배계층의 부정부패는 그칠 줄을 몰랐다. 민심은 군주를 완전히 떠났다. 폭력을 앞세운 억압으로 불만을 잠재울 수 없었다.
■이슬람혁명 뒤 미국 대사관 인질극
이런 반발이 쌓여 1978~1979년 대규모 시위가 발생했으며, 민주화 세력과 종교 세력이 합작해 모하마드 레자 샤를 축출하고 이슬람혁명을 이뤘다. 혁명 이후 이스라엘과는 즉시 단교했으며 모든 관계를 중단했다. 이란은 이스라엘의 가장 강력한 적대국가가 됐으며, 심지어 국가지도자들이 홀로코스트를 부인하는 발언을 수시로 하고 있다. 혁명 뒤 이란 여성은 차도르를 입든지 히잡을 쓰도록 강요받았다. 종교 경찰이 창설돼 조금이라도 몸매가 드러나는 옷을 입은 여성은 경찰서로 연행해 아버지나 남자형제, 남편이 데리러 와야 풀어줬다. 혁명이 진보가 아니라 보수화를 부른 경우다.
이런 상황에서 1979년 11월 이란 대학생들이 테헤란의 미국 대사관에 진입해 직원들을 인질로 잡았다. 미국 대사관과 이란 외교부에서 미국인 66인 명이 444일간 억류됐다가 풀려났다. 지미 카터 대통령(95·1977~1981년 재임)은 구출 병력을 보냈으나 사막에서 헬기가 추락해 인명피해를 나면서 본격적인 작전에 들어가지도 못했다. 미국과 이란의 국교는 1980년 4월 공식 단절됐다.
■외교 참사로 미국인 자부심에 큰 상처
이란 이슬람혁명과 인질극의 영향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1980년 11월 4일 치른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카터는 재임에 실패했다. 미국인의 자부심은 큰 상처를 입었다. 외교사절이 억류됐는데도 이란에 대해 군사력으로도, 외교력으로도 어떻게 할 수 없는 상황이 벌어진 것이다. 이란 국민이 모하마드 레자 샤의 전제정치와 억압이 미국의 도움으로 이뤄졌다고 여겨 미국을 뱀 보듯 한 때문에 이런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외교 참사가 벌어진 셈이다. 전쟁을 치렀음에도 미국과 화해해 발전의 기회를 얻은 중국이나 베트남과 대조적이다.
인질극이 진행되는 동안 미국은 두 차례의 성탄절을 맞았는데, 이 사건으로 성탄 전통에도 변화가 생겼다. 미국은 1923년부터 백악관에 성탄 축하용 국가 트리를 점등하는 전통이 있는데 테헤란 대사관이 점거된 1979년에는 트리를 설치하되 기도용 별 하나를 남기고 소등했다. 1980년 성탄절엔 그 날까지 417일 억류를 기억하기 위해 417초간 트리 전체에 불을 밝힌 뒤 다시 전등을 껐다. 인질들은 1981년 로널드 레이건(1911~2003년, 재임 1981~1989년)의 취임일인 1월 20일에 모두 석방됐다. 이란의 이슬람 혁명과 미국 대사관 인질극이 미국 국내정치에 톡톡히 영향을 끼친 셈이다.
■핵합의 하자마자 미국 일각서 반대 나와
이런 탓인지 미국인은 이란에 대한 앙금이 가시지 않고 있다. 2015년 버락 오바마 대통령이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상임이사국 및 독일과 이란 핵합의를 이뤘지만 미국에선 내용과 상관없이 이란과 협상을 하거나 합의를 하는 데 거부감을 느끼는 사람이 적지 않다. 일부에선 이란의 신정체제와 시아파 이슬람, 심지어 이슬람 전체를 폭력적이고 비문명적으로 몰아세우는 과격한 시각마저 엿보인다. 이란 핵합의가 탄생하자마자 미국에서 곧바로 반대파가 생긴 이유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은 2015년 핵합의 직후부터 합의에 회의적이었다.
■이란, 이란-이라크 전쟁 미국 사주로 의심
인질극 와중인 1980년 9월 이란과 국경을 맞댄 이라크가 국경문제를 시비 걸며 이란을 공격해 이란-이라크 전쟁이 발발해 1988년 7월까지 거의 8년을 끌었다. 이라크는 10만~50만 명의 군인이 전사하고 10만 명 이상의 민간인이 숨졌지만, 이란도 12만~60만 명의 군인이 전사하고, 10만 명 이상의 민간인이 희생됐다. 전쟁은 이라크에 5610억 달러, 막 이슬람혁명이 벌어진 이란에 6270억 달러의 경제적 손실도 안겼다. 많은 이란인은 미국이 이라크를 배후 조종하고 지원해 이란을 공격하도록 했다고 믿는다.
