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행히 엄마가 집안일에 철저하신 편이시라 자라면서 보고 배운 게 좀 있고,
보편적인 기준에 비해 일찍 자립한 덕분에 생존을 위한 기본적인 요리 상식은 갖추고 있음.
서른 넘기면서 입맛이 터져서 먹는 재미를 알게 된 즈음부터 문제가 발생함.
맛있는 걸 만들 의지와 기력, 지식은 없는데 먹고는 싶으니 외식과 배달에 의존하게 됨.
생활비도 입맛과 함께 터져버림.
하지만 습관을 고치기란 쉽지 않았고,
애초에 타고나길 에너지가 부족한 인간이라
일하고 퇴근하면 청소와 빨래만으로도 금세 지쳐버렸음.
지출을 줄일 수는 없었지만 다행히 배우자와 나의 수입이 점차 늘어나 괜찮았음.
솔직히 수입 상승에 결정적 역할을 하는 건 배우자인 반면에
먹고싶은 게 많은 건 내 쪽이었기 때문에 마음 한구석에 항상 미안함과 고마움이 있었음.
그러던 중 마흔을 목전에 둔 시점에 갑자기 내가 다니던 회사가 망해버렸음.
졸지에 실업급여를 받게 되면서 배우자와 상의해 나는 프리랜서로 전환하기로 결정함.
상대적으로 시간적, 체력적 여유가 생겨 집안일에 좀 더 신경을 쓰게 됨.
초반에는 청소와 빨래, 집안 정리 같은 걸 우선적으로 개선했음.
그렇게 두어달 보내고 났는데도 지출되는 생활비에 큰 차이가 없는 걸 확인하게 됨.
식비가 문제라는 점을 깨달으면서 그간 배우자에게 느끼고 있었던 죄책감이 자극됐음.
씨스튜 곧 나옴. 길어서 죄송.
그렇게 요리를 해보기로 결심하고 점층적으로 시도해봤음.
그래봤자 밀키트, 반조리 식품이긴 하지만 나름 해볼만 하다 느껴졌음.
점점 요리에 대한 낯가림이 사라져가기 시작함.
그리고 대망의 오늘이 왔음.
토마토 스튜를 만들었음.
결론부터 말하자면 성급하고 무지한데다 대충대충이기까지 한 나는
스튜에 사용하는 닭 육수와 시판되는 치킨 스톡의 차이를 알지 못하고
닭 육수 800ml 대신 치킨 스톡 400ml를 넣어버림.
심지어 그러고는 중간에 간도 안 봄...
얼추 다 끓이고 상에 올리려고 간을 본 순간 뇌가 빠르게 회전하기 시작함.
'살려야 한다.'
들어간 재료값만 얼추 5만 원 돈이었던 요리였으므로...(한우 썼음.)
스튜 냄비는 우선 내리고 다른 냄비를 하나 더 꺼내 스튜를 1/3 정도 옮겨담음.
옮겨담은 스튜 양과 1:1 비율로 물을 넣어 다시 끓임.
간을 봄.
아직 짠 맛이 강함.
물을 절반 정도 더 넣고 한소끔 끓임.
간을 봄.
아직.
냄비 한계선까지 물을 더 넣고 더 끓여 간을 봄.
이제 사람이 먹을 수 있는 수준은 된 것 같은데 미묘하게 짭짤하면서 밍밍함.
어차피 망한 거 우유를 조금 넣어봄.
한층 부드러워졌지만 살짝 시큼한 맛을 중화해 줄 무언가가 필요했음.
당뇨 전단계니까 알룰로오스 쪼금 넣음.
그렇게 간신히 점심 식사를 할 수 있었음.
먹을 때 보니 국물은 괜찮은데 건더기에 이미 짠 맛이 다 배어 있어서
마늘빵이랑 먹기에는 우리 가족 입맛에는 간이 좀 셌음.
밥 말아서 김치랑 먹으니 그래도 맛은 있어서 다행이었지...
남아있는 씨스튜를 어떻게 해야 하나 하다가
일단 짠 맛이 더 배지 않도록 건더기만 따로 건져서 물 부어놓음.
국물도 버리진 않았고 이따 저녁에 물 좀 더해서 파스타 해먹을 예정.
한 끼 쉬었다가 또 남으면 리조또 해먹어야지.
설마 그러고도 남으면(남을 것 같긴 함) 어째야 하나 고민 중이긴 함.
이상, 치킨 스톡과 닭 육수의 차이점도 몰랐으면서
기본 요리 상식은 있다고 자신했던 사람의 씨스튜 만들기 후기였음.
PS. 스톡 직역하면 육수자너...ㅠㅠ 농축액은 농축액이라고 써주라 진쨔ㅠㅠ
PPS. 쓰여있네... 눈이 아니라 장식인가벼ㅜ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