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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기 문왕 [문제적 왕자님] 에르나로인해 확립된 비에른의 유일성 (스포 o - 매우 긴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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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3.23 09: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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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비에른이라는 인물을 이해하기 위해 우선되어야 할 점은 그가 일란성 쌍둥이로 태어났다는 것이다.

 

레첸의 첫번째 왕자로 태어나 왕세자가 된 그였지만

그가 왕세자가 된 것은 동생 레오니트보다 몇 분 먼저 태어났다는 이유가 주효했다.

 

분명 그는 비상한 머리와 정치력을 지녔으며, 이익을 빠르게 파악하는 계산감각 등.. 왕으로서의 재능을 갖추고 있었다.

그러나 동생 레오니트 역시 자신과는 다른 방향으로 왕이 됨에 부족함이 없음을 알고 있었다.

 

몇 분의 차이. 

 

자신이 노력하여 얻은 것도 아닌 그 몇 분의 차이가 이토록 다른 삶을 결정한다는 게

비에른으로서는 다소 허탈하고 허무하기까지 하였을 것이다.

 

...

 

에르나를 얻게 된 것 역시 이와 다르지 않았다.

 

다소 즉흥적인 감상으로 기차역을 찾아가지 않았더라면..

폭풍우 치는 날씨와 이어진 사고로 인해 파벨 로어가 늦게 도착하지 않았더라면..

그 몇 분의 차이와 우연들로 인해 비에른은 에르나를 만났고

본래라면 파벨 로어와 떠날 예정이던 에르나를 가로채 자신의 여자로 만든 셈이 되었다.

 

갈망하기도 전에, 노력하기도 전에 주어진 행운.

비에른에게 에르나는 그런 시작이었다.

 

 

2.

감출 생각조차 없이 사랑하는 마음을 온전히 내보이는 에르나의 애정어린 눈길에 비에른은 서서히 중독된다.

그와 동시에 불안감이 차오르기 시작한다.

 

에르나의 사랑은 너무나도 크고 순수하지만

동시에 그녀는 그 무엇이라도 사랑할 여자였고, 모든 것을 사랑스러운 눈으로 바라보는 여자였다.

들에 핀 꽃 한 송이도, 나무 위를 오르던 다람쥐도,

선실의 벽난로와 하수구 박물관까지 행복한 얼굴로 이야기하는 여자가 아니었던가.

 

비에른에게 있어 에르나는 반드시 비에른이 아니어도 행복할 여자였다.

 

다른 남자의 아내가 되었더라도 지금처럼 사랑스러운 얼굴로 그 남자를 바라보며 행복한 얼굴로 웃었을 여자.

무척이나 작은 것에 기뻐하는 여자였고, 그녀를 웃게 하는 것이 너무도 쉬워서 

반드시 내가 아니어도 될 여자라는 생각에 사로잡히고 마는 것이다.

 

비에른에게 파벨 로어는 에르나의 그런 점을 상기시키는 상징적인 존재였다.

 

...

너무나도 쉽기에 바로 그 점 때문에 에르나에게 있어 비에른 자신의 존재가치가 하락하는 느낌.

 

그래서 그 쉬운 것을 해주지 않음으로써 비에른은 자신의 가치를 높이고자 한다.

약속한 것을 지키지 않고, 하염없이 기다리게 하고 실망시키며.

 

무엇보다 그녀는 자신이 에르나를 트로피삼은 내기에 동참하였다는 것도, 

스캔들에 휘말려 평판이 추락하고 악녀, 요부로 지칭될 것을 알면서도 비에른이 이를 방조하였던 점 등을 모르고 있었다.

 

그녀가 바라보는 나는 내가 아니며, 그녀가 사랑하는 나도 실제의 나는 아니라는 것.

 

결혼 초기 에르나를 함부로 대하고 그녀의 몸을 탐닉하였던 시간들은 어쩌면 에르나가 갖고 있던 비에른에 대한 환상을 깨트리고

온전한 나로 그녀를 다시 채워넣기 위한 욕망이지 않았을까 싶기도 하다.

 

네가 사랑해야 할 것은 구원의 왕자가 아니라, '이런 나'라는 것.

 

 

3.

비에른은 왕세자 자리에서 물러난 이후 금융계에 들어와 은행을 설립하고 이를 키워나간다.

그에게 모든 것은 교환 가능한 재화이며, 그 자신조차 예외는 아니었다.