1978년 지미 카터 미국 대통령이 이란의 모하마드 레자 샤를 만나고 있다. 인권외교를 부르짖던 카터는 석유자원이 풍부한 이란의 샤가 국민을 억압하는 것에는 눈을 감았다가 1980년 11월의 대선에서 연임에 실패했다. 샤는 1979년 이란을 떠나 이집트에 망명했으며 다시는 귀국하지 못하고 객지에서 눈을 감아야 했다. [위키피디아]
■미, 83년 해병대 공격 배후로 이란 의심
1983년에는 내전 중인 레바논의 수도 베이루트에 파견됐던 미국 해병대 막사가 자살폭탄공격을 받아 307명이 목숨을 잃는 참사가 벌어졌다. 미군이 엄청난 피해를 보았지만 누가 무슨 목적으로 했는지 전혀 알려지지 않은 사건이다. 미국은 이란이나 시리아, 또는 이들의 사주를 받은 레바논의 이슬람 시아파가 벌인 것으로 여긴다. 이란 혁명수비대에서 해외작전을 담당하는 특수부대인 쿠드스(예루살렘)군은 1982년 레바논에 파견돼 시아파 민병대를 훈련하고 자금과 무기를 제공한 것으로 알려졌기 때문이다. 이런 레바논에서 1985년 이슬람 시아파 무장 정파인 헤즈볼라(신의 정당)가 창설됐다. 헤즈볼라의 자금과 무기, 그리고 대원 훈련은 쿠드스 부대가 맡는 것으로 알려졌다. 1997~1998년 무렵 이런 쿠드스군의 사령관을 맡아 최근까지 활약한 이란 장군이 지난 1월 3일 이라크 수도 바그다드의 국제공항에서 미군 드론 공격을 받아 숨진 거셈 솔레이마니다.
■이란, 시아파 무장 정파를 대리인으로 훈련
이란은 레바논의 헤즈볼라뿐 아니라 팔레스타인 가자지구의 무장 정파인 하마스도 훈련하고 무기와 자금을 제공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예멘에서 수니파 정부군과 이를 지원하는 사우디아라비아 등을 상대로 내전을 벌이고 있는 시아파 후티 반군도 이란의 지원을 받는 것으로 알려졌다. 특히 후티 반군이 발사하고 있다고 주장하는 수많은 탄도미사일은 이란이 제공했다는 관측이 유력하다. 이란은 이를 부인하지만. 후티 반군을 포함한 예멘의 그 누구도 탄도미사일을 개발하고 생산할 능력이 없는 것으로 파악되기 때문에 이란이 제공했다고 보는 것이 합리적인 의심이다.
미국이 2003년 침공해 사담 후세인 정권을 몰아낸 이라크도 이란의 손아귀에 있는 것으로 평가된다. 현재 미군이 주둔하고 있지만, 이라크는 시아파 인구가 다수여서 친이란 성격이 강하다. 최근 민족주의가 확산하면서 반이란 시위가 벌어지기는 했지만, 이라크에선 여전히 친이란 민병대가 10만 병력을 유지한다. 지난해 12월 27일 이라크 북부 키르쿠크 미국 공군기지를 공격해 미국인 민간군사 요원 1명이 숨지고 미군 여러 명이 부상한 사건도 친이란 시아파 민병대의 소행으로 보인다. 12월 31일 이라크 수도 바그다드의 미국 대사관 주변을 점거해 타이어에 불을 붙이고 문과 담을 넘어 대사관으로 진입하려고 했던 것도 같은 민병대로 파악되고 있다.
레바논의 헤즈볼라와 가자지구의 하마스는 이스라엘을 향해 수시로 로켓탄을 발사하고 있다. 미국은 이스라엘의 최대 우방 국가다. 예멘 정부군을 도와 후티 반군과 싸우고 있는 사우디아라비아도 미국의 중동 내 대리국가다.
■상대 괴롭히면 지지자들 결집에 도움
결국 20세기 이후 미국은 이란을, 이란은 미국은 끊임없이 괴롭혀왔다. 그 결과는 미국은 이란을 ‘입속의 검은 잎’으로서 지속해서 불편해하고, 이란은 미국을 영원한 적으로 여기고 있다. 증오와 원한이 쌓이고 쌓여 쉽게 풀 수 없는 지경이 된 것이다. 이에 따른 외교적, 경제적 비용은 가히 천문학적일 것이다. 그런데도 매듭을 풀려는 노력을 찾기는 쉽지 않다. 각자 자국의 내부 정치에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이란을 더욱 옥죄겠다는 말만으로도 지지층의 결집에 도움을 얻는 분위기다. 증오를 앞세워 표를 얻으려고 하는 것인가.
■이제는 원한과 증오 악순환 멈춰야
이란도 “미국에 죽음을”이라는 케케묵은 구호로 내부 정치에 도움을 얻을 수 있다. 하지만 최근 들어 이런 분위기가 바뀌고 있다. 우크라이나 여객기 오인 격추 사건 이후 이란에서는 반미 시위가 자취를 감추고 반정부 시위가 확산하고 있다. 이란에선 국민이 살기도 힘든데 과도한 지역 개입과 과도한 군사비 지출로 재정이 압박을 받는다는 볼멘소리가 나오고 있다. 이란 시위의 핵심 구호는 이런 정책을 추진해온 신정체제 최상부로 차츰 향하고 있다. 경제제재를 끊어낼 정책의 변화가 필요하다. 내부 모순의 분출을 감당하지 못한 이란 신정체제 지도부가 새로운 출구를 모색할지 주목된다. 이란 국민의 삶과 중동 지역 평화를 위해서도 증오의 악순환을 멈춰야 한다. 이는 미국도 마찬가지다. 이란과 미국은 전쟁한 적도 없지 않은가.
