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북부 홋카이도(北海道) 치도세(千歲)의 한 허름한 주택에서 김동오(金東吾)옹을 만난 것은 우연이었다. 당초에는 일본 강제징용자 관련 시민단체 관계자가 알고 지냈다는 징용 1세를 찾아 나섰다. 한동안 연락은 못했지만 살아계실 거라고 했다. 그러나 그는 그곳에 이미 없었다. 주변을 수소문했고, 조선인이 산다는 인근 허름한 주택 2층을 찾았다. 초인종을 누르자 경계감부터 보였다.
한국 기자라고 소개하고 명함을 건네자 비로소 표정이 풀어졌다.
“이런 얘기 한 적이 없는데. 너무 오래돼 기억도 안나고….” 나이를 묻자 일본식으로 ‘다이쇼(大正) 10년’이라고 했다. 1921년생으로 만 86세. 고향은 전라도. 현재 행정지명은 모르지만 유춘면 능용리라고 했다. 5남매중 둘째. 형은 일제의 압정을 피해 만주로 떠났고, 자신은 끌려왔다. 당시 18세.
고향에서 함께 징용된 이는 3명. 부산에서 배를 타고 도착해 보니 미쓰비시가 운영하는 홋카이도 비바이(美唄) 탄광이었다. 이름은 탄광에서 가네모토 도고(金本東吾)로 바뀌었다. 가혹한 노동에 계속되는 낙반사고. 춥고 힘들고 배고프고 무서워 도망 갈 생각도 했지만 철저한 감시에 엄두도 못냈다.
“함께 끌려온 조선인들이 갑자기 보이지 않아도 아무도 얘기를 안해. 또 누군가가 죽었구나라고 생각할 뿐이었지.” 3년 계약이 지나고 이번에는 최북단 와카나이(稚內) 탄광으로 끌려갔다. 그곳 생활은 더욱 참혹했다. 사방은 눈밭에, 거주지는 다코베야(문어방)라는 토굴이었다.
그저 석탄을 캐는 것 외에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다. 와카나이에서 다시 아시베츠(芦別) 탄광으로 옮겨진 뒤 해방을 맞았지만 빈 손으로 돌아갈 수도 없었다. 탄광에서 받은 월 40~50엔의 급여는 갖은 명목으로 착취당해 손에 쥔 게 없었다.
‘배운 게 탄광질’뿐이어서 다시 탄광에 취업했다. 남북이 분단되고 6·25소식이 들리면서 귀국은 접었다. 그리고 북한계 출신 여성과 결혼했다. 자녀들이 5명 있었으나 북송사업으로 북한에 건너갔다. 그나마 부인도 6년 전에 사망, 현재는 혼자 시의 생활보호대상으로 살고 있다.
“고향? 그저 가슴 속에 묻고 살 뿐이지. 시대나 역사 잘 몰라. 한도 없어. 이 나이에 누구를 원망하겠어. 그저 나 같은 사람이 다시 안나오길 기대할 뿐이지.”
김옹이 징용 1세들의 아픔을 고스란히 껴안고 잊혀져가는 인물이라면 김시강(金時江·57)씨는 갖은 차별과 멸시를 견뎌온 징용 2세다. 아버지의 고향은 경남 진주로 15~16세때 일본에 건너온 뒤 도쿄, 시즈오카를 거쳐 홋카이도 등에서 활주로 건설 등 공사장 잡일을 전전했다.
“아버지가 일본에 건너왔을 때는 일제가 강제징용에 본격 나섰던 때는 아니었어요. 그러나 식민지 시절 어린 소년이 먹고살려고 발버둥치기 위해 일본어도 모르는 상황에서 무작정 건너왔어요. ‘강제 징용’은 아니지만 ‘강요된 징용’인 셈이죠.”
김씨는 아버지로부터 과거 얘기를 제대로 들은 적이 없다고 했다. 아버지 스스로 아픈 얘기를 좀체 입에 담지 않았고, 자신 역시 한때 그런 얘기를 들을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고 했다. 김씨 부녀의 이런 상황은 재일동포들의 공통된 인식이다.
김씨는 일본에서 태어났다. 이른바 통명(通名)이라는 일본 이름을 사용하고, 일본어를 구사하며 생김새도 똑 같지만 학교에서는 금세 자신이 조선인이라는 것을 알아챘다. “주변에서 멸시받아도 가족, 형제들에게는 얘기 할 수 없었어요. 얘기하는 것 자체가 나를 부정하고, 나를 낳아준 부모를 공격하며, 내 조국을 상처입히는 일이었어요.” 고교졸업 뒤 총련계 금융기관과 일본 회사에서 일했다.
세월이 흐르고 동포들의 사회운동과 일본 사회의 변화로 인식은 많이 바뀌었다. 그러나 밑을 파보면 변한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일본인들은 인권의 중요성을 얘기하며 차별과 편견은 나쁘다고 말하지만 한발만 들어가면 또 다릅니다. 예컨대 집을 얻을 때 젊은 집주인이 웃으며 ‘부모가 외국인 싫어한다’고 얘기해요. 조선학교에 다니는 아이들의 치마·저고리 자르는 것은 나쁘다고 말하지만 일본 공립학교에 다니는 조선 아이들에 대한 차별은 변함이 없어요.”
그는 요즘 삿포로(札幌)에서 조그만 사무실을 내 일본인들에게 한글은 물론 한국 전통문화를 알리고 있다. 일본 사회 속에서 재일(在日)동포의 존재가 있고, 재일의 문화가 있다는 것을 알리면서 ‘나는 이렇다’는 것을 표현하고 싶다는 의미라고 했다.
“아버지 말씀 중에 ‘북에는 김일성 정권, 남에는 이승만 정권이 있다. 각각의 역사를 우리가 선택했다’는 말이 오래 가슴에 남아요. 남북 모두 가봤어요. 남이 뛰어나고, 북이 부족한 부분은 있지요. 그러나 정부나 지도자가 아닌 그곳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모두 같잖아요.”
홋카이도 재일민단 관계자는 “일본에서 징용 1세 중 생존자는 이제 손에 꼽을 정도”라며 ”2세, 3세들이 1세에 이어 일본 사회에서 살아가고 있지만 정체성만은 놓지 않으려 애쓰고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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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기사)
일본의 북단 「혹가이도」 (북해도) 「삿보로」 (찰황) 동북방 4킬로의 「데이네야마」 기슭에 세워진 「한국인순난자지위령비」 첫머리에 적혀 있는데 군사 징용으로 끌려갔던 한국인은 총 12만5천명-. 현재 북해도 각처에 흩어져 사는 재일 교포 약 9천5백명 (민단계=3천5백명)은 그 후예들이다.
[출처: 중앙일보] 북해도의 한국인|징용자 12만…후예들의 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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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알려져 있진 않지만 홋카이도도 재일 교포들이 많았던 곳임.
당연 재일 교포들에 대한 차별도 많았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