 

결혼시장에 딸을 매물로 내 놓은 발터 하르디 자작을 경멸하였고,

그의 딸 에르나 역시 이에 적극적으로 동참하였다는 오해를 하며 그녀를 비웃어댔으나

정략결혼 상대였던 글레디스의 임신 소식을 듣자마자

누구보다 먼저 자신의 가치를 계산하여 매물로 내놓은 게 바로 그 자신이었다.

 

자신을 포함한 세상 모든 것을 돈으로 환산하면서 동시에 그러한 행태를 비웃는 냉소적인 태도가 비에른의 중심적인 모습이었다.

 

문제는 돈으로 환산 가능하던 것들이 에르나를 거치면 더 이상 돈으로 환산하지 못할 그 무엇으로 변해버린다는 데 있었다.

그에겐 가장 값비싼 목걸이가, 에르나에게 가면 '비에른이 직접 골라준 목걸이'로 변해버린다.

비에른에겐 황량한 풍경이, 에르나에겐 '비에른과 함께 바라본 신혼여행의 추억'이 되어 새로운 가치를 획득하게 된다.

은행 이자는 '쿠키'로, 통장은 '쿠키통'으로

에르나로 인해 새로운 언어와 의미를 지닌 세계로 탈바꿈해나갔다.

 

 

교환가능하던 사물과 경험들은 에르나를 통해 새로운 가치를 얻게 되고 환산할 수 없게 되면서 교환 불가능한 무엇이 된다.

에르나로 인해 모든 것이 유일성을 얻게 되는 것이다.

 

몇 분 먼저 태어났기에 왕세자가 되었던 비에른은 에르나로 인해 유일성을 획득하게 되고,

그 작은 왕국의 유일한 왕으로 세워지게 된다.

 

그녀를 사랑한다는 사실을 인정하기 힘든 것은 그 유일성을 자신이 획득한 게 아니라, 에르나로부터 주어진다는 데 있었다.

그녀는 나를 왕으로 만들 수 있으며, 동시에 나를 그 왕국의 종으로 만들 수 있다.

 

매혹적이면서 두려운 세계. 

그 안에서 유일한 존재가 될 것이기에 우뚝 설 수 있으나 종속될 수밖에 없는 공간

 

그는 그곳에 들어가지 않기 위해 완강히 버티며, 에르나를 자신의 영역인 계산가능 공간으로 끌어들이려 한다.

끊임 없이 거래를 이야기하고, 빚, 채무, 손해, 보상을 이야기하면서

에르나가 원치 않는 값비싼 물건들을 선물로 준다.

 

에르나의 세계에 종속되지 않기 위해, 비에른의 세계인 교환가치의 영역으로 그녀를 끌어내린 것이다.

 

그러나 결국 에르나는 그를 떠났고, 남겨진 편지는 마치 영수증처럼 비에른의 언어로 채워져 있었다.

 

독버섯의 누명을 벗은 당신에게 나는 더 이상 효용가치가 없으니, 가치가 사라진 나는 당신을 떠나겠다는

더 이상 사랑하지 않는 남편 곁에 있을 이유가 없다는 편지.

 

비에른이 수시로 이야기해왔던 손해, 보상, 채무 등으로 채워진 편지는 마치 영수증과 같았고

자신이 들어가길 거부한 에르나의 세계는 문이 닫혔으며

그는 에르나에게 가치 없는 존재가 된다.

 

스스로의 가치를 보존하기 위해 에르나의 세계를 거부하였던 비에른은

자신의 가치가 휴지조각이 된 현실을 마주하게 된다.

 

 

4.

자신이 사랑했던 남자는 애초에 존재하지 않았기에, 에르나의 사랑은 목적지를 상실하였고 그렇게 흩어진다.

 

그 사실을 확인한 지점에서 다시 시작되는 두 사람의 관계가 좋았다.

 

바닥을 드러내보이고 할퀴어가며 독설을 퍼붓고

함께 한 지난 시간을 부정하면서도 그것이 정말 아무 의미 없는 것들이었던가 반추해보는 과정도

끝끝내 털어놓지 못한 진심을 꺼내며 서로를 위로하게 되는 순간들도

 

어설펐던 첫사랑이 끝나고 쌓인 상처들 위에 비로소 다시 시작된 관계를 지켜볼 수 있어 좋았다.

 

 

자신이 아닌 누구라도 사랑했을 거라 생각한 여자가 그 모든 일을 겪어내고,

비에른의 밑바닥을 보았음에도 다시 자신을 사랑하게 되었을 때

 

비에른은 비로소 유일성을 획득하게 되었고 자신의 사랑을 인정하게 된다.

자신이 그녀의 구원이 아니라, 그녀가 자신의 구원이었음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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