채인택 국제전문기자 ciimccp@joongang.co.kr
https://mnews.joins.com/article/23685408#home
"쿠데타가 민족주의 불길에 부채질…서구민주주의 추구 자생 자유주의 세력 질식"쿠데타 지원 거리시위대 동원한 성직자는 美에 자금 요청
(서울=연합뉴스) 윤동영 기자 = 오늘날 국제정세를 결정짓는 여러 악연의 근원을 찾자면 끝없이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게 되지만, 현대사로 한정해 미국과 이란 간 숙적 관계, 더 크게는 중동지역의 끝없는 불안과 이슬람국가(IS)의 테러리즘을 비롯한 폭력의 근원을 더듬어 찾아가다 보면 1953년 미국과 영국의 정보기관이 합작 지원한 이란 군부 쿠데타를 만나게 된다.
1953년 이란 쿠데타 당시 도심 거리에 나선 탱크. 출처:미국 국가안보기록보존소.
이 쿠데타에 대한 미국 중앙정보국(CIA)의 개입은 미국 정부의 부인에도 불구하고 그동안 기정사실로 알려졌다. 이와 관련해 지난주 비밀해제된 1천 쪽에 이르는 문건에는 CIA가 이 쿠데타에서 "중심적 역할"을 한 사실과 CIA가 한때 쿠데타에 실패했다고 보고 손을 떼려 했다가 막판에 중단 명령을 어긴 현지 책임자의 공작을 통해 성공으로 반전된 과정이 상세히 드러났다고 포린 폴리시가 20일(현지시간) 전했다.
당시 총선을 통해 집권한 무하마드 모사데그 총리를 쫓아내고 도피성 외유 중이던 팔레비를 불러들여 왕정을 복구한 암호명 '아작스(Ajax) 작전'은 궁극적으로 석유 때문이었다.
사우디아라비아의 석유 이권을 독점하고 있던 미국 자본의 아라비안 아메리칸석유(아람코. 1980년 사우디 정부에 의해 국유화)가 1950년 말 사우디정부의 압박에 굴복,수익을 사우디와 50대 50으로 반분키로 합의함에 따라 이란에서도 영국계의 앵글로-이란 석유 역시 같은 압박을 받았으나 영국은 완강하게 거부하던 상황이었다.
1951년 초 모사데그가 국유화를 선언하자 뿔난 영국은 CIA를 졸라서 모사데그를 축출하는 데 착수했다.
쿠데타 60주년인 2013년 공개된 CIA 내부 보고서는 이 군사 쿠데타가 "CIA의 지시하에 수행됐다"며 1953년 쿠데타 실행 이전부터 모사데그 총리를 공격하는 언론 보도 등을 통한 선전 활동, 팔레비 왕조와 제휴 시도, 이란 국회의원 매수, 대중시위 선동 등의 공작활동을 했음을 보여줬다.
새로 공개된 전문들을 보면 당시 미국 국무부 일각에선 석유 이익을 나누는 데 대한 영국의 비타협적 태도를 비난하면서 모사데그와 협력을 추구해야 한다는 입장도 있었다고 포린 폴리시는 설명했다.
1953년 8월 15일 쿠데타 시도가 시작됐으나 모사데그가 신속히 관련자 수십 명을 체포하고 주모자 자헤디 장군은 숨어버리고 국왕 팔레비도 외국으로 달아나자 CIA는 쿠데타가 실패했다고 판단, 손을 떼기로 했다.
CIA 본부는 8월 18일 이란 지부장이던 커밋 루스벨트에게 전문을 보내 "작전을 시도했으나 실패했으므로, 우리는 미국이 배후로 밝혀질 수 있는 어떠한 작전에도 참여하지 말아야 한다"며 모사데그 제거 작전을 중단토록 지시했다.
그러나 루스벨트는 "아니, 우리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며 지시를 무시했다. 이 사실은 이미 알려진 것이지만, CIA 본부의 중단 지시 전문 자체와 그 구체적인 지시 내용은 이번에 처음 공개된 것이라고 포린 폴리시는 설명했다.
이튿날 CIA의 지원으로 동원된 것으로 알려진 "임대" 시위대의 도움으로 군부 쿠데타가 성공, 모사데그는 투옥되고 친서방 팔레비 국왕이 전제 왕권을 되찾았다. 브리티시 페트롤리엄(BP)으로 이름을 바꾼 앵글로-이란 석유는 국유화됐던 유전을 되찾으려 했으나, 외국 자본으로 다시 넘어가는 것에 대한 민족주의적 반발이 워낙 강했기 때문에 BP와 미국계 석유회사들은 이란 정부와 지분을 나눌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아작스 작전'은 이란의 자유주의자들의 숨통을 죄는 결과를 가져왔다"고 포린 폴리시는 지적했다. 반서방 정서와 민족주의의 불길에 부채질을 한 셈이 돼 결국 1979년 미국 인질 위기와 팔레비 왕정의 전복 및 이슬람공화국 탄생으로 이어졌다는 것이다.
포린 폴리시는 모사데그에 대해 민주주의 가치를 공개적으로 옹호하고 민주체제를 구축하려 하는 등 "이란 현대사에서 민주주의적인 지도자에 가장 가까웠던 인물로 널리 간주"되는데, 8.19 쿠데타를 고비로 이란에서 더 이상의 민주주의 발전은 좌절되고 말았다는 것이다.
모사데그가 민주 선거를 통해 선출된 의회에서 총리로 선임된 후 총리의 권력 강화에 나섰던 것에 대해 포린 폴리시는 "국왕의 권력을 줄임으로써 유럽형 정치 전통을 따르려 했던" 시도라고 해석했다.
