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선 시대 때 어느 신하든지(후궁이어도) 억울하든 억울하지 않든간에 임금의 최고의 배려는 자진하라는 거였지
(사약말고도 여러가지 자살방법이 있었어)
임금의 명이니 받는 신하는 안 먹겠다 패악질도 부리지도 않았고
실록에 의하면 숙종은 장희빈에게 자진을 하라고 명했다고 함
그게 사약인지 아니면 다른 자살방법인지는 알려진 게 없지만 야사로는 사약을 받았다고 알려져서
저리 굳혀진 거
이때 아들 세자는 저때 인현왕후 상중이라서 빈전에 있었다고 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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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종은 희빈의 사후 왕후에 준하는 예우를 받게 했고, 장례에 세자 부부 내외도 참가케 했다. 왕의 자식은 후궁 소생이라 하더라도 공식적으로는 왕비의 자녀가 되므로 후궁 출신 자녀라 해도 생모를 위하여 망곡, 즉 슬피 우는 것도 마음대로 할 수 없었다. 그러나 세자는 숙종의 특명으로 자신의 생모를 위한 장례에 참석할 수 있었다.
또한 숙빈 최씨의 장례식 때는 친자인 연잉군 외에는 내시나 노비 정도나 관여했다. 장례기간도 3월, 연잉군이 상복을 입는 것조차 며칠 하지도 못한 반면 희빈 장씨 때는 숙종의 지시로 종친부에서 직접 장례를 주관하였고, 장례기간도 왕후의 예에 준하는 5월(실제로는 약 3개월 반)[26], 세자의 상복도 3년 가까이 입도록 해주었다.
왕실 규범상 왕, 왕비 이외에는 3년상을 채우는 경우가 없고, 훗날 후궁 중 가장 왕비에 가까운 예우를 받았다고 알려진 순조의 생모 수빈 박씨의 상때도 3년복이 아닌 후궁을 위한 상복을 입은 것을 고려하면 희빈 장씨는 사실상 왕후 급으로 대우받은 것이고, 경종 역시 사실상 적장자로서 친모의 상을 치른 것이라고 보아야 한다.
이후 희빈의 묘가 터가 안 좋다는 말이 나와 이장을 하게 되었는데, 와병 중이던 숙종이 직접 나서서 후보지로 물망에 오른 길지들 중 가장 평가가 우수한 광주 진해촌으로 옮기는 것으로 교통정리를 해주기도 하였다.
왕가의 공식적인 입장은 숙종의 제2계비는 인원왕후이고 경종은 숙종의 서장자로서 계승했다는 것이지만, 위와 같이 단순한 후궁으로 치기에는 너무 파격적인 대우를 받은 정황으로 인해 영조 시대 때 경종은 숙종의 적장자로, 장희빈은 숙종의 제2계비로 기재한 서적이 발간되기도 하였다.
숙종 입장에서는 세자에게 미안해서 이랬을 수도 있고, 세자의 입지를 강화하려면 세자를 낳은 장희빈의 권위를 회복시켜 줄 필요가 있어서 이런 대우를 해주었을 수도 있다.
그녀 사후 숙종은 내명부의 궁녀(정확히는 후궁)가 왕비로 책봉되는 일을 금지시켰고 스스로도 후궁 중 한 명을 왕비로 삼지 않고 인원왕후에게 새로 장가를 들었다.
장희빈의 묘는 본래 경기도 광주시에 있었지만 1969년에 고양시 서오릉 구역으로 이장되었다. 이를 대빈묘(大嬪墓)라고 부른다. 신주는 칠궁의 하나인 대빈궁(大嬪宮)에 모셔졌다.(ㅊㅊ ㄴㅁㅇ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