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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빈(宜嬪) 성씨(成氏)가 졸(卒)하였다.
병이 이상하더니, 결국 이 지경에 이르고 말았다
從今國事尤靡托矣
이제부터 국사(=정조 자신)를 의탁할 데가
더욱 없게 되었다 하였다.
-정조실록, 의빈 성씨의 졸기 (1786년 9월 14일)-
임금께서 후사가 늦어 나라의 근심이 크다가
1782년 문효를 얻어 처음으로 경사로워하니라.
그런데 1786년 5월에는 문효가
그해 9월에는 문효의 생모 의빈이 죽는 변을 당하니
슬픔과 걱정으로 귀한 몸을 손상하시어
내 임금을 위하여 두려워하며 애를 태우니라.
-혜경궁 홍씨, 한중록-
昭容成氏 名德任
其爺故洪鳳漢廳直 而因得入惠慶宮
惠慶宮稱其福相 而上亦愛之
許令從所顧屬內庭 旣有娠 惠慶宮恒以語上
曰德任腹漸高大矣 上則微哂而已
소용 성씨의 이름은 덕임이다.
아버지가 홍봉한(혜경궁의 아버지)의
청지기였던 까닭으로
혜경궁 홍씨 처소의 궁녀로 입궁했다.
혜경궁이 그녀가 복스러운 관상이라고 칭찬하였다
그리고 임금(정조) 역시 덕임을 사랑했다.
내정(임금이 사적공간)에 드는 것을 허락했고,
이윽고 임신했다.
혜경궁이 덕임의 임신을 말하자 임금은 조용히 웃었다.
-황윤석, 이재난고-
후궁으로 있으면서
사람이 마땅히 행해야 할 바른 길을 알았으니
어질고 총명하여 성인(聖人)의 다음 가는 사람과 같았다
지체가 높고 귀한 자리에서
몸가짐과 언행을 조심하고 검소함을 지켰다
이에 마땅히 복을 받아야 하는데
문효세자를 잃고 겨우 눈물이 채 마르기도 전에
다시 뱃속의 아이와 함께 잘못 되어
세상을 떠나버렸다.
빈의 운명은 그것도 이것과 마찬가지로
심히 불쌍하고 슬프도다.
이제 장차 빈을 문효세자의 곁에 보내서
장례를 치르는데
이는 빈의 한결같은 소망이다.
무덤이 아주 가까워졌으나 넋은 막힘없이 잘 통하여
끝난 세상을 원통하게 울면서 사별한다.
이로써 죽은 사람과 산 사람이
서로 영원히 헤어지는 한을 위로한다.
而亦哀予之不能忘哀也
너 또한 내가 슬픔을 잊을 수 없음을 슬퍼할 것이다.
그러한가? 그렇지 않은가?
-정조, 어제의빈치제제문-
지체가 낮고 천한 여염(백성의 살림집이 많이 모여 있는 곳)에서
이 같이 빼어난 사람이 태어나서 세자를 낳고
영화로움을 받들어 빈의 자리에 올랐으니
마땅히 우연이 아닌 듯했다
그러나 문효세자의 무덤에 흙이 마르기도 전에
빈이 뱃속의 아이와 함께 급히 세상을 떠났다
빈이 세상을 떠난지 세 달이 되는 경인에
고양군 율목동 임좌(묏자리)의 언덕에 장사를 지냈는데
문효세자의 묘와 백 걸음 정도 떨어져 있다
이는 빈의 바람을 따른 것인데
죽어서도 빈이 나를 알아준다면
바라건대 장차 위로가 될 것이다
내가 빈의 언행을 표본으로 하여금 기록하여
광중(시체가 놓이는 무덤의 구덩이 부분)에 묻고
묘비에 요점만 간단하게 요약해서 썼다
찾아오는 사람이 빈의 현명함을 애석해 하도록 할 따름이다.
사랑하는 빈의 불행한 운명은 위에 적힌 사실과 같다.
-정조, 어제의빈묘표-
길쌈에 민첩하고, 요리를 잘 하고, 다른 일도 가까이 하여
붓글씨도 역시 스스로 범상함을 넘었다
수리 학문을 익히면 능히 알아차리고 모두 이해했고
정신과 식견은 느끼는 곳마다
밝은 지혜가 열려 도를 깨달았다
뿐만 아니라 재능과 기예도
완전히 갖추었을 따름이다
아아, 빈의 장사(葬事)에 반드시
내가 비석에 새기는 글을 지었다
어찌 그 재주와 얼굴을 잊지 아니하겠는가
嬪之葬必用予銘豈爲才色之不忘乎哉
빈은 덕을 실천하고 지키는 마음은
그 무엇과도 섞이지 않고 온전히 드러냈으니
이는 본디 그대로의 것에서
드러났음을 경험 할 수 있다.
