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분한 단언들
배우 서강준은 침착하고 신중한 태도로 진심에 대해 이야기할 줄 안다.
인터뷰를 할수록 인터뷰라는 형식의 의사소통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어떤 날은 서로 다른 질문과 답을 주고 받는 불통의 대잔치가 열리기도 하고, 어쩌다 마음이 맞아 물꼬가 트이면 대화는 즐겁지만 이 경우 지면에 옮길 수 없는 말이 많아 혼자만의 추억만 쌓고 돌아오기 일쑤다. 그러니 ‘기사’가 되게 하려면 안전한 질문을 해야 하고, 예의 정해진 답을 들어야 한다. ‘사전 질문지’라는 암묵적 시나리오가 있는 날에는 인터뷰가 건조한 연극처럼 느껴지기도 하는데 배우 서강준과 마주 않은 날도 그렇게 흘러갈 듯했다. 초반에는. 한데 돌연 예상 경로를 벗어나 방향을 튼 건 답을 이어가던 그가 “근데, 지금 무슨 생각 하세요?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것 같은데”라고 인터뷰어에게 질문을 던진 순간이었다. 그가 앞에 앉은 사람이 무슨 생각으로 자신의 말을 듣는지 궁금해하는 시점부터 질의응답의 공기가 달라지기 시작했다. 매사에 진심을 담으려 하고, 진심을 다할 수 없다고 판단되면 애초에 시작하지 않는다는 그의 명료한 성정이 이후 짧은 시간의 대화에 담겨 있다. 그리고 이 대화를 토대로 배우 서강준을 유추해보면 삶을 운영하고, 배우 커리어를 쌓는 과정에서 우왕좌왕 헤매는 것은 그에게 어울리는 일 같지 않다. 누구보다 자신의 장단점을 잘 알고 있으며, 그저 더 좋은 연기를 하고 싶은 배우. 그리고 지나간 시간에 얽매이지 않으며 다음 행보를 걷는 사람. 그 차분한 단언들이 아래 인터뷰에 이어진다.
드라마 <제3의 매력>을 촬영 중이다. 어제 촬영한 신은 어떤 신인가? 지난주 영재(이솜)와 헤어지는 장면까지 방영됐고, 어제는 수재(양동근)와 이별하는 신을 촬영했다.
그렇게 모두와 정리하고 포르투갈로 떠난다. 극 중 역할인 준영에게는 큰 전환점인 셈인데, 서강준 인생에도 그런 전환의 순간이 있었나? 연기 학원 갈 때. 고등학교 3학년 때였는데 모델 생활을 했었다. 키가 크지도 않은데 3년 동안 연습하고, 고3이 돼서야 쇼에 두 번 섰다. 그리고 그날 바로 그만뒀다.
자의로? 더 하고 싶지 않더라. 모델 일에 마음이 크게 가지 않기도 했는데 오디션에서 계속 떨어지니까 그만두더라도 한 번은 쇼에 서야겠다고 생각했다. 연습만 하다 포기할 수는 없으니까. 그렇게 3년 만에 쇼에 두 번 서고 그날로 그만둔 거다. 연기 학원을 갔는데 문 앞에 서 있다가 돌아왔다. 너무 무서워서. 들어가는 게 되게 어렵더라. 그러곤 며칠 후 다시 갔다. 그때는 아무생각 하지 않고 그냥 훅 들어가버렸다.
드라마 <제3의 매력>의 키워드는 ‘현실 연애’다. 그 현실감이 이번 작품을 선택하 는 큰 이유가 됐나? 현실적이라서 좋다기보다 현실적이지 않은 게 좋지 않았던 것 같다. 우리의 이야기니까 더 와 닿았다. 작품에서 남자 주인공은 으레 멋있게 그려지는 경향이 있는데, 그 ‘멋짐’이 내게는 크게 매력적으로 느껴지지 않았다. 종종 그런 멋진 장면들을 촬영할 때 ‘지금 내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건가, 이게 무슨 상황인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하는데, 이번 작품은 그런 의구심이 없어서 좋았다. 이해되는 멋있음이 있다는 점이 매력적이었다.
극 중 온준영을 이해했다고 느낀 순간은 언제인가? 온준영은 몸을 던져 사랑할 수 있는 친구고, 또 몸을 던지지만 상대가 원치 않으면, 그리고 자신의 이런 행동으로 상대가 괴롭다면 멈추는 사람이다. 그로 인한 고통은 자신의 몫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라는 점에서 멋있다. 연기를 하면서 온준영은 아팠어도 후회는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응원하게 된다.
할 수 있는 한 끝까지 사랑한다는 점에서 온준영은 행복한 사람이다. 반면 현실은 사랑이 어려운 숙제같이 느껴지는 시절이다. 무조건적 사랑이 판타지로 느껴지기도 하고. 찰리 채플린의 유명한 말 중에 ‘인생은 가까이서 보면 비극인데 멀리서 보면 희극’이라는 말이 있지 않나. 극 중에서 나이가 변해가니까, 극 후반부 서른두 살이 되면 이 친구에게는 인생이 찰리 채플린의 말처럼 보일 것 같다. 지독하게 아팠지만 아름다웠고, 나를 뜨겁게 만들고 모든 걸 던질 수 있게 한 영재에게 고마울 수 있겠다는 생각이···. 근데, 지금 무슨 생각 하세요?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것 같은데.
