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교토 코무덤과 조선인 희생자

교토의 코무덤. 일본 교토 히가시야마구 차야마치에 있는 무덤이다.
당초는 코무덤이라 불렸지만 일본인 스스로 너무 야만스럽다하여 일본 내에서는 귀무덤으로 불리고 있다.
무덤 위에는 ‘고린토’라 불리는 석탑이 세워져 있다. 1898년 히데요시 사망 300주년을 맞아 일본 명치정부는 대대적으로 ‘풍공(豊公)300년제’를 거행했다. 코무덤 앞에는 일본 우익인사들이 조선정벌의 의지를 담아 만든 비가 세워져 있다.
지금으로부터 421년 전인 1597년 9월 28일, 토요토미 히데요시는 일본 교토에 무덤 하나를 세웠다.
도요토미의 폭악한 성정을 그대로 드러낸 무덤이었다. 무덤에는 조선에서 보내진 코 10만 여 개가 묻혔다. 조선군사와 백성들의 시체에서 잘라낸 코들이었다. 그 코들 중 일부는 살아있는 사람들의 얼굴에서 베어낸 것도 포함돼 있었다. 여자와 어린아이들 것도 부지기수였다.
도요토미는 1592년 20만 대군을 보내 조선을 침략했다. 조선은 곧 무너지는 듯 했다. 그러나 조선의 의병들이 들불처럼 일어나 곳곳에서 왜군과 싸웠다. 명나라 군사들도 원군으로 들어왔다. 전쟁은 소강상태로 들어갔다. 5년 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군사와 병기를 보충해 다시 조선을 침략했다. 정유재란이다. 그러나 조선에 있던 왜장들은 움직이지 않았다. 승산이 없는 싸움이었기 때문이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회유책을 썼다. 조선 사람의 코를 잘라 보내면 그 수만큼 땅과 보상을 주겠다고 말했다. 그렇게라도 해야 조선에 보낸 왜장들이 움직일 수 있을 것이라 판단했기 때문이다. 1597년 6월14일 히데요시는 대마도주 야나가와시게노부를 부산에 급파해 우끼다와 소서행장에게 조선인의 코를 베어 일본으로 보낼 것을 명령했다.
히데요시는 왜군 1명당 한 되의 코를 보내라고 했다. 왜장들은 이 명령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1명당 세 명의 조선인 코를 잘라서 바칠 것을 명령했다. 이때부터 왜군들의 ‘조선인 코 수집’이 시작됐다. 코를 모으는데 혈안이 된 왜군들은 죽은 사람, 살아있는 사람을 가리지 않았다.

조선에서 보낸 코를 잘 받았다는 영수증.
코베기는 정유재란 때인 1597년 8월부터 10월 사이에 집중적으로 이뤄졌다. 왜군들은 자른 코를 소금에 절여 자루나 통발에 넣어 일본으로 보냈다. 히데요시 휘하의 검수관들은 그 수를 헤아려 영수증을 발급했고 논공행상의 근거로 삼았다. 히데요시가 1597년 9월 13일 부대장 시마쓰다다도요에게 보낸 코영수증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8월 16일 보낸 보고서 봤소. 전라도 남원성을 명나라 군대가 수비하고 있었는데 지난 13일 그 성을 포위하여 15일 밤에 함락시켜 목 269개를 베어 그 코가 도착했소. 수고했소, 전번에 원균이 지휘한 조선 수군을 괴멸시켜 큰 공을 세웠소. 앞으로 부대장들이 상의하여 잘 작전하시오. 마시다나가모리 나쓰가마사이에, 이시다미쓰나리, 마에다겐이에게 잘 말해 두겠소.]
1597년 9월 13일 풍신수길
시마쓰다다도요 귀하
히데요시의 잔혹했던 조선인 코수집과 이와 관련된 영수증(감사장)이 세상에 드러난 것은 약사출신으로 임진·정유재란 연구 및 자료수집에 반평생을 헌신한 고 조중화씨의 공이 크다. 조중화씨는 수십 년 동안 히데요시의 코베기 명령과 조선에서의 코반출, 코무덤 조성에 대한 연구를 했다. 그의 피땀 어린 노력으로 오사카성 천수각을 비롯 에야마구치현 문서보관소, 도쿄대학 사료편찬소, 가고시마현 역사자료센터 등 일본 땅 곳곳에 은밀히 보관돼 있던 코 영수증들이 세상에 나오게 됐다. 그의 연구결과는 <다시 쓰는 임진왜란사>(1996, 학민사)에 담겨 있다.
일본에 남아있는 ‘코 영수증’을 보면 왜군들의 코베기는 1597년 8월 16일 남원성을 함락한 뒤 대대적으로 이뤄졌다. 남원성 함락은 곧 전라도함락을 의미했다. 임진왜란 때 전라도에 발을 붙이지 못했던 왜군들은 남원성 전투 이후 전라도 곳곳을 유린했다. 한편 1597년 9월16일 이순신 장군은 명량에서 대승을 거뒀다. 왜군은 명량참패의 분함을 진도, 해남 지역 조선백성들을 죽이면서 풀었다. 전라도 해안지역 인구의 삼분의 일이 정유재란 때 죽임을 당할 정도였다. 류성룡의 징비록에는 ‘정유재란 후 길거리에 코 없는 사람들이 많이 생겨났다’고 적혀있다.
-소금에 절여 보내온 10만여 개 코항아리 수레에 싣고 자랑
도요토미는 조선에서 보내온 코들을 항아리에 담아 마차에 싣고 오사카와 도쿄를 돌면서 일본 백성들에게 구경을 시켰다. 조선 사람들을 얼마나 많이 죽였는지를 보여주면서 정벌의 위업을 과시했던 것이다. 그런 다음 방광사(호코지)대불전 앞에 코무덤을 만들고 무덤 위에는 고린토(五輪塔)라 불리는 오층석탑을 얹었다. 무덤위에 육중한 석탑을 올리는 것은 유례가 없는 일이었다. 원혼들이 일본 땅으로 나오지 못하게끔 취한 조치로 보인다.

