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33년 8월 조선나예방협회 기금으로 1000원을 냈다.
- 1934년 6월 29일 조선중앙일보 감사역을 맡았다.
- 1936년 2월부터는 합자회사 구정상회 사장으로 있었다. 이때 교하간이교를 지을 땅을 1,500평을 기부하였다.
- 1936년 7월부터 금융신탁회사인 우익상사 취체역으로 있었다.
- 1937년 7월 22일 국방헌금 1만원을 종로경찰서에 헌납했다. 그는 "나라에 대한 봉사의 뜻을 표하고자 적은 돈이나마 바치오니 받아주십시오"하고 돌아갔다.
- 1937년 조선군사후원연맹 사업비로 2500원을 냈으며, 같은해 9월 5일 결성된 '경기도내 군기헌납기성회'의 발기인으로 참여하여 비행기 대금 500원을 냈다. 반일운동에 대항하기 위해 '일선융화'를 내걸고 결성된 동민회의 회원으로 활동했다
- 1939년 11월 조선총독부 1939년 9월 주식회사 쇼와직물을 설립하여 사장을 역임.
- 1940년 9월 중앙연료주식회사 취체역을 맡았다.
- 1943년 8월 징병제 실시에 감격하여 국방헌금 3000원을 헌납했다.
- 1944년 4월 일본 정부가 주는 감수포장을 받았다.
- 해방 이후, 1945년 9월 한국민주당 발기인으로 참여했고, 1945년 12월 대한경제보국회 감사를 맡았다.
- 1948년 백범 김구와 임시정부 계열이 지목한 숙청대상 친일인사들 명단초안에도 이름이 올랐다.
1. 앞으로 독립운동가 더 잘 때려죽이라고 고문기관에 기부금 헌납
2. 독립반대운동 활동
3. 불쌍한 대한민국 청년들 방패로 전쟁에 끌려가는 거 보고 너무 잘 한다고 기부금 헌납
그 후손들도 비난하는 건 너무한 거 아니냐고 하지만
http://www.newdaily.co.kr/site/data/html/2011/12/19/2011121900026.html
본인을 명문가라고 생각하며
그냥 세금 많이 낸 것 뿐인데 왜 욕 하냐고 오히려 화내고 있음
참고로 이지아 조부는 이완용 다음 가는 재력가였는데
독립운동가 때려 죽이고 독립반대운동한 돈으로 이지아 아버지는 사업했고,
그 사업한 돈으로 이지아는 미국에서 부유하게 살 수 있었고, 배우로 성공할 수 있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