미 국무부는 1989년 이란 쿠데타 관련 비밀해제 문건을 처음 발표했을 때 CIA의 개입 사실을 알려주는 대목은 모두 삭제하는 등 CIA의 개입을 부인하는 입장을 오랫동안 견지해 왔으나 빌 클린턴, 버락 오바마 전 대통령 등은 미국의 개입 사실을 인정했다.
이번 공개에 앞서 "CIA 전문 다수가 이미 오래전에 없어졌거나 파기된 것으로 알려졌다"고 포린 폴리시는 말했다. CIA의 공작 일선의 활동 방법을 공개할 수 없기 때문이기도 하고, 쿠데타 지원에 합작했던 영국 정보기관을 보호할 필요도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쿠데타가 성공이냐 실패냐의 기로에 섰을 때 쿠데타를 지원하는 거리의 시위대에는 모사데그 총리의 반대파 성직자 아야톨라 카샤니 세력이 총동원돼 참여함으로써 카샤니가 결정적 역할을 했다.
카샤니는 당시 모사데그의 정적이었을 뿐 아니라 "쿠데타 전 과정을 거쳐 미국 측과 긴밀하게 교신하고 있었으며, 미국에 재정지원을 요청한 정황"도 새로 공개된 문건들을 통해 처음으로 밝혀졌다고 포린 폴리시는 설명했다.
이슬람 성직자인 카샤니는 1950년대 이란의 주요 정치인 중 한 사람으로서 모사데그의 석유자원 국유화에 찬동하는 등 민족주의 동지였으나 모사데그와 갈라선 인물이다. 당시 이란 성직자들은 공산주의 투데당의 힘이 커지는 것에 불안을 느끼며 모사데그가 이에 대처하기엔 너무 나약하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고 포린 폴리시는 말했다.
ydy@yna.co.kr
https://www.google.com/amp/s/m.yna.co.kr/amp/view/AKR20170621138600009
우연히 이란-미국 쿠테타관련 댓글 봐서 한번 찾아봤어
[채인택의 글로벌 줌업]
이란·미국, 왜 이토록 미워하는가
53년 CIA 조종 이란 쿠데타 발단
석유국유화 모사데그 총리 축출
권력 강화한 샤, 국민 억압 독재
급속 서구화 이슬람·보수 적으로
친이스라엘 정책에 국민 등 돌려
이란, 대사관 인질극으로 미 모욕
서로 대리인 내세워 계속 괴롭혀
증오외교, 내부정치 도움 돼 문제
미움·한풀이 악순환 고리 끊어야
2015년 이란 수도 테헤란 시내에서 시위대가 미국과 이스라엘, 그리고 사우디아라비아의 국기를 불태우고 있다. 국기 훼손은 모욕을 부르고, 모욕은 증오와 원한으로 이어지게 마련이다. [위키피디아]
■민족주의자 이란 총리, CIA가 53년 몰아내
제2차 세계대전 뒤 현대사에서 이란인이 미국에 큰 반발을 갖기 시작한 근원은 1953년 모하마드 모사데그 총리(1882~1967년, 재임 1952~1953년) 축출 사건이다. 민족주의자였던 모사데크 총리는 외국 기업이 지배하던 이란 석유산업을 국유화하려고 시도했다. 1913년 설립된 앵글로페르시아 석유회사(APOC)를 이란 정부가 접수해 그 이익을 모두 갖겠다는 말이다.
그러자 당시 영국과 ‘특별한 관계’였던 미국의 중앙정보국(CIA)이 영국 해외정보기관인 비밀정보국(MI6)과 함께 이란의 모하마드 레자 샤와 군부에 공작해 쿠데타를 일으키게 했다. 모사데그는 축출돼 해외로 추방됐으며 모하마드 레자 샤는 군주로서 권력을 강화했다. 영국은 이란에서 석유 이권을 계속 유지하게 됐다. 합헌적이고 합법적으로 선출된 정치 지도자이자 행정 최고 책임자인 총리가 외국 정보기관이 사주한 군사 쿠데타로 쫓겨난 사건은 이란 국민에게 두고두고 상처로 남을 수밖에 없었다. 이란 국민은 이를 외국의 부당한 개입으로 국내 정치와 정책이 벽에 부딪힌 사건으로 기억한다.
1953년 쿠데타로 쫓겨난 이란의 모하마드 모사데그 총리.
■군주가 주도한 서구화 ‘백색혁명’에 국민 불만
이를 통해 권한을 확대한 모하마드 샤는 1963년 ‘백색 혁명’이라는 이름으로 더욱 급속한 서구화·근대화 정책을 시작했다. 우선 석유 대신 숲과 초지, 그리고 수자원을 국유화하고 대신 산업 분야의 국유기업은 민영화했다. 지주로부터 토지를 사들여 농민들에게 시세보다 30% 싸게 분배하는 토지개혁도 벌였다. 모든 공장과 기업은 이익의 30%를 직원들에게 상여금으로 주도록 의무화했다. 물가를 안정시킨다며 가격을 비상식적으로 올린 공장주와 체인점 업주를 적발해 무거운 벌금을 물리고 감옥에 보내는 한편, 조업권이나 영업권을 몰수했다. 특정 상품은 국가가 정하는 가격에 소비자에게 팔게 했다. 젊은이들에게 군 복무 대신 농촌 등에서 문맹자에게 문자를 가르치는 문맹퇴치단에서 근무하게 했으며, 교육을 무상화했다. 4500개 의료그룹을 양성해 무의촌에서 근무하도록 했으며, 주택 건설단도 조직해 전국에서 주택공급을 확대했다. 하지만 이러한 급진적인 정책은 지주와 기업인, 상인들을 반정부로 돌아서게 했다. 여성 참정권을 확대하는 등 사회 개혁도 추진했다. 무슬림 여성에게 강요하던 차도르(얼굴과 손발을 제외한 온몸을 가리는 복장)와 머리에 쓰는 히잡은 벗도록 했다. 이는 시아파 성직자는 물론 전통을 중시하는 농촌 주민들을 군주의 적으로 돌리는 결과를 가져왔다.
