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이슈 이런 나까지 사랑해줘,가 안 통하는 이유.txt
35,311 598
2019.06.08 15:29
35,311 598

90c8277f1e408cb04834296c8e67f7717ad6b284

이런 나까지 사랑해줘,가 안 통하는 이유
최악의 상황에서만 나오는 구린 자아들을 억지로 끄집어낼 필요가 있을까?

2019 . 04 . 24

#“한번 만나면 오래 사귀는 타입이신가 봐요?”
길게 연애한 경험이 꼴랑 두 번뿐이라 ‘타입’이라고 말하긴 좀 거창하지만 굳이 따지자면 그렇다. 애인(이자 남편)과 7년째 연애 중이고, 직전 사람과도 2년 넘게 만났으니까. 그래서인지 ‘연애 오래 하는 비결’을 묻는 친구들이 종종 있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이십 대 초반에 나의 가장 큰 고민은 ‘연애 조루’였다. 누굴 만나도 한 계절 이상 사귀지 못하고 헤어졌다. 연애를 인생 최대의 목표로 두고 노력하는 데 비해 안 풀려도 정말 더럽게 안 풀렸다. 농담이 아니라 썸만 타다가 사그라든 관계만 모아도 소극장 하나는 채울 수 있다.

시작할 땐 다들 잘 해줬지만 금방 나에게 질려 했다. 초반에 한두 놈이 그랬을 땐 ‘다 내가 보는 눈이 없는 탓이요’ 하고 말았는데 상대만 바뀐 조루 연애가 반복되자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나한테 사람을 질리게 하는 매력(?)이 있구나.’

a8a7c22c2bb6eeb22e0c3f191b66d3903a480d1c

#진짜 모습을 보이면 더는 사랑받지 못할까 봐
적지 않은 연애를 말아먹고 나서야 그 ‘사람 질리게 하는 매력’의 실체를 알게 되었는데. 나에겐 이상한 악취미가 있었다. 애인이 나의 특정 부분을 좋아하거나 칭찬하는 걸 못 견뎠다. 연애 초 연인들에게 흔히 일어나는 마법인, 콩깍지의 존재를 절대로 인정하지 않았다.

가령 이런 식의 장면이 클리셰처럼 반복됐다. “네가 쓰는 단어가 좋아. 너랑 얘기하면 재밌어”라는 말에 “오빠가 날 아직 몰라서 그래. 내가 얼마나 말을 못되게 하는데” 하고 정색하며 분위기를 박살 냈다.

“고마워. 나도 네가 좋아”로 충분한 걸. 왜 쓸데없는 말을 했을까. 이제 와서 추측해보면 무서웠던 것 같다. 그가 내 모습을 낱낱이 알게 되면 더는 날 사랑하지 않을까 봐. 쉽게 말해 방어기제가 잘못 발동한 것이다.

그래서 잘 해보고 싶고 오래 만나고 싶은 사람일수록, 나의 못난 면을 보여주기에 급급했다. 최악의 상황에서만 나오는 구린 자아들을 억지로 끄집어내서 이런 나까지 사랑해 달라고 떼를 썼다. 나와 과거의 애인들은, 사탕처럼 달콤한 이야기만 해도 모자란 시기에 과도한 자기 고백을 나누느라 지쳐버렸고. 영원을 꿈꾸던 관계는 없던 일이 됐다.

나는 어딘가에서 주워들은 반쪽짜리 명제—‘그가 당신을 정말 좋아한다면 밑바닥까지 사랑해줄 것이다’ 류의—에 갇혀 있었다. 만난 지 한 달도 안 됐지만 어쨌든 애인이니까. 내 모든 정보를 전체공개로 돌리고 시험에 들게 하는 게 옳다고 믿었다.

관계에도 단계가 있고 종류가 있다는 걸 까맣게 몰랐던 탓이다. 여러모로 납작한 세계 속에서 조루 연애나 반복할 수밖에 없던 때였다.

#자아는 12인조 아이돌 그룹, 모든 멤버에게 입덕할 필욘 없어
나의 자아는 각기 다른 성향을 지닌 12인조 아이돌 그룹과 비슷하다. 인사성이 바른 멤버 A도, 글 쓰는 멤버 B도, 제 분을 못 이겨 이따금 소리를 지르곤 하는 다혈질 멤버 C도 모두 그룹의 일원, 즉 나다. 그런데 이 그룹은 단체 활동보단 개인이나 유닛 활동을 훨씬 더 많이 한다. 그래서 그룹보다는 멤버 개인으로 더 잘 알려져 있다.

이런 상황에서 특정 멤버를 보고 입덕한 사람에게 나머지 11명을 억지로 떠먹일 수 있을까? 다른 멤버들도 같은 그룹이니 어서 좋아하라고. 그렇게 못 하면 진정한 사랑이 아니라고 다그치는 게 옳을까? 아마 아닐 것이다. 그보단 가까워지고 싶은 대상을 내 정원에 자주 초대하는 편이 더 현명한 방법일 테다. 시간을 가지고 천천히 둘러보다 보면 나머지 멤버와 자연스럽게 만날 기회가 생기겠지.

‘자아의 유닛 활동론’을 이해한 덕분에 연애 조루 증상이 크게 나아졌다. 사실 연애뿐만 아니라 다른 관계에서도 더 건강한 태도를 지니게 된 듯하다. 이제 나는 사람을 사귈 때 내 모든 모습을 한꺼번에 오픈하려고 애쓰지 않는다. 일하다가 만난 사람에겐 일하는 자아를, 여행하다 만난 사람에겐 여행하는 자아를 보이는 게 당연하다. 잘 보이고 싶은 사람을 만나면 그가 좋아할 만한 자아만 유닛으로 꾸려서 내보내기도 한다. 늘 맘처럼 되진 않지만(가끔 원치 않는 자아가 튀어나오곤 하므로) 할 수 있는 데까진 노력한다.

