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5년 5월 30일 미국에서 태어난 '마이클 페이'는 ADHD 환자로, 어려서부터 많은 비행을 저지르고 다녔다.
그러던 어느날, 마이클 페이는 어머니가 싱가포르인과 재혼하게 되면서 싱가포르로 유학을 가게 되었다.
1993년 마이클 페이는 주차되어 있던 차량 50여대를 고의로 파손하거나 빨간색 페인트 등으로 낙서를 했고 마이클 페이는 재물손괴죄로 재판에 넘겨지게 되었다.
이듬해 마이클 페이는 징역 4개월, 벌금 2,200달러, 태형 6대를 선고받았다. 그의 죄질을 고려하면 오히려 솜방망이로 보일 수도 있는 처벌이었다.
그런데 여기서 '태형 6대'라는 처벌이 문제를 일으켰다. 싱가포르 인권 단체는 외국인에게 비인도적인 형벌 테형을 집행하지 말라고 항의했고 이 소식은 바다 건너 백악관까지 건너갔다.
당시 빌 클린턴은 리콴유에게 직접 전화해 '마이클 페이에게 선고한 태형을 즉각 철회하고 그를 미국으로 송환하라'고 했지만 소용없었다. 오히려 '누구든지 싱가포르에서 법을 어겼다면 싱가포르의 처벌을 받아야 한다'는 냉정한 대답만이 돌아올 뿐이었다.
다만 리콴유 총리는 빌 클린턴의 호소를 마냥 무시할 수는 없었는지 태형 6대에서 4대로 감형을 해주었다. 1994년 5월 5일, 마이클 페이는 4대의 곤장을 맞았다.
당시 이 사건은 미국 전역에서도 찬반 논쟁이 꽤나 갈린 소재였다. 전반적으로 '우리 미국에서도 버르장머리 없는 10대들을 저렇게 엄하게 다스려야 한다'는 마이클 페이 태형 찬성론이 우세했지만 반대로 '우리 자랑스러운 미국이 저런 미개한 나라에게 굴복해서는 안 된다'는 마이클 페이 태형 반대론도 만만찮은 지지를 얻었다.
아래는 태형이 집행된 후 찍힌 마이클 페이의 엉덩이다. 30년이 다 되어가는 아직까지도 그의 엉덩이에는 선명한 흉터가 남아있다고 한다.
이후 그는 만기 출소한 뒤 미국으로 귀국했으나, 그 곳에서도 대마초를 흡연하거나 부탄가스를 흡입하고 아버지를 폭행하는 등 전혀 갱생하지 않는 모습을 보였는데 이에 대해서 그는 '그때의 고통을 잊기 위해 그랬다'고 호소하기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