이에 마땅히 낳은 어진 아들은
영광된 왕세자가 되고,
공을 세워서 국세가 태산과 반석처럼 편안하고,
경사로이 자식을 길러
왕족이 번창되어야 할 터인데
나라의 운세가 불행하고 신의 이치가 크게 어그러져
갑자기 올해 여름 문효세자가 죽은 변이 있었다.
또 얼마 지나지 않아서
뱃속에 있는 아이와
하루아침에 죽었으니
빈의 흔적은
장차 이 세상에서 아주 사라질 것이다.
이 뛰어난 언행을 내가 글로 적지 않는다면
누가 그것을 전하고 알려서
아주 사라지는 것이 애석하다고 하겠는가
이는 빈에게 한이 되고,
문효세자에게도 한이 될 것이다
-정조, 어제의빈묘지명-
견전. 건륭 51년(1786년) 음력 11월 신미삭 20일 경인,
국왕은 수어사 서유녕을 보내서 글월로 하여금 타이르기를
"나는 글로서 너를 보내며 예장(禮葬)을 맡은 관원들이 도와서
상여가 무사히 무덤에 이르기를 바란다
살아 있는 나와 죽은 네가
끝없이 오랜 세월동안 영원히 이별하니
나는 못 견딜 정도로 근심과 걱정이 많다."
묘소성빈전. 건륭 51년(1786년) 음력 11월 신미삭 20일 경인,
국왕은 우승지 홍인호를 보내서 글월로 타이르기를
"상자를 열어 비단옷을 일렬로 늘어놓으니 흰 휘장이 소용돌이치는구나.
우수수 하고 부는 바람 소리에 슬퍼하며 밤에 술잔을 올렸다
네가 홀연히 죽어서 보고 싶다고 바라여도 볼 수 없구나
혼령이 부드럽고 유연하게 흠향하길 바란다
아, 너는 너의 몸에서
아들이 태어난 것을 두려워했었다."
임광전. 건륭 51년(1786년) 음력 11월 신미삭 20일 경인,
국왕은 우승지 서정수를 보내서 글월로 하여금 타이르기를
"나는 이제 와서
네가 죽었는지 안 죽었는지
확정 짓지 못하고 있다
슬프고 슬픈 사람의 마음은
매여 있지 않은 것 같다."
생신차례. 건륭 치세 모갑 모월 모삭일 모갑,
국왕은 어느 신하를 보내서 의빈 성씨를 유제한다
"어떠한 생각도 못했는데
홀연히 또 빈의 생일이 왔다
어찌하여 오래 살지 못하고
생일에 제사상을 받는가.
빈과 즐겁게 노닐었는데
적막하고 고요해졌다.
생각하건대 빈은
난초와 혜초처럼 향기로운 풀로서
아름다운 자질을 가졌다.
고단하여 몹시 기운이 없는 채로
지난날을 생각하니
내가 무료 할 때 빈을 보고 이야기 하면
서로 더욱 뜻이 맞고 정다웠었다."
생신다례. 건륭 모년 세차 모갑
7월 삭모갑 삭초 8일 모갑,
국왕은 어느 신하를 보내서 의빈 성씨를 유제한다.
아이들의 어머니인 너의 세월은
이 하지에 이르렀으나 틀림없이 죽었으니
감흥이 북받쳐 누를 길이 없구나.
어찌하여 오지 않는 것인가?
이는 네가 문효세자를 그리워하며
슬퍼하는 일 뿐만이 아니구나.
애오라지 마음속 깊이 명확하게 알고 있는가?
알지 못하는가?
기일. 건륭 모년 세차 모갑 9월 모갑삭 14일,
국왕은 어느 신하를 보내서 의빈 성씨를 유제한다.
세월이 바뀌어서 다시 기신일이 되었구나
하늘의 뜻을 따라 정중하게 행동하고
해처럼 빛나는 대의는 기록이 있으나
훌륭한 여인에 대한 기록은 남지 않는다
나의 사사로운 말은
종사에 영원토록 힘입었던 때를
어찌 잊을 수 있겠는가?
-정조, 어제의빈삼년후각제축문-
정조(1752-1800)와 의빈 성씨(1753-1786)
정조가 의빈과 문효세자를 추모하며 같이 묻어준 곳은
효창원으로 일제강점기때 강제로 이장당함
서울 용산에 있는 효창공원이 원래 의빈과 문효세자의 묘였음
이 두 사람을 모티브로 한 소설이 '옷소매 붉은 끝동'
내년 봄에 mbc에서 드라마로 제작된다고 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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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빈(宜嬪) 성씨(成氏)가 졸(卒)하였다.
