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비,관우,장비가 복사꽃 나무 아래에서 의형제 도원결의를 맺음
→ 도원결의,의형제를 맺었다는 기록은 없음 하지만 사실상 의형제나 다름없을 정도로 가까웠던 관계였던건 사실
장비가 독우를 매질
→ 장비가 아니라 유비가 팼음
독우(督郵-군郡의 감찰관)가 공적인 일로 (안희)현에 도착했다. 유비가 그를 만나기를 청했으나 거절당하자 곧바로 들어가 독우를 묶고 장(杖) 2백 대를 때렸다. 그리고 인끈을 풀어 그의 목에 걸고는 그를 말뚝(馬枊)에 묶어두고 관직을 버린 채 달아났다.
- 삼국지 정사 촉서 선주(유비)전
관우자 서주에서 차주를 참하다
→ 유비가 죽임
유비가 하비를 점거하고, 주령 등은 되돌아왔다. 이에 유비는 서주자사 차주(車冑)를 죽이고, 관우를 남겨 하비를 지키게 하고 자신은 소패로 돌아왔다.
- 삼국지 정사 촉서 선주(유비)전
관우,장비가 유대와 왕충을 사로잡고 유비는 이 둘을 극진히 대접
→ 유비가 왕충,유대를 사로잡은거고 사로잡은 후 대접은커녕 능욕하고 조조를 도발
- 삼국지 정사 위서 무제기(조조)전
관우가 고성에서 채양을 참하다
→ 유비가 죽임 고성에서 죽인것도 아님
조조가 조인을 보내 군을 이끌고 유비를 공격하자 유비는 원소군에게로 되돌아갔다. 은밀히 원소를 떠나고자 하여, 원소를 설득해 남쪽으로 형주목 유표(劉表)와 연결하도록 했다. 원소는 유비를 보내 본래 있던 군사들을 이끌고 다시 여남에 이르도록 하니, 적(賊) 공도(龔都) 등과 합쳐 그 무리가 수천 명에 이르렀다. 조조가 채양(蔡陽)을 보내 이를 공격했으나 유비에게 죽임을 당했다.
- 삼국지 촉서 선주(유비)전
제갈량의 화공 계책으로 박망파에서 하후돈 격파
→ 유비가 한일 이때 제갈량은 임관 이전
유표가 유비에게 하후돈(夏侯惇), 우금(于禁) 등을 박망(博望-남양군 박망현)에서 막게 했다. 얼마 뒤, 유비는 복병(伏兵)을 두고 하루아침에 스스로 둔영을 불사르고 거짓으로 달아났는데, 하후돈 등이 이를 추격하다 복병에 의해 격파되었다.
- 삼국지 촉서 선주(유비)전
적벽대전에서 오군의 활약이 압도적
→ 주유와 유비가 함께 힘을 합쳐 적벽대전 승리
주유와 정보는 좌우독이 되어 각각 1만 명을 인솔하여 유비와 함께 진격해 적벽에서 맞부딪쳐 조조의 군대를 크게 격파시켰다. 조조는 남아 있는 배에 불을 지르고 군대를 이끌고 물러났다. 사졸들은 굶주리고 역병이 유행하였으므로 죽은 자가 대부분이었다. 유비와 주유 등은 또 남군까지 추격했다. 조조는 그대로 북쪽으로 돌아가고, 조인과 서황에게는 강릉을, 악진에게는 양양을 지키도록 했다.
- 삼국지 정사 오주(손권)전
손권은 주유(周瑜), 정보(程普)등 수군(水軍) 수만을 보내 유비와 힘을 합해, (주24) 조조와 적벽(赤壁)에서 싸워 이를 대파하고 그 주선(舟船-배)을 불태웠다.
