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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슈 사실 빨리 서른 살이 되어보고도 싶었다. 서른쯤이면 뭔가 되어 있을 줄 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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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8.24 01: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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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 박정민의 ‘언희(言喜)’ <서른>


생일이 빠르니 생일을 제외한 모든 것이 또래들보다 느렸다. 이제 친구들은 연봉이 얼마라느니, 예물이니 예단이니, 건배 제의는 이렇게 하는 게 좋다느니 하는, 알 수 없는 말들을 해댄다. 내가 거기서 “소녀시대가 좋은데 요즘 여자친구가 좋아져서 큰일이다. 태연이한테 미안해 죽겠다. 기분 전환 겸 돈가스나 먹으러 가자” 같은 말을 하고 앉아 있으면 친구들은 말없이 내 어깨를 토닥여준다. 아직 네 나이엔 그럴 수 있다고 한다. 한창 여자친구 좋아할 나이라고, 사뭇 진지한 표정으로 돈가스를 사준다. 기분이 좋아져서 여자친구의 〈오늘부터 우리는〉을 듣고 있자니 친구 놈이 트와이스 노래를 들려주며 얘네도 한번 좋아해보라고 한다. 흔들린다. 쯔위가 그렇게 예쁘더라.



서른이 되어버렸다.

지나가는 꼬마에게 “야, 너 좀 귀엽다?”라고 하면 “엄마, 이 아저씨가 날 유혹해”라며 엄마에게 이른다. “난 아저씨가 아니야”라고 하면 아이의 엄마가 “삼촌이 너 귀여워서 그러는 거야”라고 일러준다. 순간 욱해서 아이의 엄마에게 따지려고 시선을 돌리니 나와 또래로 보이는 건 기분 탓일 테다. 그런 또래의 친구들이 하나둘씩 장가를 가고 자신과 닮은 아이를 낳고 각종 SNS에 애 사진만 올린다. 이 애가 훗날에 자기 사진을 무단 도용 한 부모의 애스타그램을 발견하곤, 복수의 아빠스타그램 계정을 만들어 노인이 된 힘없는 아빠의 사진을 마구 올려댈 것이다. 그 정도로 여과 없이 참 많이도 올린다. 부러워서 그러는 거냐고? 그래, 어쩔 것이냐.

아버지는 서른 살에 나를 낳았다. 아니지. 낳은 건 엄마가 스물일곱에 낳았지. 아무튼 나의 아버지는 서른 살에 나를 태어나게 하시고 열심히 일을 하셨다. 어디서 이런 놈이 나와버렸나 싶어, 말단 공무원부터 시작해서 열심히 차곡차곡 돈도 모으시고 집도 얻으시고 꽤 괜찮은 가정을 이루셨다. 야탑동에서 제일가는 불효자 하나와, 효녀 하나를 번듯하게 키워놓으셨다. 서른 살부터 모은 돈으로 아들내미의 학원비며, 급식비며, 교재비며 다 대주셨다. 아들은 그런 아버지의 기대에 부응하는 척하더니 어느 날 갑자기 연기를 하겠다며 아버지의 뒤통수를 사정없이 갈겼다. (친구들은 언젠가 야탑동 어딘가에 내 얼굴을 딴 불효자상을 만들어줄 거라고 한다. 분명 만들어줄 것 같아 두렵다.) 예순 살의 아버지는 아직도 일을 하신다. 모르긴 몰라도 서른 살의 아들내미가 아직도 제 앞가림을 못하는 탓이 가장 클 것이다.



그런 서른 살이 되어버린 것이다.

나의 서른은 친구들의 그것, 아버지의 그것과는 많이 다른 것 같다. 뒤처져 있다고도 느낀다. 양복을 입을 일도 거의 없고, 통장은 가볍고, 아직도 힙합 정신이며, 사회성도 떨어진다. 스물 때도 그랬는데 서른 때도 그렇다. 참 뚝심이 있다. 뚝심 유원지 가서 놀아야겠다. 이런 아재 개그를 치면 “우리 부장님이 정말 좋아하시겠다” 하면서 메모장에 적는 친구들보다 난 좀 ‘느리다’는 말이다.

