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갑자기 악마는 바다를 가르며 나타났다.
물에 젖은 탐스러운 까만 머리카락을 쓸어 올리며 대륙 공용어도, 제국어도 아닌, 그 어느 왕국, 신전에서 조차 해석하지 못하는 말을 몇 마디 꺼내곤 이내 체념한 표정으로 고개를 내젓던 그 악마를, 사람들은 신의 대리인이라 칭송하며 따랐다.
악마의 첫 행보는 그간 신전에서 골머리를 앓게 했던 마수의 토벌이었기에.
그 악마는 대륙인들은 생전 처음 보는 건틀릿을 착용하고 매서운 주먹을 휘두르며 마수들의 머리를 깨부쉈다. 마수의 피와 뇌수에 젖은 채 돌아온 그 모습은 그야말로 죽음의 사신, 피의 마녀, 지옥의 기수, 세상의 모든 흉흉한 상징 그 자체였으나 사람들은 환호했다. 신이 드디어 자신들을 굽어 살피시어 강력한 사자를 보냈노라하며 악마를 칭송하였다.
신전은 그 악마를 감히 성자라 칭하고 극진히 모시며 자신들의 권위의 증거로 남길 원했으나 악마는 신전에서 바친 성물들을 가지곤 홀연히 사라졌다.
그리고 다시 그 악마가 나타난 것은 대륙의 끝, 이름조차 생소한 어느 약소 부족 간의 전장에서였다. 척박한 땅, 전투와 약탈이 끊이지 않는 곳에서 악마는 스스로를 대륙의 왕으로 선포하며 서로를 증오하던 부족들을 하나로 통합하고 근처 왕국을 침략했다.
그렇게 대륙의 끝, 혼돈 속에서 다시 나타난 악마는 이번엔 인간의 피를 뒤집어쓴 채 대륙의 중심으로 돌아왔다. 가장 먼저 그 앞을 막아선 것은 신전이었지만 성물을 빼앗긴 성기사단은 속수무책으로 그 악마의 앞에 무릎 꿇을 수밖에 없었다.
한 목소리로 악마를 성자라 칭송하던 사람들은 혼란스러움을 감추지 못하고 스스로 물었다. 저것은 성자인가, 악인인가?
그는 신의 대리인이니 이 혼돈과 전쟁은 신의 뜻이오, 이 끝에서 진정한 평화가 오리라.
평화롭던 대륙에 혼돈의 불을 지폈으니 저것은 악마이다, 마녀이다.
그 신비로운 등장과 마수를 멸종시킨 업적을 돌이켜보라, 그는 의심할 수 없는 성자요, 신의 사자니라.
신전의 성물을 훔치고 스스로를 대륙의 왕이라 칭하며 제국의 권위에 도전하였으니 혼란의 시작이요, 악이로다.
사람들은 쉽게 정의내리지 못하고 패를 나누었다. 그 사이에도 악마는 군대를 끌고 차근차근 대륙을 휩쓸었고, 마침내 황제의 목을 베었다. 옥좌에 앉은 악마는 아직 어린 황손을 제 앞에 무릎 꿇린 채, 바닥에서 데굴데굴 구르던 황제의 관을 그 작은 머리에 올리며 말했다.
“드디어, 시작이로구나.”
유창한 대륙 공용어를 입에 담은 악마가 빙긋이 웃었다.
“너희가 그토록 궁금해하던 나에 대해서 알려주마.”
그때였다. 하늘에서 난생 처음 듣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그 굉음은 하늘을 찢고 땅을 울리면서 퍼져나갔다. 사람들은 겁에 질린 채 무릎을 꿇고 신을 향해 빌었다. 이 목숨을 살려달라며 목숨 바쳐 비는 그 우스우면서도 절박한 모순된 기도소리를 들으며 악마는 태평하게 웃었다.
“나는 이 분노의 연쇄를 끊기 위해 나타난 악의 사절단, 절망의 파발꾼. 너희에게 멸망을 선사하러 왔노라.”
나긋한 악마의 말과 동시에 구름 한 점 없던 하늘에서 해가 가려졌다. 사람들의 머리 위에 커다란 그림자가 지더니 하늘을 나는 함선들이 나타났다.
사람들은 절망에 휩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