병이 이상하더니, 결국 이 지경에 이르고 말았다
從今國事尤靡托矣
이제부터 국사(=정조 자신)를 의탁할 데가
더욱 없게 되었다 하였다.
-정조실록, 의빈 성씨의 졸기 (1786년 9월 14일)-
임금께서 후사가 늦어 나라의 근심이 크다가
1782년 문효를 얻어 처음으로 경사로워하니라.
그런데 1786년 5월에는 문효가
그해 9월에는 문효의 생모 의빈이 죽는 변을 당하니
슬픔과 걱정으로 귀한 몸을 손상하시어
내 임금을 위하여 두려워하며 애를 태우니라.
-혜경궁 홍씨, 한중록-
昭容成氏 名德任
其爺故洪鳳漢廳直 而因得入惠慶宮
惠慶宮稱其福相 而上亦愛之
許令從所顧屬內庭 旣有娠 惠慶宮恒以語上
曰德任腹漸高大矣 上則微哂而已
소용 성씨의 이름은 덕임이다.
아버지가 홍봉한(혜경궁의 아버지)의
청지기였던 까닭으로
혜경궁 홍씨 처소의 궁녀로 입궁했다.
혜경궁이 그녀가 복스러운 관상이라고 칭찬하였다
그리고 임금(정조) 역시 덕임을 사랑했다.
내정(임금이 사적공간)에 드는 것을 허락했고,
이윽고 임신했다.
혜경궁이 덕임의 임신을 말하자 임금은 조용히 웃었다.
-황윤석, 이재난고-
후궁으로 있으면서
사람이 마땅히 행해야 할 바른 길을 알았으니
어질고 총명하여 성인(聖人)의 다음 가는 사람과 같았다
지체가 높고 귀한 자리에서
몸가짐과 언행을 조심하고 검소함을 지켰다
이에 마땅히 복을 받아야 하는데
문효세자를 잃고 겨우 눈물이 채 마르기도 전에
다시 뱃속의 아이와 함께 잘못 되어
세상을 떠나버렸다.
빈의 운명은 그것도 이것과 마찬가지로
심히 불쌍하고 슬프도다.
이제 장차 빈을 문효세자의 곁에 보내서
장례를 치르는데
이는 빈의 한결같은 소망이다.
무덤이 아주 가까워졌으나 넋은 막힘없이 잘 통하여
끝난 세상을 원통하게 울면서 사별한다.
이로써 죽은 사람과 산 사람이
서로 영원히 헤어지는 한을 위로한다.
而亦哀予之不能忘哀也
너 또한 내가 슬픔을 잊을 수 없음을 슬퍼할 것이다.
그러한가? 그렇지 않은가?
-정조, 어제의빈치제제문-
지체가 낮고 천한 여염(백성의 살림집이 많이 모여 있는 곳)에서
이 같이 빼어난 사람이 태어나서 세자를 낳고
영화로움을 받들어 빈의 자리에 올랐으니
마땅히 우연이 아닌 듯했다
그러나 문효세자의 무덤에 흙이 마르기도 전에
빈이 뱃속의 아이와 함께 급히 세상을 떠났다
빈이 세상을 떠난지 세 달이 되는 경인에
고양군 율목동 임좌(묏자리)의 언덕에 장사를 지냈는데
문효세자의 묘와 백 걸음 정도 떨어져 있다
이는 빈의 바람을 따른 것인데
죽어서도 빈이 나를 알아준다면
바라건대 장차 위로가 될 것이다
내가 빈의 언행을 표본으로 하여금 기록하여
광중(시체가 놓이는 무덤의 구덩이 부분)에 묻고
묘비에 요점만 간단하게 요약해서 썼다
찾아오는 사람이 빈의 현명함을 애석해 하도록 할 따름이다.
사랑하는 빈의 불행한 운명은 위에 적힌 사실과 같다.
-정조, 어제의빈묘표-
길쌈에 민첩하고, 요리를 잘 하고, 다른 일도 가까이 하여
붓글씨도 역시 스스로 범상함을 넘었다
수리 학문을 익히면 능히 알아차리고 모두 이해했고
정신과 식견은 느끼는 곳마다
밝은 지혜가 열려 도를 깨달았다
뿐만 아니라 재능과 기예도
완전히 갖추었을 따름이다
아아, 빈의 장사(葬事)에 반드시
내가 비석에 새기는 글을 지었다
어찌 그 재주와 얼굴을 잊지 아니하겠는가
嬪之葬必用予銘豈爲才色之不忘乎哉
빈은 덕을 실천하고 지키는 마음은
그 무엇과도 섞이지 않고 온전히 드러냈으니
이는 본디 그대로의 것에서
드러났음을 경험 할 수 있다.