■국민감정 무시한 친이스라엘 정책 화근
모하마드 레자 샤는 자신을 샤에 앉힌 영국에는 물론 1953년 쿠데타로 자신의 권한을 강화시켜준 미국을 철저히 추종했다. 그는 외교에서 철저한 친미·반공 노선을 걸으면서 서구화를 가속화했다. 미국은 냉전시기에 중동에서 서방의 이익을 지켜줄 대리인으로 사우디아라비아와 이란을 지목했다. 두 나라 모두 군주제 국가로 강력한 군대와 경찰, 그리고 외세가 필요한 상황이었다. 이란은 중동을 대표하는 친미국가로서 핵비확산조약(NPT)에 가입하고 그 대가로 미국서 핵연료와 기술을 도입해 원자력의 평화적 연구를 위한 기반을 조성했다. 이는 나중에 역설적이게도 이란 핵개발의 단초가 된다.
이란의 무하마드 레자 샤 정권은 반이스라엘로 일관했던 사우디아라비아의 사우드 왕가와 달리 친이스라엘 정책도 추구했다. 군주제 이란은 터키에 이어 무슬림 국가로는 둘째로 이스라엘과 대사급 관계를 수립하고 돈독한 관계를 유지했다. 1967년 6일전쟁(제3차 중동전쟁)에서 이집트·시리아·요르단·레바논 등 아랍권이 24만의 병력, 2500여 대의 전차, 950여 기의 항공기로 병력 10만, 전차 800여 대, 항공기 300여 대의 이스라엘을 공격했다가 6일 만에 궤멸적인 타격을 입은 전쟁이다. 이 전쟁으로 이스라엘은 요르단으로부터 이슬람 성지인 알아크사 모스크가 포함된 동예루살렘과 요르단강 서안, 이집트로부터 시나이 반도와 가자지구, 시리아로부터 골란고원을 빼앗았다. 아랍어를 쓰는 아랍권은 물론 대부분의 이슬람권은 일제히 분노와 허탈감에 빠졌지만 이란은 이 전쟁 뒤에도 이스라엘과 돈독한 관계를 유지했다. 6일전쟁 뒤 이스라엘에 석유를 공급했으며, 파이프라인 공동건설과 미사일 공동개발도 추진했다. 이는 대부분 무슬림(이슬람 신자)인 이란 국민의 감정과는 맞지 않는 것이었다.
■비밀경찰 사바크로 불만 누르다 정권 무너져
게다가 모하마드 레자 샤 정권은 독재와 부패 속 폭력적인 억압정치 계속하면서 국민의 분노를 불렀다. 특히 비밀경찰인 사바크(국가정보안보기구)를 앞세워 국민을 감시하고 억압했다. 특히 백색혁명에 불만을 토로하는 사람, 공산당 추종자 등을 혹독하게 탄압했다. 공식 통계로도 정치범이 3200명을 넘었다. 그의 급속한 근대화와 세속화 정책은 시아파 성직자에 이어 지주, 기업인, 지식인의 반발을 샀으며 노동자까지 비판에 가세했다. 그런 상황에서 왕족과 지배계층의 부정부패는 그칠 줄을 몰랐다. 민심은 군주를 완전히 떠났다. 폭력을 앞세운 억압으로 불만을 잠재울 수 없었다.
■이슬람혁명 뒤 미국 대사관 인질극
이런 반발이 쌓여 1978~1979년 대규모 시위가 발생했으며, 민주화 세력과 종교 세력이 합작해 모하마드 레자 샤를 축출하고 이슬람혁명을 이뤘다. 혁명 이후 이스라엘과는 즉시 단교했으며 모든 관계를 중단했다. 이란은 이스라엘의 가장 강력한 적대국가가 됐으며, 심지어 국가지도자들이 홀로코스트를 부인하는 발언을 수시로 하고 있다. 혁명 뒤 이란 여성은 차도르를 입든지 히잡을 쓰도록 강요받았다. 종교 경찰이 창설돼 조금이라도 몸매가 드러나는 옷을 입은 여성은 경찰서로 연행해 아버지나 남자형제, 남편이 데리러 와야 풀어줬다. 혁명이 진보가 아니라 보수화를 부른 경우다.
이런 상황에서 1979년 11월 이란 대학생들이 테헤란의 미국 대사관에 진입해 직원들을 인질로 잡았다. 미국 대사관과 이란 외교부에서 미국인 66인 명이 444일간 억류됐다가 풀려났다. 지미 카터 대통령(95·1977~1981년 재임)은 구출 병력을 보냈으나 사막에서 헬기가 추락해 인명피해를 나면서 본격적인 작전에 들어가지도 못했다. 미국과 이란의 국교는 1980년 4월 공식 단절됐다.
