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이름이 별로 마음에 들지 않는다. 바를 정에 백성 민을 쓰는데 ‘바른 백성’이라는 약간 못 노는 애 느낌 나는 내 이름이 싫다. 박 뒤에 정이 들어가니 발음이 ‘쩡’이 되는 것도 별로다. 심지어 흔한 성에 흔한 이름이라서 동명이인이 많아 뭔가 개성까지 없어 보인다. SNS에 ‘박정민’을 쳐서는 절대로 내 계정을 찾아낼 수 없다. 그 정도로 동명이인이 많다. 그래서 활동명을 부모님 이름으로 바꿔볼까도 생각한 적이 있다. 하지만 아빠 이름 ‘박병관’은 너무 공무원 느낌이 강하고 엄마 이름 ‘정재영’은 이미 정재영 선배님과 동명인 관계로 결국 그 생각 또한 접은 지 오래다. 그래도 부모님이 지어주신 이름인데 내 이름으로 활동하는 게 의미가 있겠거니 했다. 그런데 알고 보니 큰엄마의 아버지가 지어주신 이름이라는 건 함정이다. 심지어 살면서 한 번도 뵙지 못한 분이다.
2.
이름은 한 사람의 처음이자 관계의 물꼬인 셈이고, “안녕하세요. 박정민이라고 합니다.”로 시작되는 것이 보통의 처음이라고 볼 수 있겠다.
“안녕하세요. 저는 비형입니다.” 혹은, “처음 뵙겠습니다. 저는 하루에 이빨을 두 번 닦습니다.”라고 하지는 않는다는 거다. (그만큼 그 사람의 이미지를 좌우하고 기억되는 것이 이름인데 못 노는 애 느낌이라니, 나는 틀렸다.) 그렇게 서로에게 이름을 묻고, 알게 되고, 그 순간 몇 글자의 이름은 첫 이미지가 된다. 그리고 또 그렇게 관계를 시작한다.
‘떠나보내는 것이 힘들어 다시 너의 이름을 묻고 싶다.’
영화 〈캐롤〉을 보고나서 집에 와 멍하니 수첩에 문장 하나를 적었다. 영화에는 두 여인이 카페에 앉아 서로의 이름을 알면서도 조심스레 재차 묻는 장면이 나오는데, 이미 알고 있는 이름을 조심스럽게 물어보는 행위 하나로 영화는 이 둘의 본격적인 시작을 슬쩍 비춰준다. 그들은 그렇게 서로를 캐롤과 테렌스로 기억하고, 그렇게 사랑하고, 그렇게 헤어지고, 또다시 재회한다. 재회하는 그 순간, 서로가 다시 이름을 물었더라면 그들은 다시 시작할 수도 있지 않았을까 하는 애처로운 마음에 저 문장을 적었는지도 모르겠다.
살면서 스쳐 보낸 수많은 인연들. 그 인연들의 이름을 연습장에 빼곡히 적어보다가 이내 포기해버렸다. 참 많은 이름과 만나고 헤어진 모양이었다. 같은 반 친구, 학원 친구, 버디버디 분당팸 ‘(주)쥰乃이뽀데졍’ 친구들 이름만 외워도 사는 데 아무 지장이 없던 학창 시절에 반해, 전 여친과 전 여친의 친구와 전 여친의 친구의 남친과 그 남친의 군대 후임이자 내 군대 선임이었던 그 새끼까지. 어지간히 많은 이름들이 더덕더덕 붙어 있는 현재의 내 삶이었다. 문득 하나하나 기억하고 싶지만 어쩔 수 없이 잊어버린 그 이름들에 미안해졌다. 또한 어쩔 수 없이 날 잊어버린 그들에게도 미안해졌다. 잊지 않게 할 수도 있었을 텐데, 그렇게 잊게 만들어 미안해졌다.
유치원 때 내게 눈 까뒤집기를 알려줬던 승호. 승호는 날 기억 못 하겠지만, 나는 승호 덕분에 아직도 눈을 잘 까뒤집는다. 어느 순간 그 승호가 생각나 화장실에서 세수를 하다가 눈물을 흘린 적도 있었다. 아마 그 녀석은 날 기억하지 못할 것이다. 그 친구에 비해 난 그에게 해준 것이 없었으니까. 승호의 노트에는 내 이름이 없을 것이라는 사실에 조금 슬퍼졌다. 그래도 언젠가 승호를 만나게 되면 “승호야 오랜만이다”라고 그 친구의 이름을 불러주고 싶다.
1-1.
이름에 대한 콤플렉스도 아마 그런 차원에서 생겼던 것 같다. 누군가가 이름을 불러주길 바라는데, 특이하지도 않고 발음하기도 어려운 내 이름이 그래서 마음에 들지 않았던 것도 같다. 하지만 그렇게 30년을 지냈고 앞으로 몇 십 년을 더 같이 지내야 하는 이름이다. 정도 많이 들었고, 또 갑자기 이름을 ‘박격포’로 바꾼다고 한들, 이제 와선 의미도 없고 헷갈리기만 할 뿐이다. 아, ‘박격포’는 실제로 30년 전 ‘박정민’과 각축을 벌였던 이름이다. 참 다행이다. 전혀 다른 인생을 살았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박격포’였으면 공무원 느낌이고 뭐고 그냥 아버지 성함인 ‘박병관’으로 활동해야 했을 거다.
“고품격 음악방송 라디오 스타, 오늘의 게스트는 박격포씨입니다. 어서 오세요.”
“안녕하세요. 박격폽니다.”
“아이, 이름이 그게 무어~야. 아이 격포가 뭐냐고 격포가.”
“구라도 이상함.”
생각만 해도 아찔하다.
3.
사람들이 한 사람을 이르는 것이라 하여 ‘이름’이란다. 참 많은 이름들이 있다. 가급적 많이 부르려고 한다.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지 않아도 좋다. 서로 기분만 좋으면 그만이다. 서로 이름을 안다는 것이 어찌 보면 참 큰 의미라는 생각이 드는 요즘이다. 생각지도 못한 사람이 내게 와서 “정민아”라고 했을 때, 그 감동은 이루 말할 수 없다. 그러니까, 부르면 닳는 것도 아니고 많이 부르면서 살자는 말이다.
4.
“저는 박정민입니다. 이름이 뭐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