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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것만 좋아”하는 나를 “금방 또 사랑에 빠”지게 만드는 그룹이 있다. 지난 21일, 만개하는 봄과 잘 어울리는 미니앨범 [The ReVe Festival 2022]을 발표한 레드벨벳이다. 바흐 G선상의 아리아를 샘플링해 발매 전부터 주목을 끈 “Feel My Rhythm”은 이야깃거리가 다양한 뮤직비디오로 많은 관심을 받고 있다. 이번 글에서는 보여지는 것을 중심으로, 이 곡이 들려주는 오싹하고 아름다운 리듬에 몸을 맡겨보고자 한다.
레드벨벳은 애초부터 그룹의 색을 '강력하고 매력적인 레드'와 '클래식하고 부드러운 벨벳' 두 가지로 나누어 운용해왔다. 양립하는 콘셉트는 한 그룹이 보여줄 수 있는 음악의 범주를 넓혔고, 대조를 통해 서로의 색을 더욱 선명하게 만들었다.
데뷔 초에는 레드와 벨벳을 명확히 나누는 듯했으나, 지금은 두 개의 콘셉트를 자유롭게 오가고 있다. 이 영리한 시스템은 구분되는 ‘레드’와 ‘벨벳’ 양쪽의 콘셉트를 융합해 ‘레드벨벳’이라는 다채로운 팀 컬러를 그리는 동시에, 보는 이들에게 ‘레드+벨벳’이라는 이중적인 환희를 선사한다.
레드벨벳의 특기인 분열과 대비, 융합은 음악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Feel My Rhythm”은 장르로 보나 비주얼로 보나 뚜렷하게 벨벳의 색을 띠고 있지만, G선상의 아리아라는 서정적인 클래식 음악을 댄스곡으로 가공하는 동시에, CG로 명화를 그려내고, 클로드 모네의 화풍으로 히에로니무스 보스의 오브제를 심어놓으며 또 다른 대조를 만들어낸다. 이 얼마나 조화로운 불협화음인가.
3월 2일부터 시작한 프로모션에는 악보, 발레, 액자, 꽃, 목걸이 등 한결같이 우아하고 고상한 오브제들이 등장했다. 연이어 공개된 티저들 역시 비슷한 분위기를 공유하며, 이번 앨범의 벨벳 콘셉트가 점점 확고해져가는 듯했다.
그런데, 발매 3일 전 공개된 영상 여태까지의 예상과 추측이 한 순간에 뒤집혔다. 바로 어제까지만 해도 드레스 차림으로 정원을 거닐던 레드벨벳이 검은 날개를 펼치고, 악마 같은 형상을 한 이들에게 추앙받고 있었기 때문이다. 숨겨져있던 실체를 확인하고나자 그간 나왔던 사진들이 달리 보였다.
물론, SM이 대놓고 알려주기 전부터 평화롭고 화려한 풍경 속에서 섬뜩한 징조를 찾아내려 애쓰긴 했다. 레드벨벳은 반짝이는 포장지와 달콤한 사탕 안에 서늘한 날을 숨기는 데 능한 그룹이기 때문이다. 이제는 “예고 없이 등장”하는 일이 이 그룹의 정체성으로 다가온다. 이번에는 대체 어떻게 소름 끼치게 만들려고 이러는 것인지, 설레는 마음으로 “Feel My Rhythm”의 재생 버튼을 조심스럽게 눌러본다.
카세트테이프를 넣고 단추를 누르자, 달칵이는 효과음과 함께 우아한 선율이 흘러나온다. 낯익은 아름다움에 빠져들 준비를 하고 있으면, 웬디와 슬기가 악보 위에서 사뿐하게 기교를 부린다. 팀 이름을 아주 근사하게 읊는 조이의 목소리는 두 사람이 안내한 환상적인 세계로 들어가는 입구를 열어준다. 이때, 경이로움에 넋 놓고 있는 나를 깨우듯 익숙한 멜로디 위로 댄스 음악의 경쾌한 비트가 더해진다. 이 독특하고 짜릿한 변주가 한두 번이 아니라는 듯, 아이린은 "무도회를 뒤집"고, "작은 소란을 또 일으"킬 뿐이라고 노래한다.
이 자그맣고 소란한 전환은 장르를 클래식에서 케이팝으로 바꾸는 데 그치지 않는다. 뮤직비디오에서 오필리아, 그네 등 명화들을 실컷 오마주 하며 낭만적인 분위기를 전개해나가던 레드벨벳은 돌연 어둠의 세계로 우리를 초대한다. 흑조의 깃털을 꽂은 다섯 백조에 적응하기가 무섭게, 머리에 검은 면류관을 쓴 슬기가 나타나 한껏 기이하고 오싹한 검은 이미지들을 풀어놓는다. 킬링 포인트가 될 만한 구간으로(틱톡, 인스타 릴스, 유튜브 쇼츠 등 짧은 영상에 적응하는 세태라고 느껴진다) 빼곡한 최근 케이팝 기조에 반해, G선상의 아리아를 바탕으로 매끄럽게 이어지는 음악은 이 흐름을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만든다. "등장부터 인사까지 파격적인" 언사가 아닐 수 없다.