아, (웃음) 방금 대답을 들으면서 서강준이라는 사람이 준영과 같은 사랑을 해봤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유사한 감정을 느껴본 사람의 말 같아서. 그런 사랑을 해봤느냐고 물어볼까 말까 고민하는 중이었다. 맞다. 나 역시 작품을 하면서 나를 돌아보게 됐다. 준영이만큼 사랑에 나를 던져본 적 있었나. 준영이만큼은 아니어도 아프지만 예쁜 사랑을 하기는 해봤구나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하는데, 지나고 보니 한 가지 부럽더라. 나는 뭐가 그렇게 자존심 상하는 게 많았을까 하고. 만약 내가 준영이처럼 사랑해봤다면 작품은 또 어땠을까 하는 생각도 해봤다. 예전에는 그다지 와 닿지 않았던 ‘배우는 경험을 많이 해야 한다’는 말에 공감하기도 했다.
어느 때보다 사랑에 대해 많은 생각을 했겠다. ‘위함’이더라. 사소하게는 사랑하는 사람이 오늘 하루 힘들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 당황스럽거나 걱정 되는 일이 없었으면 하는 것. 그런 조마조마한 마음에서 시작되는 것 같다. 그런 위함이 나보다 상대를 중요하게 생각하게 되는 거구나 하는 생각도 들고, 나아가서는 나보다 상대가 더 행복했으면, 힘들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으로 커지는 것 같다. 이 작품을 하기 전에는 많이 생각해보지 않은 것들이다.
배우는 작품으로 성장한다는 말이 새삼 와 닿는다. 작품을 하나하나 해나면서 느끼는 점이 많은 것은 분명하다. 작품 속 성숙해가는 캐릭터만큼 나도 성숙하는 건가 하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해본다. 그럼 반대로 그렇지 않은 사람들은 작품을 하면서 느끼는 점이 없어서 성숙하지 못하는 걸까? 그건 아닐 텐데. 그럼 나는 어떻게 될까? 작품이나 캐릭터와 상관없이 ‘나는 나’ 하게 될까, 아니면 영향을 주고받으며 나아가게 될까? 하는 생각도 했다.
서강준은 후자인 건가. 지금까지는? 잘 모르겠다. 그건 다른 사람이 판단해줘야 할 것 같다.
서강준의 제3의 매력은 뭐라고 생각하나? 진심으로 대한다. 모두.
인생의 모든 것을 진심으로 대하는 게 가능한가? 진심으로 대한다는 말이 애써서 열심히 한다는 의미라기보다는 내가 진심이 생기지 않으면 하지 않는다는 쪽에 가깝다. 인간관계에서도 마음이 가지 않으면 안 만나고, 작품 역시 그렇다. 물론 최소의 선의와 예의는 지키지만 그보다는 내 마음에 더 귀 기울이고, 타협하지 않으려는 편이다. 이 일이 사람들과 함께 하는 작업이니 싫어도 처세라는 게 필요하기도 한데 잘 안 된다. 그래서 어떤 면에서는 준영이처럼 사회성이 부족하기도 하다.
마음을 허투루 쓰지 않는 건데, 어렵고 용기가 필요한 일이다. 오히려 그렇게 하지 않는 상황이 내겐 더 어렵다. 진심이 아닌 순간이 나를 더 갉아먹는 것 같다. 인간관계에서 기본적인 예의는 당연히 갖춰야 하는 거고, 그 예의를 다하면 털고 일어난다. 상대가 누가 됐건.
진심으로 마음이 푹 가는 이들은 주로 어떤 사람들인가? 솔직한 사람. 본인의 고민을 털어놓는 등 특정 행동이나 말을 하는 사람이라기보다 이야기하다 보면 솔직함이 느껴지는 사람이 있다. 진심으로 나를 대하고 있다는 걸 직감으로 느낀다. 그저 나를 한 사람으로 대하는 진심. 진실한 대화를 깊게 하지 않더라도, 최소한 진실되게 마주하 는 사람이 많지 않은 것 같다.
나에 대한 객관화는 잘되는 편인가? 많이 한다. 객관적으로 보려고 노력한다. 그래야 흔들리지 않는다. 객관화하면 적어도 일희일비하지 않으니까.
자기 기준이 확실한 사람 같다. 중요한 것의 우선순위가 있다. 그중 하나는 마음이 가고, 하고 싶은 것을 하는 것이다. 회사에서 원하는 방향성이 있고, 그렇게 가야 한다는 점도 인지하고 있지만 무엇이건 억지로는 안 하고 싶다. 하고 싶은 것으로 사랑받고 싶고, 그렇게 해서 큰 사랑을 못 얻는다면 그만큼의 사랑만 받아도 괜찮을 것 같다.
삶에서 더 채워지길 바라는 게 있나? 사랑. 연인과의 사랑이라기보다 작품 하면서 바쁘니까 어느 순간 캐릭터는 채워져 있지만 내가 많이 비어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하지만 지금은 작품을 하는 중이니 집중해야 하고, 작품이 끝나면 친구와 가족을 만나 사랑을 나누고 싶다. 그런 사랑들이 살고 있는 나를 더 뛰게 하고, 가치 있게 만드는 것 같다. 삶의 원동력까지는 아니지만 의미 있는 삶으로 만들어주니까.
올해를 단 한 장의 사진으로 남긴다면? 햇빛이 쨍한 날, 파란 바다가 떠오른다. 하늘도 새파랗고 쨍하고 뜨겁지만 아주 고요하고 적막한 바다. 올 한 해 부지런하게 촬영하고 바쁘게 활동하는 와중에도 고요하고 적막했다. 유독 겨울만 되면 이런저런 소란함이 가라앉고 멎어드는 것 같다. 그렇지 않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