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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은 이대근 주연 영화
1920~30년대 일제강점기에 존재한 희대의 사이비 종교 집단이다. 교주의 지시에 따라 300여 건이 넘는 살인사건이 자행되었다. 경기도 가평에서 창립되었다.
동학에서 파생되었으며 전신은 백도교
백도교 교주 전정운 사망 후 아들 3명간에 다툼 후 전용해는 백백교를 만든다
전정운은 첩이 4명이었는 데 이 4명을 죽여 암매장하는 등 여러범죄가 드러나자 다른 아들 둘과 잔당들이 박살나지만 도망쳤던 아들 전용해 는 상황이 진정된 후 돌아와 백백교 교주가 된다 전용해
전용해는 학식이 없는 무지한 인간이었지만, 사람의 심리를 교묘하게 이용하여 마음을 끌어들이는 재주가 있었고 그는 자신을 '신의 아들'이라 자칭하며, 말 그대로 혹세무민했다. 불로장생과 부귀영화를 미끼로 신도들에게 과도한 헌금을 요구하는 등 사기행각을 벌였다.
불로장생과 부귀영화를 미끼로 신도들에게 과도한 헌금을 요구하는 등 사기행각을 벌였다.
또한 자신의 부하들을 보내 전국 각지 신도들의 딸이 예쁘면 데리고 와 노리개삼고 싫증이 나면 죽여버렸다
한 유곤룡이란 청년에 자신의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전재산과 여동생을 다 전용해에게 바친 것에 분개해 교주와 면담을 요청하나 거절당하자
일본경찰이 알게 되면서 백백교의 실상이 백일하에 드러난다.
일본경찰들은 백백교 비밀장소에서 시체 346구를 발굴
구속 100여 명 살인사건 300여 건 3년이 걸려 1940년에 첫 공판이 열림
재개된 공판에는 무수히 많은 방청객들이 몰려들었고, 연일 언론에서 백백교 관련 기사들이 쏟아져 나왔다. 하지만 당시 기사의 내용을 살펴보면 살인 행각보다는 교주 전용해의 무수히 많았던 첩들과 음란한 행위와 관련된 가십기사가 대부분이었다. 하긴 첩이 60여 명이었으니... 1941년 1월에 마무리된 백백교 사건의 선고 공판 결과 혼자서 170명을 죽인 김서진, 167명을 죽인 이경득, 127명을 죽인 문봉조 등 간부급 살인마들에게 사형이 선고되고 나머지 십수 명에게는 징역형이 선고되면서 희대의 살인마 사교 사건은 막을 내렸다. 다만, 위의 간부급 살인마들에게 진짜 사형이 집행되었다는 기록은 없다. 곧 훨씬 큰 일이 벌어졌기 때문에 이런 놈들에 대한 관심이 없어졌기 때문이다.[13] 징역형을 받은 다른 간부들은 8.15 해방과 함께 1945년 모두 출옥하여 아래에 언급된 잔존세력을 만들거나 다른 사이비 종교에 관여한 듯하다.
그 이후 한국 사이비 종교사에서 가장 손꼽히는 사건이 되었다. 사이비 종교 관련 사건이 나올 때마다 상당히 자주 언급되며 다시 조명받곤 한다.
ㅊㅊㅇㅋ
사진은 이대근 주연 영화
1920~30년대 일제강점기에 존재한 희대의 사이비 종교 집단이다. 교주의 지시에 따라 300여 건이 넘는 살인사건이 자행되었다. 경기도 가평에서 창립되었다.
동학에서 파생되었으며 전신은 백도교
백도교 교주 전정운 사망 후 아들 3명간에 다툼 후 전용해는 백백교를 만든다
전정운은 첩이 4명이었는 데 이 4명을 죽여 암매장하는 등 여러범죄가 드러나자 다른 아들 둘과 잔당들이 박살나지만 도망쳤던 아들 전용해 는 상황이 진정된 후 돌아와 백백교 교주가 된다 전용해
전용해는 학식이 없는 무지한 인간이었지만, 사람의 심리를 교묘하게 이용하여 마음을 끌어들이는 재주가 있었고 그는 자신을 '신의 아들'이라 자칭하며, 말 그대로 혹세무민했다. 불로장생과 부귀영화를 미끼로 신도들에게 과도한 헌금을 요구하는 등 사기행각을 벌였다.
불로장생과 부귀영화를 미끼로 신도들에게 과도한 헌금을 요구하는 등 사기행각을 벌였다.
또한 자신의 부하들을 보내 전국 각지 신도들의 딸이 예쁘면 데리고 와 노리개삼고 싫증이 나면 죽여버렸다
한 유곤룡이란 청년에 자신의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전재산과 여동생을 다 전용해에게 바친 것에 분개해 교주와 면담을 요청하나 거절당하자
일본경찰이 알게 되면서 백백교의 실상이 백일하에 드러난다.
일본경찰들은 백백교 비밀장소에서 시체 346구를 발굴
구속 100여 명 살인사건 300여 건 3년이 걸려 1940년에 첫 공판이 열림
재개된 공판에는 무수히 많은 방청객들이 몰려들었고, 연일 언론에서 백백교 관련 기사들이 쏟아져 나왔다. 하지만 당시 기사의 내용을 살펴보면 살인 행각보다는 교주 전용해의 무수히 많았던 첩들과 음란한 행위와 관련된 가십기사가 대부분이었다. 하긴 첩이 60여 명이었으니... 1941년 1월에 마무리된 백백교 사건의 선고 공판 결과 혼자서 170명을 죽인 김서진, 167명을 죽인 이경득, 127명을 죽인 문봉조 등 간부급 살인마들에게 사형이 선고되고 나머지 십수 명에게는 징역형이 선고되면서 희대의 살인마 사교 사건은 막을 내렸다. 다만, 위의 간부급 살인마들에게 진짜 사형이 집행되었다는 기록은 없다. 곧 훨씬 큰 일이 벌어졌기 때문에 이런 놈들에 대한 관심이 없어졌기 때문이다.[13] 징역형을 받은 다른 간부들은 8.15 해방과 함께 1945년 모두 출옥하여 아래에 언급된 잔존세력을 만들거나 다른 사이비 종교에 관여한 듯하다.
그 이후 한국 사이비 종교사에서 가장 손꼽히는 사건이 되었다. 사이비 종교 관련 사건이 나올 때마다 상당히 자주 언급되며 다시 조명받곤 한다.
ㅊㅊㅇ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