■외교 참사로 미국인 자부심에 큰 상처
이란 이슬람혁명과 인질극의 영향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1980년 11월 4일 치른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카터는 재임에 실패했다. 미국인의 자부심은 큰 상처를 입었다. 외교사절이 억류됐는데도 이란에 대해 군사력으로도, 외교력으로도 어떻게 할 수 없는 상황이 벌어진 것이다. 이란 국민이 모하마드 레자 샤의 전제정치와 억압이 미국의 도움으로 이뤄졌다고 여겨 미국을 뱀 보듯 한 때문에 이런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외교 참사가 벌어진 셈이다. 전쟁을 치렀음에도 미국과 화해해 발전의 기회를 얻은 중국이나 베트남과 대조적이다.
인질극이 진행되는 동안 미국은 두 차례의 성탄절을 맞았는데, 이 사건으로 성탄 전통에도 변화가 생겼다. 미국은 1923년부터 백악관에 성탄 축하용 국가 트리를 점등하는 전통이 있는데 테헤란 대사관이 점거된 1979년에는 트리를 설치하되 기도용 별 하나를 남기고 소등했다. 1980년 성탄절엔 그 날까지 417일 억류를 기억하기 위해 417초간 트리 전체에 불을 밝힌 뒤 다시 전등을 껐다. 인질들은 1981년 로널드 레이건(1911~2003년, 재임 1981~1989년)의 취임일인 1월 20일에 모두 석방됐다. 이란의 이슬람 혁명과 미국 대사관 인질극이 미국 국내정치에 톡톡히 영향을 끼친 셈이다.
■핵합의 하자마자 미국 일각서 반대 나와
이런 탓인지 미국인은 이란에 대한 앙금이 가시지 않고 있다. 2015년 버락 오바마 대통령이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상임이사국 및 독일과 이란 핵합의를 이뤘지만 미국에선 내용과 상관없이 이란과 협상을 하거나 합의를 하는 데 거부감을 느끼는 사람이 적지 않다. 일부에선 이란의 신정체제와 시아파 이슬람, 심지어 이슬람 전체를 폭력적이고 비문명적으로 몰아세우는 과격한 시각마저 엿보인다. 이란 핵합의가 탄생하자마자 미국에서 곧바로 반대파가 생긴 이유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은 2015년 핵합의 직후부터 합의에 회의적이었다.
■이란, 이란-이라크 전쟁 미국 사주로 의심
인질극 와중인 1980년 9월 이란과 국경을 맞댄 이라크가 국경문제를 시비 걸며 이란을 공격해 이란-이라크 전쟁이 발발해 1988년 7월까지 거의 8년을 끌었다. 이라크는 10만~50만 명의 군인이 전사하고 10만 명 이상의 민간인이 숨졌지만, 이란도 12만~60만 명의 군인이 전사하고, 10만 명 이상의 민간인이 희생됐다. 전쟁은 이라크에 5610억 달러, 막 이슬람혁명이 벌어진 이란에 6270억 달러의 경제적 손실도 안겼다. 많은 이란인은 미국이 이라크를 배후 조종하고 지원해 이란을 공격하도록 했다고 믿는다.
1978년 지미 카터 미국 대통령이 이란의 모하마드 레자 샤를 만나고 있다. 인권외교를 부르짖던 카터는 석유자원이 풍부한 이란의 샤가 국민을 억압하는 것에는 눈을 감았다가 1980년 11월의 대선에서 연임에 실패했다. 샤는 1979년 이란을 떠나 이집트에 망명했으며 다시는 귀국하지 못하고 객지에서 눈을 감아야 했다. [위키피디아]
■미, 83년 해병대 공격 배후로 이란 의심
1983년에는 내전 중인 레바논의 수도 베이루트에 파견됐던 미국 해병대 막사가 자살폭탄공격을 받아 307명이 목숨을 잃는 참사가 벌어졌다. 미군이 엄청난 피해를 보았지만 누가 무슨 목적으로 했는지 전혀 알려지지 않은 사건이다. 미국은 이란이나 시리아, 또는 이들의 사주를 받은 레바논의 이슬람 시아파가 벌인 것으로 여긴다. 이란 혁명수비대에서 해외작전을 담당하는 특수부대인 쿠드스(예루살렘)군은 1982년 레바논에 파견돼 시아파 민병대를 훈련하고 자금과 무기를 제공한 것으로 알려졌기 때문이다. 이런 레바논에서 1985년 이슬람 시아파 무장 정파인 헤즈볼라(신의 정당)가 창설됐다. 헤즈볼라의 자금과 무기, 그리고 대원 훈련은 쿠드스 부대가 맡는 것으로 알려졌다. 1997~1998년 무렵 이런 쿠드스군의 사령관을 맡아 최근까지 활약한 이란 장군이 지난 1월 3일 이라크 수도 바그다드의 국제공항에서 미군 드론 공격을 받아 숨진 거셈 솔레이마니다.
■이란, 시아파 무장 정파를 대리인으로 훈련
이란은 레바논의 헤즈볼라뿐 아니라 팔레스타인 가자지구의 무장 정파인 하마스도 훈련하고 무기와 자금을 제공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예멘에서 수니파 정부군과 이를 지원하는 사우디아라비아 등을 상대로 내전을 벌이고 있는 시아파 후티 반군도 이란의 지원을 받는 것으로 알려졌다. 특히 후티 반군이 발사하고 있다고 주장하는 수많은 탄도미사일은 이란이 제공했다는 관측이 유력하다. 이란은 이를 부인하지만. 후티 반군을 포함한 예멘의 그 누구도 탄도미사일을 개발하고 생산할 능력이 없는 것으로 파악되기 때문에 이란이 제공했다고 보는 것이 합리적인 의심이다.