사실 빨리 서른 살이 되어보고도 싶었다. 서른쯤이면 뭔가 되어 있을 줄 알았다. 열심히 산다고도 살았다. 소신도 있고 신념도 있고, 그것들을 크게 배신한 적도 없었다. 유혹이 있을 때마다 넘어가지 않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던 것도 같다. 그런 고집들이 나 자신을 점점 땅속으로 꺼지게 하는 것 같다는 생각도 하지만, 아직까지 그것들을 굽힐 의사는 없다. 그렇게 서른이 되었고, 소신과 신념만 남은 다 큰 어른아이 하나가 덩그러니 서 있다.

분명 스무 살에 예상했던 서른 살의 내 모습은 아니다. 부끄럽다. 내가 예상했던 서른을 나 대신 사는 저 앞의 녀석들이 부럽기도 하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난 생일이 빨라서 생일을 제외한 모든 것들이 평생 동안 또래보다 느렸던 것을 말이다. 단지 생일이 빨라서는 아니겠지만 이런 위안을 두고 또 앞으로 저벅저벅 가면 그만이다. 어딘가에서는 저러다 말겠거니, 쟤는 저기까지라느니, 기대도 안 했다느니 하는 의견들이 산발적으로 제시되어 있을 테지만 아직까지는 내 귀에 들어오지 않았으니 조금 더 참아보기로 한다.

어제의 스물아홉이 오늘 서른이 되어버린 것이 뭐 대수겠는가. 그저 책임감이 조금 더 생겼다는 것과 이제는 좀 더 열심히 해볼 수 있겠다는 결심 정도가 달라진 점이라면 달라진 점이랄까. 닥쳐보니 별 차이가 없는 것도 같다. 20대에 예상했던 서른과는 조금 다른 모습이라는 것뿐이고, 이렇게 되어버린 마당에 까짓것 마흔을 기약하면 그만이다. 그리고 우리끼리 하는 말이지만 나이 서른에 떵떵거리고 살면 뭐하는가. 질투나 사고 간혹 싸가지 없다는 말이나 들을 테지. 우린 나이 먹어서 떵떵거리며 살면 된다. 그다음에 베풀며 살면서 멋있게 나이 먹었다는 말 들으면서 살면 되는거다. 그리고 어디 가서 내가 이런 말 했다고 하지 마시길 바란다. 어린 놈이 싸가지 없다는 소리 들을 것 같으니까 말이다.

‘도광양회’라는 말이 있다. 자신의 재능이나 명성을 드러내지 않고 참고 기다린다는 뜻의 사자성어다. (서른이 되니 사자성어 같은 걸 끼얹기도 한다.) 본인이야 아직 재능이 차오르지 않아 불가피하게 드러내지 못하지만 재능이 가득한 서른들, 혹은 서른 즈음의 사람들이라면 조금 더 자신을 믿고 기다려봤으면 좋겠다. 나 같은 것도 그러고 있으니 말이다.

가만있어 보자. 내가 최측근 인물에게 메시지를 한번 보내보겠다.


“형의 서른은 어떠셨나요?”

“어두웠지.”

그는 지금 아주 잘나가는 배우 중의 한 사람이다. 마흔넷에 수많은 작품에서 그를 찾았고, 마흔다섯엔 분명 더 멋진 배우가 될 것이라고 많은 사람들이 이야기한다. 훗날 마흔이 되었을 때, 내가 예상한 마흔의 모습이 아니더라도 난 그다음을 또 기약할 수 있을 것만 같다.

뭐, 그대들을 위로하는 말도, 용기를 가지라는 말도 아니다. 그저 나는 그렇다는 말이다.

나 같은 것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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