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에는 솥에 지은 밥을 바로바로 먹어야 했다.
다양한 원인이 있겠지만 직접적으로는 밥 자체에서 이유를 찾는다. 옛날에는 솥에 지은 밥을 밥통에 옮겨서 먹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옛날 한국과 중국, 일본에서 모두 물 만 밥이 발달했던 이유에 대한 설명이다.
중국과 일본에서 음식점 메뉴로 대접받은 어엿한 요리
중국은 고대부터 물에 밥을 말아 먹는 문화가 있었다. 먼저 한자에서도 그러한 음식문화를 확인할 수 있다. 한자 중에는 손(飧)이라는 글자가 있다.
옥편에는 보통 저녁밥 손이라고 풀이해놓았지만 ‘물에 만 밥’이라는 뜻과 ‘묽은 밥’이라는 뜻도 있다.
이렇게 아예 물에 만 밥이라는 뜻을 나타내는 글자가 있었던 것을 보면 옛날 중국 사람들은 물에 밥을 말아서 먹었던 경우가 많았던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공자도 물에 밥을 말아서 들었다. 《예기(禮記)》에 공자가 “계씨(季氏)와 식사를 할 때 사양하지 않았으며 고기는 먹지 않고 물에 만 밥을 먹었다”고 나온다.
그러니 약 2500년 전 춘추시대의 중국에서는 다른 사람과 식사할 때 물에다 밥을 말아서 먹는 것이 식사예법에 어긋나지 않았다는 뜻이다.
물에 만 밥을 즐겨 먹은 오다 노부나가.
당나라와 송나라 때에도 물에 밥을 말아 먹는다는 기록이 많이 보인다.
당나라가 멸망한 후인 10세 무렵의 후당(後唐) 때 사람 유숭원이 쓴 〈금화자잡편(金华子杂篇)〉에 저녁밥을 먹기 전에 점심으로 수반(水飯) 몇 수저를 떴다는 기록이 있다.
여기서 점심은 오찬이 아니라 정식으로 식사를 하기 전에 가볍게 먹는 간식이라는 뜻이니 물에 밥을 말아서 가볍게 요기를 했다는 의미다.
일본 역시 진작부터 물에 밥 말아 먹는 식사습관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옛날 일본에서는 주로 상류층에서 물에 만 밥을 많이 먹었던 모양이다.
임진왜란 직전에 일본을 통일한 장군 오다 노부나가가 즐겨 먹었던 음식도 물에 만 밥이었다.
간소한 음식인 데다 빨리 먹을 수 있어 전쟁터로 출정하기 전에는 물에다 밥을 말아 훌훌 먹고 떠났다고 하는데,
간편하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그만큼 맛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찻물에 만 밥에서 탄생한 일본의 인기 패스트푸드, 오차즈케
일본에서 찻물에 만 밥, 오차즈케가 아예 요리로 발전한 것은 임진왜란 이후인 에도시대 중반부터라고 한다.
이전까지는 주로 상류층의 기호품이었던 차가 서민들도 마실 수 있을 정도로 일반화되는데 19세기의 일본 산업발전이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당시 상점에서 일하는 하인들은 하루 종일 바쁘게 일을 해야 했기에 밥 먹는 시간조차 줄여야 했다.
때문에 당시 상점 주인들은 종업원들이 식사를 빨리 할 수 있도록 밥에 찻물을 부은 후 한두 가지 반찬을 곁들여 내왔다.
오차즈케가 개화기 일본 산업의 발달과 함께 서민들의 패스트푸드로 자리 잡게 된 것이다.

40일 넘게 점심을 수반(水飯)으로 때운 조선의 임금
조선의 임금 성종의 경우는 무려 40일 동안 계속해서 물에 만 밥을 먹었다. 성종이 왕위에 오르고 이듬해인 1470년에 심한 가뭄이 들었다.
가뭄이 갈수록 심해지자 성종은 5월 29일에 교지를 내려 이제는 대비전과 대전 그리고 왕비가 있는 중궁전을 비롯해 각 궁전의 낮수라는 반드시 물에 만 밥(水飯)만 올리라고 했다.
물에 밥을 말아 간단하게 식사를 하기 시작한 지 사흘이 지나자 신하들이 성종에게 건강을 해칠 수 있으니 이제는 물 만 밥을 그만 드시라고 간곡하게 청한다.
그리고 6월 1일자 기록에는 수라상의 반찬을 줄인 지가 이미 오래됐고 또 낮에는 물에 만 밥으로만 수라를 드셨으니 선왕들도 그 정도까지는 하지 않으셨다며 그만 중지할 것을 요청한다.
성종은 신하들의 요청에 세종 때에는 비록 풍년이 들었어도 물 만 밥을 수라상에 올렸는데, 지금처럼 가뭄이 든 때에 물에 밥을 말아 먹는다고 해서 무엇이 해롭겠느냐며 신하들의 요청을 물리친다.
7월 8일이 되자 정승과 승지들이 또 간청을 한다. 비가 내려 가뭄도 어느 정도 회복이 되었으니 반찬을 원래대로 회복시키고 물 만 밥은 그만 드시라는 간청이다.
그러자 성종은 반찬 수를 줄인 것이 반드시 가뭄 때문만은 아니었으며 지금도 수라상에 반찬이 남아돈다고 말하면서
점심 수라 때 밥을 물에 말아 먹는 것은 더운 날씨에 오히려 알맞은 일이라며 신하들의 청을 또 물리쳤다.
백성들에게 모범을 보이려는 성종의 의지가 대단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