- 삼국지 정사 선주(유비)전
관우가 화용도에서 조조를 놓침
→ 유비가 화용도로 추격했으나 조조는 이미 유비를 비웃으며 도망간 뒤
유비가 서촉정벌과정에서 정치질하다 좆망한 후, 형주에서 날라온 제갈량의 캐리로 정벌 성공
→ 제갈량 관여 X, 낙성에서 쪼매 고전한거 빼면, 유비가 직접 서촉장수들 모두 관광보내고 원사이드하게 서촉 접수함
유장은 다시 이엄을 보내 면죽의 제군을 지휘하게 했으나, 이엄은 무리들을 이끌고 유비에게 항복했다. 유비의 군이 더욱 강성해지자 제장들을 나누어 보내 속현들을 평정했다. 제갈량, 장비, 조운 등은 군사를 이끌고 강을 거슬러 올라와 백제(白帝), 강주(江州), 강양(江陽)을 평정하고, 오직 관우만이 남아 형주를 진수했다. 유비가 진군하여 낙(雒-광한군 낙현)을 포위했다. 이때 유장의 아들 유순(劉循)이 성을 수비했는데 공격을 받고 근 1년이 지났다.
건안 19년(214년) 여름, 낙성(雒城) 이 격파되었다.
진군하여 성도(成都-촉군 성도현)를 포위한 지 수십 일 만에 유장이 성을 나와 항복했다.
- 삼국지 촉서 선주(유비)전
212년 유비가 가맹(葭萌)관에 이르러, 병사를 돌려 촉으로 향하니, 가는 곳마다 모두 이겼다.
- 삼국지 촉서 유장전
법정의 전략으로 황충이 하후연을 죽임
→ 유비의 전략이고 유비가 하후연 죽임
한중에서 제갈량의 맹활약으로 조조군 격파
→ 유비가 격파함 이쯤에서면 알수 있듯이 제갈량은 유비 살아생전에 군권에 관여 안함
- 삼국지 촉서 선주(유비)전
삼국지 정사의 저자인 진수의 유비 평가
유비는 홍의(弘毅-포부가 크고 굳셈), 관후(寬厚-너그럽고 후함)하고 지인(知人-사람을 알아 봄), 대사(待士-선비를 잘 대우함)하니 한 고조(유방)의 풍도와 영웅의 그릇을 갖추었던 것 같다.
나라를 들어 제갈량에게 탁고했으나 심신(心神-마음)에 두 갈래가 없었으니 실로 군신(君臣)의 지공(至公-지극히 공정함)함은 고금의 성궤(盛軌-아름다운 본보기)다. 기권(機權-기지와 임기응변), 간략(幹略-재능과 모략)은 위무제(조조)에는 미치지 못해 이 때문에 그 영토는 협소했다.
그러나 꺾일지언정 굽히지 않고 끝내 남의 아래에 있지 않았으니, 저들의 기량으로 필시 자신을 용납하지 못하리라 헤아리고, 오로지 이익만을 다투지 않고 해로움을 피하려 했다 말할 수 있겠다.
- 유방이 중국인들에게 당대 사람들에게 어떤 존재였는지를, 그리고 진수에게는 유비가 적국의 군주였다는 것을 생각하면 최대의 극찬
- 조조보다는 아래로 평가하지만 진수가 유일하게 조조랑 비교하는 인물
알다시피 진수는 진나라 사람이었기에 진나라에게 선양한 위를 정통으로 쳤으며 조조를 동시대 신성불가침 갓 으로 평가함
- 많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인덕만 넘치고 능력은 사람들한테 맡기는 바보가 아니라 인덕, 무력, 군략, 책략, 정치, 통솔, 매력 모두 만땅찍은 사기캐였음.
(제갈량은 내치와 행정에 능한 정치가에 가까웠고 연의에 서서나 제갈량의 계책이라고 나온 건 대부분이 유비의 계책. 제갈량은 유비 사후부터 군사에 적극적으로 참여함)
- 특히 사람보는 눈은 타의추종을 불허. 이 부분은 제갈량도 떡바름.
- 연의의 가장 큰 피해자가 유비라는 말도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