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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나단의 부친 욤비 토나에 관한 정보
이름 | 욤비 토나 (Yiombi Patrick Thona) |
생년월일 | |
국적 | |
망명년도 | 2002년 |
직업 | 광주대학교 조교수 |
종교 | |
가족 | 아내, 슬하 2남 4녀 |
1. 개요[편집]
2. 상세[편집]
한국에서는 흔히 '콩고 왕자'로 알려지기도 했는데 정확히는 콩고의 약 200여개 부족 중 하나인 키토나(Kitona) 부족의 왕자이다. 욤비 토나가 한국에 망명한 뒤에는 그의 형이 그 부족의 왕으로 재위하고 있다고 한다. 샘 오취리의 경우에도 그렇고 많은 한국 사람들은 "콩고(혹은 가나)는 대통령제 국가 아닌가?"라고 생각하지만, 이는 아프리카의 뿌리깊은 부족 문화를 잘 몰라서 비롯된 오해이다. 국경선과 행정조직을 이루는 국가체제와 별도로 각 민족(혹은 부족)이 넓게 집단을 이루고 있는 경우가 많으며, 각 나라의 행정부는 이들 부족들 출신의 정치인이나 관료들이 참여하여 근대국가체제를 별도로 만들어놓은 듯한 모양새이다. 심지어 샘 오취리의 아샨티족은 가나 외에도 다른 나라에까지 걸쳐서 살고 있다. 한국으로 치면 경주 이씨가 21세기 현재에도 영향력을 갖고 존속하는 셈. 이는 아프리카의 식민지 체제에서 식민지간 경계를 각 부족들의 전통적인 영역과 상관없이 유럽인들이 마음대로 구획해놓았다가 그 식민지들이 차례로 주권국으로 독립하면서 벌어진 현상이기도 하다. 아프리카에서 빈번하게 벌어지는 내전의 원인 중 하나도 여기에서 비롯한다.
욤비 토나의 아버지인 가르시아 토나는 키토나 부족의 족장, 즉 부족국가의 왕이자 콩고의 대형 의료재단 이사장이었고 욤비 토나 본인은 대학교를 나와서 경제학과 교수로 재직했다. 이후 그는 콩고 민주공화국의 비밀정보국에서 일하였는데, 이 때 르완다에 국가 정보를 유출하고 국가 농토를 불법 매각하려는 움직임을 포착해서 이를 폭로하려 했다. 그러나 정부에게 발각당해서 쫒겨다니다가 콩고 전쟁으로 인한 혼란을 틈타서 일반 난민으로 위장해 콩고를 탈출하였고, 이후 2002년 대한민국에 망명하였다.
2002년 망명 후 5년동안 한국에서 개사료를 만드는 공장에서 불법적으로 노동을 하거나 인천의 한 병원에서 잡다한 일을 하는 등으로 생계를 유지했다. 2008년에는 정부의 감시를 피해 정글에 숨어살던 가족들을 한국으로 데려오는데 성공했지만 집 보증금 사기를 당하기도 하는 등 어려운 상황에 있다가 2013년 KBS 인간극장에 출연하면서 가족의 사연이 알려졌고 이 방송을 본 광주대학교 총장의 제의로 대학에서 강의를 하게 되면서 생활도 안정되었다.
2017년까지 광주대학교 창조융합대학 자율·융복합전공학부 조교수로 재직하고 있었으며(전공: 인권, 다문화, NGO 석사)[2] 현재는 아시아 태평양 난민인권 네트워크(Asia pacific Refugee Rights Network)에서 의장을 맡는 등 국제 망명객 및 난민들의 인권 보장을 위한 사회 운동가로도 활동하고 있다.
과거 인간극장에 출연했을 때는 좁고 헌 빌라에 살고 있었는데, 현재는 광주대학교의 지원으로 광주의 아파트에서 살게 되었으며 경제 상황도 나아졌다.
욤비 토나의 아버지인 가르시아 토나는 키토나 부족의 족장, 즉 부족국가의 왕이자 콩고의 대형 의료재단 이사장이었고 욤비 토나 본인은 대학교를 나와서 경제학과 교수로 재직했다. 이후 그는 콩고 민주공화국의 비밀정보국에서 일하였는데, 이 때 르완다에 국가 정보를 유출하고 국가 농토를 불법 매각하려는 움직임을 포착해서 이를 폭로하려 했다. 그러나 정부에게 발각당해서 쫒겨다니다가 콩고 전쟁으로 인한 혼란을 틈타서 일반 난민으로 위장해 콩고를 탈출하였고, 이후 2002년 대한민국에 망명하였다.
2002년 망명 후 5년동안 한국에서 개사료를 만드는 공장에서 불법적으로 노동을 하거나 인천의 한 병원에서 잡다한 일을 하는 등으로 생계를 유지했다. 2008년에는 정부의 감시를 피해 정글에 숨어살던 가족들을 한국으로 데려오는데 성공했지만 집 보증금 사기를 당하기도 하는 등 어려운 상황에 있다가 2013년 KBS 인간극장에 출연하면서 가족의 사연이 알려졌고 이 방송을 본 광주대학교 총장의 제의로 대학에서 강의를 하게 되면서 생활도 안정되었다.
2017년까지 광주대학교 창조융합대학 자율·융복합전공학부 조교수로 재직하고 있었으며(전공: 인권, 다문화, NGO 석사)[2] 현재는 아시아 태평양 난민인권 네트워크(Asia pacific Refugee Rights Network)에서 의장을 맡는 등 국제 망명객 및 난민들의 인권 보장을 위한 사회 운동가로도 활동하고 있다.
과거 인간극장에 출연했을 때는 좁고 헌 빌라에 살고 있었는데, 현재는 광주대학교의 지원으로 광주의 아파트에서 살게 되었으며 경제 상황도 나아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