그러다 보니 사랑에 빠지는 일도, 크게 실망해 절교하는 일도 예전보다 많이 줄었다. 멋진 사람을 봐도 ‘저 언니 어딘가엔 지질한 자아가 있겠지’ 생각하면 우상숭배에 빠지지 않게 된다. 반대로 예상치 못한 기대 이하의 모습을 만나도 딱히 호들갑 떨지 않고 넘어 갈 수 있게 됐다.

스스로를 대할 때도 마찬가지. 모든 자아가 완벽하게 멋진 사람은 세상에 없다. 있다고 해도 이번 생에 내가 이룰 수 있는 목표는 아니다. 그렇다면 알리고 싶지도 굳이 알고 싶어 하는 사람도 없는 못난 자아는 은근슬쩍 숨기면서 살아도 되지 않을까? (노파심에 덧붙인다. 여기서 말하는 ‘못난’이 범죄를 뜻하는 건 아니다) 나만 아는 비공개 멤버가 있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 그렇게라도 부족한 나를 덜 미워하며 살고 싶다.

[887호 – think]
ILLUSTRATOR 강한

목록 스크랩 (495)
댓글 598
댓글 더 보기
새 댓글 확인하기

번호 카테고리 제목 날짜 조회
이벤트 공지 [🩵아이깨끗해 x 더쿠🩵] 휴가 필수품 어프어프 디자인 보냉백&비치백 굿즈 구성! <아이깨끗해x어프어프 썸머 에디션> 체험 이벤트 475 06.10 23,629
공지 공지접기 기능 개선안내 [📢4월 1일 부로 공지 접힘 기능의 공지 읽음 여부 저장방식이 변경되어서 새로 읽어줘야 접힙니다.📢] 23.11.01 4,253,076
공지 비밀번호 초기화 관련 안내 23.06.25 4,991,798
공지 ◤더쿠 이용 규칙◢ 20.04.29 21,439,310
공지 성별관련 공지 (언급금지단어 필수!! 확인) 16.05.21 22,666,922
공지 정보 더쿠 모바일에서 유튜브 링크 올릴때 주의할 점 747 21.08.23 3,825,300
공지 정보 나는 더쿠에서 움짤을 한 번이라도 올려본 적이 있다 🙋‍♀️ 222 20.09.29 2,709,240
공지 팁/유용/추천 더쿠에 쉽게 동영상을 올려보자 ! 3380 20.05.17 3,389,604
공지 팁/유용/추천 슬기로운 더쿠생활 : 더쿠 이용팁 3963 20.04.30 3,955,020
공지 팁/유용/추천 스퀘어 공지 (스퀘어 저격판 사용 무통보 차단 주의) 1236 18.08.31 8,357,580
모든 공지 확인하기()
2429498 기사/뉴스 파킨슨병 학회 “‘맥페란’ 처방 의사 유죄 판결, 의사들 필수의료 더 기피할 것” 1 20:43 68
2429497 이슈 박재범 아이돌인지 아닌지 정의 내려줌.x 2 20:40 438
2429496 유머 스파게티에 소금을 너무 많이 넣어버리면 11 20:40 1,233
2429495 이슈 뮤지컬 시카고 이것도 좋아 20:40 221
2429494 이슈 “약을 썼다가 부작용이 생기면 상해죄로 의사를 형사처벌하고, 약을 쓰지 않으면 소극적 치료로 치료 시기를 놓쳤다며 책임을 묻고, 전 세계가 인정할지라도 대한민국 심평원이 인정 못 하겠다는 약을 쓰면 과잉 진료란 비난에 진료비 삭감과 약값 5배수 환수가 날아온다”며 “의사들에게 뭘 더 어쩌라는 건지 정부는 대답해보라” 15 20:37 901
2429493 이슈 1박 2일에서 준비해준 거라는 뉴진스 혜인 등신대 28 20:31 2,980
2429492 이슈 2008년 여성들에게 유행이었던 서인영 패션 27 20:28 3,822
2429491 이슈 엄마가 나한테 아파도 살이 빠지니 예뻐서 좋다고 했을 때 느낀 심정은 뭐랄까... 그 때는 다니던 정신과 선생님이 입원까지 권유했을 때였다.X 20 20:28 2,996
2429490 이슈 [KBO] 포효사.gif 19 20:28 1,330
2429489 이슈 요즘 원덬의 가슴을 쎄게 치고 있는 연하남의 맛 18 20:27 3,688
2429488 이슈 공개고백 vs 취중고백 7 20:25 630
2429487 기사/뉴스 [속보] 말라위 부통령 탑승 군용기 추락…10명 전원 사망 9 20:25 2,645
2429486 이슈 [대한민국 vs 중국] 살짝 넘어가는 손흥민의 프리킥 8 20:24 1,161
2429485 이슈 왼발 파리 이강인, 오른발 토트넘 손흥민이 대기 1 20:24 754
2429484 이슈 오늘 가발 안쓰고 자연모 상태로 공식석상 온 리한나 46 20:23 5,786
2429483 이슈 다비치 _ 편지 (2013) 1 20:23 101
2429482 이슈 직캠100에서 올려준 아이브 - Holy Moly 라이브 영상 7 20:22 280
2429481 정보 10년전 오늘 발매된 Flower <熱帯魚の涙(열대어의 눈물)> 6 20:21 132
2429480 이슈 헤이즈 샤라웃 받은 충주맨 9 20:20 1,431
2429479 유머 팬싸에서 진료봐주는 아이돌.twt 38 20:19 2,19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