이에 마땅히 낳은 어진 아들은
영광된 왕세자가 되고,
공을 세워서 국세가 태산과 반석처럼 편안하고,
경사로이 자식을 길러
왕족이 번창되어야 할 터인데
나라의 운세가 불행하고 신의 이치가 크게 어그러져
갑자기 올해 여름 문효세자가 죽은 변이 있었다.
또 얼마 지나지 않아서
뱃속에 있는 아이와
하루아침에 죽었으니
빈의 흔적은
장차 이 세상에서 아주 사라질 것이다.
이 뛰어난 언행을 내가 글로 적지 않는다면
누가 그것을 전하고 알려서
아주 사라지는 것이 애석하다고 하겠는가
이는 빈에게 한이 되고,
문효세자에게도 한이 될 것이다
-정조, 어제의빈묘지명-
견전. 건륭 51년(1786년) 음력 11월 신미삭 20일 경인,
국왕은 수어사 서유녕을 보내서 글월로 하여금 타이르기를
"나는 글로서 너를 보내며 예장(禮葬)을 맡은 관원들이 도와서
상여가 무사히 무덤에 이르기를 바란다
살아 있는 나와 죽은 네가
끝없이 오랜 세월동안 영원히 이별하니
나는 못 견딜 정도로 근심과 걱정이 많다."
묘소성빈전. 건륭 51년(1786년) 음력 11월 신미삭 20일 경인,
국왕은 우승지 홍인호를 보내서 글월로 타이르기를
"상자를 열어 비단옷을 일렬로 늘어놓으니 흰 휘장이 소용돌이치는구나.
우수수 하고 부는 바람 소리에 슬퍼하며 밤에 술잔을 올렸다
네가 홀연히 죽어서 보고 싶다고 바라여도 볼 수 없구나
혼령이 부드럽고 유연하게 흠향하길 바란다
아, 너는 너의 몸에서
아들이 태어난 것을 두려워했었다."
임광전. 건륭 51년(1786년) 음력 11월 신미삭 20일 경인,
국왕은 우승지 서정수를 보내서 글월로 하여금 타이르기를
"나는 이제 와서
네가 죽었는지 안 죽었는지
확정 짓지 못하고 있다
슬프고 슬픈 사람의 마음은
매여 있지 않은 것 같다."
생신차례. 건륭 치세 모갑 모월 모삭일 모갑,
국왕은 어느 신하를 보내서 의빈 성씨를 유제한다
"어떠한 생각도 못했는데
홀연히 또 빈의 생일이 왔다
어찌하여 오래 살지 못하고
생일에 제사상을 받는가.
빈과 즐겁게 노닐었는데
적막하고 고요해졌다.
생각하건대 빈은
난초와 혜초처럼 향기로운 풀로서
아름다운 자질을 가졌다.
고단하여 몹시 기운이 없는 채로
지난날을 생각하니
내가 무료 할 때 빈을 보고 이야기 하면
서로 더욱 뜻이 맞고 정다웠었다."
생신다례. 건륭 모년 세차 모갑
7월 삭모갑 삭초 8일 모갑,
국왕은 어느 신하를 보내서 의빈 성씨를 유제한다.
아이들의 어머니인 너의 세월은
이 하지에 이르렀으나 틀림없이 죽었으니
감흥이 북받쳐 누를 길이 없구나.
어찌하여 오지 않는 것인가?
이는 네가 문효세자를 그리워하며
슬퍼하는 일 뿐만이 아니구나.
애오라지 마음속 깊이 명확하게 알고 있는가?
알지 못하는가?
기일. 건륭 모년 세차 모갑 9월 모갑삭 14일,
국왕은 어느 신하를 보내서 의빈 성씨를 유제한다.
세월이 바뀌어서 다시 기신일이 되었구나
하늘의 뜻을 따라 정중하게 행동하고
해처럼 빛나는 대의는 기록이 있으나
훌륭한 여인에 대한 기록은 남지 않는다
나의 사사로운 말은
종사에 영원토록 힘입었던 때를
어찌 잊을 수 있겠는가?
-정조, 어제의빈삼년후각제축문-
정조(1752-1800)와 의빈 성씨(1753-1786)
정조가 의빈과 문효세자를 추모하며 같이 묻어준 곳은
효창원으로 일제강점기때 강제로 이장당함
서울 용산에 있는 효창공원이 원래 의빈과 문효세자의 묘였음
이 두 사람을 모티브로 한 소설이 '옷소매 붉은 끝동'
내년 봄에 mbc에서 드라마로 제작된다고 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