일제강점기에 일본국민학교(초등학교)역사교과서에 실려있던 코운반 그림.
일본제국주의자들은 조선에서 코를 잘라와 코무덤을 만든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조선을 정벌해 일본의 국위를 높인 영웅이라 칭했다. 그림은 조선총독부가 1933년 발간한 조선을 정벌해 일본국위를 높인 <보통학교국사권2>에 실려 있는 것으로 히데요시가 코 숫자를 헤아리고 있는 검수관 옆에서 조선에서 잘라온 코를 지켜보고 있는 내용이다.
-일본 제국주의자들, 코무덤에 모여 조선침략 야욕 다지기도
■코무덤이 귀무덤이 된 이유

코무덤 앞에 놓여 있는 이총 안내문. 교토시청은 공원안내문 ‘귀무덤’(耳塚, 미미즈카)이라고 적어두고 가로 안에 코무덤(鼻塚, 하나즈카)이라 덧붙였다. 이곳은 도요토미 히데요시 때부터 코무덤이라 불렀지만 에도시대(1603년~1867년) 초기 유학자 하야시라산(林羅山)이 코무덤은 너무 야만스러우니 귀무덤이라고 부르자고 해서 귀무덤으로 바뀌었다. 역사에 대한 왜곡이자 자신들의 야만성을 희석시키기 위한 치졸함에서 비롯된 일이다.
민간인에 대한 무차별 살인과 신체훼손을 지시한 히데요시가 전쟁 중에 죽은 조선인의 영혼을 딱하게 여겨 코무덤을 만들어 위무했다는 말은 명백한 거짓이다. 절로 코웃음이 나온다. 일본의 어용 역사학자들과 우익인사들의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려는 행위는 예전이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다.
그런데 더 참담한 것은 상당수 한국인들이 코무덤이라 하지 않고 귀무덤이라 부르고 있다는 것이다. 피해자인 한국인들이 히데요시와 왜군의 야만성을 희석시키는 귀무덤이라는 용어를 스스로 사용하는 어처구니없는 현상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경남 사천시 선진리 조명군총(朝明軍塚)옆에 있는 묘 이름은 이총이다. 사천의 이총은 삼중스님이 교토 코무덤에서 채취한 흙을 항아리에 담아와 만든 무덤이다.
이 이총의 이름부터 코무덤(비총)으로 바꿔야 한다. 이총이 아니라 당연히 비총이다. 우리 스스로 잘못된 역사를 바로잡지 못하면서 일본에게 역사왜곡 시정을 요구하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마찬가지로 일본 교토에 있는 귀무덤 역시 분명히 코무덤으로 불러야 한다.
코무덤은 한국인들이 가장 즐겨 찾는 역사탐방지가 돼야한다. 그래야 극일과 애국의 정신을 키울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