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손지창의 아버지는 한국 0세대 스타 방송인 임택근으로, 임택근은 연세대 정치외교학과 1학년에 재학 중이던 1951년 중앙방송국(현 KBS) 아나운서로 입사하여 방송계에 첫 발을 내딛었다.
이후 그는 당대의 인기 라디오 프로그램을 진행하면서 인기 방송인의 반열에 올랐고 스포츠 중계로도 좋은 평을 얻었다. 이후 1964년에는 MBC로 이적한 뒤 그곳에서도 전성기를 구가하였고 1969년에는 아침 토크쇼 프로그램 '임택근 모닝쇼'를 진행했는데, 이는 한국 TV 프로그램 최초로 프로그램 제목에 진행자의 이름이 들어간 셈이다. 그는 국내 최초의 아나테이너 중 한 명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후 그는 정계에도 진출하고 사업을 하기도 했으며, 1990년대까지 원로 방송인으로서 브라운관에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이미 일흔을 넘긴 2002년에도 한일 월드컵 라디오 캐스터로 활동하기도 했다.
그런 그에게는 2명의 아들이 있었는데 장남은 가수 임재범, 차남은 배우 손지창이다. 그런데 왜 둘의 성씨가 다르냐면 둘 다 임재범의 혼외자식이기 때문이다. 경악스러운 것은 임재범은 두 번째 아내의 자식이고, 손지창은 세 번째 아내의 자식이었다고 하니 양다리를 넘어 세다리를 걸친 셈이다.
일설에 의하면 그가 간통을 저지른 이유가 본부인과의 관계에서 자식이 없어서라고 하는데, 그래놓고 낳은 자식을 자식 취급하기도 싫었는지 임재범의 경우는 뻔히 친아버지가 멀쩡히 잘 살아있는데도 고아원에서 자라야했고 손지창의 경우는 아예 처음부터 임택근이 아들 대접도 안 해줘서 이모부의 가정에서 자랐다고 한다. 그래서 성씨 역시 이모부의 성을 따 임지창이 아닌 손지창이 되었고 그는 이모부를 자신의 친아버지로 생각하고 있다고 한다.
한편 손지창은 대학교 입학 때, 임택근을 찾아가 1학기 등록금을 요구한 적 있다. 본인이 밝힌 바에 의하면 자신이 경제적으로 어려워서 그런 건 아니고, 최소한 아들 대학 등록금은 내줌으로서 친아버지된 도리를 해달라는 뜻이었다고 한다.
그런데 후안무치하게도 그는 손에 수백만원짜리 시계를 찬 채로 '나도 어렵다'며 거절했다고 한다. 이에 손지창은 격분하여 '다시는 찾아오지 않겠다'고 소리를 질렀고, 사람들이 쳐다보자 당황하면서 등록금을 주겠다고 했다고 한다. 이때 손지창은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입고 다시는 그를 보고 싶지 않았다고 밝혔다.
이후 그의 문란한 사생활이 밝혀지고 많은 질타의 목소리가 쏟아지자, 임택근과 손지창 부자는 방송에서 재회한 후 화해한 뒤 다시금 왕래하며 지내기로 했다는 식으로 전파를 탔으나 손지창에 의하면 '이는 그와 친분의 있는 방송국 간부들의 압박으로 어쩔 수 없이 찍은 것이며, 나는 그 사람을 용서할 생각도 없고 다시 보고 싶지도 않다'며 강하게 반발했다.
한편 임택근은 자신을 향한 비난의 목소리에도 아랑곳 않고 '두 아들을 둬서 행복하다'고 하는 등, 그야말로 뻔뻔함의 극치를 보여주었다. 이에 임재범, 손지창은 각자의 2세를 위해 아버지와의 관계를 완전히 정리했다고 한다.
그 뒤 2008년 임택근은 제주도로 여행을 갔다가 버스에 넘어지는 사고로 반신불수가 되었으나, 당연하게도 두 아들들에게 외면당하면서 충분하지는 않지만 어느정도 죗값을 치뤘다고 할 수 있다. 그 뒤 2020년 1월 11일, 임택근은 지병으로 만 87세의 나이에 숨을 거뒀다. 상주는 임재범이 맡았으며, 손지창-오연수 부부도 빈소를 지켰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