미국이 2003년 침공해 사담 후세인 정권을 몰아낸 이라크도 이란의 손아귀에 있는 것으로 평가된다. 현재 미군이 주둔하고 있지만, 이라크는 시아파 인구가 다수여서 친이란 성격이 강하다. 최근 민족주의가 확산하면서 반이란 시위가 벌어지기는 했지만, 이라크에선 여전히 친이란 민병대가 10만 병력을 유지한다. 지난해 12월 27일 이라크 북부 키르쿠크 미국 공군기지를 공격해 미국인 민간군사 요원 1명이 숨지고 미군 여러 명이 부상한 사건도 친이란 시아파 민병대의 소행으로 보인다. 12월 31일 이라크 수도 바그다드의 미국 대사관 주변을 점거해 타이어에 불을 붙이고 문과 담을 넘어 대사관으로 진입하려고 했던 것도 같은 민병대로 파악되고 있다.
레바논의 헤즈볼라와 가자지구의 하마스는 이스라엘을 향해 수시로 로켓탄을 발사하고 있다. 미국은 이스라엘의 최대 우방 국가다. 예멘 정부군을 도와 후티 반군과 싸우고 있는 사우디아라비아도 미국의 중동 내 대리국가다.
■상대 괴롭히면 지지자들 결집에 도움
결국 20세기 이후 미국은 이란을, 이란은 미국은 끊임없이 괴롭혀왔다. 그 결과는 미국은 이란을 ‘입속의 검은 잎’으로서 지속해서 불편해하고, 이란은 미국을 영원한 적으로 여기고 있다. 증오와 원한이 쌓이고 쌓여 쉽게 풀 수 없는 지경이 된 것이다. 이에 따른 외교적, 경제적 비용은 가히 천문학적일 것이다. 그런데도 매듭을 풀려는 노력을 찾기는 쉽지 않다. 각자 자국의 내부 정치에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이란을 더욱 옥죄겠다는 말만으로도 지지층의 결집에 도움을 얻는 분위기다. 증오를 앞세워 표를 얻으려고 하는 것인가.
■이제는 원한과 증오 악순환 멈춰야
이란도 “미국에 죽음을”이라는 케케묵은 구호로 내부 정치에 도움을 얻을 수 있다. 하지만 최근 들어 이런 분위기가 바뀌고 있다. 우크라이나 여객기 오인 격추 사건 이후 이란에서는 반미 시위가 자취를 감추고 반정부 시위가 확산하고 있다. 이란에선 국민이 살기도 힘든데 과도한 지역 개입과 과도한 군사비 지출로 재정이 압박을 받는다는 볼멘소리가 나오고 있다. 이란 시위의 핵심 구호는 이런 정책을 추진해온 신정체제 최상부로 차츰 향하고 있다. 경제제재를 끊어낼 정책의 변화가 필요하다. 내부 모순의 분출을 감당하지 못한 이란 신정체제 지도부가 새로운 출구를 모색할지 주목된다. 이란 국민의 삶과 중동 지역 평화를 위해서도 증오의 악순환을 멈춰야 한다. 이는 미국도 마찬가지다. 이란과 미국은 전쟁한 적도 없지 않은가.
채인택 국제전문기자 ciimccp@joongang.co.kr
https://mnews.joins.com/article/23685408#home
"쿠데타가 민족주의 불길에 부채질…서구민주주의 추구 자생 자유주의 세력 질식"쿠데타 지원 거리시위대 동원한 성직자는 美에 자금 요청
(서울=연합뉴스) 윤동영 기자 = 오늘날 국제정세를 결정짓는 여러 악연의 근원을 찾자면 끝없이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게 되지만, 현대사로 한정해 미국과 이란 간 숙적 관계, 더 크게는 중동지역의 끝없는 불안과 이슬람국가(IS)의 테러리즘을 비롯한 폭력의 근원을 더듬어 찾아가다 보면 1953년 미국과 영국의 정보기관이 합작 지원한 이란 군부 쿠데타를 만나게 된다.
1953년 이란 쿠데타 당시 도심 거리에 나선 탱크. 출처:미국 국가안보기록보존소.
이 쿠데타에 대한 미국 중앙정보국(CIA)의 개입은 미국 정부의 부인에도 불구하고 그동안 기정사실로 알려졌다. 이와 관련해 지난주 비밀해제된 1천 쪽에 이르는 문건에는 CIA가 이 쿠데타에서 "중심적 역할"을 한 사실과 CIA가 한때 쿠데타에 실패했다고 보고 손을 떼려 했다가 막판에 중단 명령을 어긴 현지 책임자의 공작을 통해 성공으로 반전된 과정이 상세히 드러났다고 포린 폴리시가 20일(현지시간) 전했다.
당시 총선을 통해 집권한 무하마드 모사데그 총리를 쫓아내고 도피성 외유 중이던 팔레비를 불러들여 왕정을 복구한 암호명 '아작스(Ajax) 작전'은 궁극적으로 석유 때문이었다.
사우디아라비아의 석유 이권을 독점하고 있던 미국 자본의 아라비안 아메리칸석유(아람코. 1980년 사우디 정부에 의해 국유화)가 1950년 말 사우디정부의 압박에 굴복,수익을 사우디와 50대 50으로 반분키로 합의함에 따라 이란에서도 영국계의 앵글로-이란 석유 역시 같은 압박을 받았으나 영국은 완강하게 거부하던 상황이었다.
1951년 초 모사데그가 국유화를 선언하자 뿔난 영국은 CIA를 졸라서 모사데그를 축출하는 데 착수했다.
쿠데타 60주년인 2013년 공개된 CIA 내부 보고서는 이 군사 쿠데타가 "CIA의 지시하에 수행됐다"며 1953년 쿠데타 실행 이전부터 모사데그 총리를 공격하는 언론 보도 등을 통한 선전 활동, 팔레비 왕조와 제휴 시도, 이란 국회의원 매수, 대중시위 선동 등의 공작활동을 했음을 보여줬다.
새로 공개된 전문들을 보면 당시 미국 국무부 일각에선 석유 이익을 나누는 데 대한 영국의 비타협적 태도를 비난하면서 모사데그와 협력을 추구해야 한다는 입장도 있었다고 포린 폴리시는 설명했다.
1953년 8월 15일 쿠데타 시도가 시작됐으나 모사데그가 신속히 관련자 수십 명을 체포하고 주모자 자헤디 장군은 숨어버리고 국왕 팔레비도 외국으로 달아나자 CIA는 쿠데타가 실패했다고 판단, 손을 떼기로 했다.
CIA 본부는 8월 18일 이란 지부장이던 커밋 루스벨트에게 전문을 보내 "작전을 시도했으나 실패했으므로, 우리는 미국이 배후로 밝혀질 수 있는 어떠한 작전에도 참여하지 말아야 한다"며 모사데그 제거 작전을 중단토록 지시했다.
그러나 루스벨트는 "아니, 우리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며 지시를 무시했다. 이 사실은 이미 알려진 것이지만, CIA 본부의 중단 지시 전문 자체와 그 구체적인 지시 내용은 이번에 처음 공개된 것이라고 포린 폴리시는 설명했다.
이튿날 CIA의 지원으로 동원된 것으로 알려진 "임대" 시위대의 도움으로 군부 쿠데타가 성공, 모사데그는 투옥되고 친서방 팔레비 국왕이 전제 왕권을 되찾았다. 브리티시 페트롤리엄(BP)으로 이름을 바꾼 앵글로-이란 석유는 국유화됐던 유전을 되찾으려 했으나, 외국 자본으로 다시 넘어가는 것에 대한 민족주의적 반발이 워낙 강했기 때문에 BP와 미국계 석유회사들은 이란 정부와 지분을 나눌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아작스 작전'은 이란의 자유주의자들의 숨통을 죄는 결과를 가져왔다"고 포린 폴리시는 지적했다. 반서방 정서와 민족주의의 불길에 부채질을 한 셈이 돼 결국 1979년 미국 인질 위기와 팔레비 왕정의 전복 및 이슬람공화국 탄생으로 이어졌다는 것이다.
포린 폴리시는 모사데그에 대해 민주주의 가치를 공개적으로 옹호하고 민주체제를 구축하려 하는 등 "이란 현대사에서 민주주의적인 지도자에 가장 가까웠던 인물로 널리 간주"되는데, 8.19 쿠데타를 고비로 이란에서 더 이상의 민주주의 발전은 좌절되고 말았다는 것이다.
모사데그가 민주 선거를 통해 선출된 의회에서 총리로 선임된 후 총리의 권력 강화에 나섰던 것에 대해 포린 폴리시는 "국왕의 권력을 줄임으로써 유럽형 정치 전통을 따르려 했던" 시도라고 해석했다.
미 국무부는 1989년 이란 쿠데타 관련 비밀해제 문건을 처음 발표했을 때 CIA의 개입 사실을 알려주는 대목은 모두 삭제하는 등 CIA의 개입을 부인하는 입장을 오랫동안 견지해 왔으나 빌 클린턴, 버락 오바마 전 대통령 등은 미국의 개입 사실을 인정했다.
이번 공개에 앞서 "CIA 전문 다수가 이미 오래전에 없어졌거나 파기된 것으로 알려졌다"고 포린 폴리시는 말했다. CIA의 공작 일선의 활동 방법을 공개할 수 없기 때문이기도 하고, 쿠데타 지원에 합작했던 영국 정보기관을 보호할 필요도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쿠데타가 성공이냐 실패냐의 기로에 섰을 때 쿠데타를 지원하는 거리의 시위대에는 모사데그 총리의 반대파 성직자 아야톨라 카샤니 세력이 총동원돼 참여함으로써 카샤니가 결정적 역할을 했다.
카샤니는 당시 모사데그의 정적이었을 뿐 아니라 "쿠데타 전 과정을 거쳐 미국 측과 긴밀하게 교신하고 있었으며, 미국에 재정지원을 요청한 정황"도 새로 공개된 문건들을 통해 처음으로 밝혀졌다고 포린 폴리시는 설명했다.
이슬람 성직자인 카샤니는 1950년대 이란의 주요 정치인 중 한 사람으로서 모사데그의 석유자원 국유화에 찬동하는 등 민족주의 동지였으나 모사데그와 갈라선 인물이다. 당시 이란 성직자들은 공산주의 투데당의 힘이 커지는 것에 불안을 느끼며 모사데그가 이에 대처하기엔 너무 나약하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고 포린 폴리시는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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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연히 이란-미국 쿠테타관련 댓글 봐서 한번 찾아봤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