레드벨벳은 여기에 그치지 않고, 영 이상하게 생긴 분홍색 오브제를 뒤로 한 채 앞서 보여주었던 콘셉트와 도무지 연관 짓기 어려운 의상을 입고 제3의 공간에서 춤을 춘다. 부조화가 대놓고 드러나기 때문일까, 혹은 미를 잘 아는 사람들의 감각적이고 세심한 손길에 의해 잘 편집됐기 때문일까 "조금 낯선 다른 차원까지" 당도했음에도, 여전히 하나의 세계 속에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이제 레드벨벳이 우리를 데려간 시공간이 어떤 우주에 있는지 종잡을 수 없는 데도 말이다.
새 가면을 쓴 이들에게 둘러싸인 슬기가 보는 사람들을 사로잡고, 묘한 표정을 한 아이린이 의문을 더하며, 웬디가 더 깊은 곳으로 이끌리듯 들어가는 중에도 레드벨벳의 축제는 계속된다. 이제 귓가를 맴도는 아름다운 선율은 만화 ‘End of Evangelion’이 참혹한 전투 장면에 동일 곡을 삽입한 것처럼, 상반된 분위기를 조성해 보는 사람을 기이하게 만드는 장치로 다가온다. 이 경건한 기괴함이란 얼마나 감동적인지.
"Feel My Rhythm"은 핏기 없는 얼굴과 발갛게 물든 양 뺨을, 길고 풍성한 분홍색 드레스와 머리부터 발끝까지 검은 의상을, 딸기와 꽃으로 장식된 화관과 덤불처럼 솟아난 면류관을, 동화와 종교화를, 낭만과 타락을, 지상에 피어난 화사함과 지옥에 산재한 잔혹함을 하나의 무대에 올린다. 나는 감히 레드벨벳의 미학이 이 엇갈림, 즉 ’정반합‘에서 탄생한다고 말하고 싶다.
레드벨벳은 튜튜를 입고 우아한 동작을 취하다가도, 갑자기 무대의상 같은 차림으로 나타나며, 야차를 닮은 무엇에게 딸기를 내밀다가, 15년도에 발매된 ’Ice Cream Cake‘ 앨범 아트에 있던 새들을 불러온다. 서로 연관 없어 보이는 것들이 난데없이 한 폭에 담겼다가 프레임 밖으로 날아간다.
레드벨벳은 이처럼 이질적인 사물들을 '폭력적으로' 결합하기를 즐긴다. 설레는 목소리로 사랑에 빠졌다고 하면서 서로에게 아무렇지 않게 폭력을 휘두르거나, 살인을 일종의 놀이로 여기는 잔악함을 보이는 건 이들의 특기이지 않은가. 지금은 당연하게 느껴지지만, 당시에는 약간의 위험을 안고 있는 파격적인 시도였다. 이 낯설면서도 매혹적인 비유들은 결과적으로 성공했고, '행복'과 '덤덤', '빨간 맛'을 부른 그룹에게 호러라는 수식어를 붙였다.
사실 이런 난데없는 결합은 케이팝의 탄생 배경이자, 본질이다. 케이팝은 분명 우리가 만들고 가꿔온 우리의 문화지만 내용물은 생각만큼 한국적이지 않다. 90년대 대중음악에 뿌리를 두고 있는 케이팝은 이름부터 Pop에 영향을 받았음이 여실히 드러난다.
이러한 맥락에서 케이팝은 한국에서 새롭게 탄생한 장르라기보다, 전 세계의 문화를 한데 섞을 수 있는 그릇에 가깝다. 결코 비하가 아니다. 근본 없-기 때문에 무엇이든 흡수할 수 있는-음이야말로 케이팝이 매력적인 이유다. 케이팝이 아니라면 클래식을 대중가요로 부르고, 무용과 아이돌 안무를 오가면서, “꽃가루 날리며” 타락(유혹)을 논하는 음악을 또 어디서 만나겠는가. 레드벨벳이 우리에게 “상상해 봐 뭐든지”라고 선뜻 말할 수 있는 이유가 여기 있다.
아이돌에게 스토리 텔링은 중요한 문제다. 자신들만의 이야기를 써내 보는 사람을 '과몰입'하게 만드는 동시에, 다른 그룹과의 차별화를 꿰한다. 최근 몇 년간 데뷔한 그룹에게는 저마다의 서사가 있고, 이를 풀이하는 글과 영상 또한 끊임없이 생산된다.
그중에서도 레드벨벳의 M/V 해석은 공급도, 수요도 단연 돋보인다. 대개의 아이돌들이 구축한 세계관이 팬덤 내부에서만 공유되는 것에 반해, 레드벨벳의 세계관은 대중성을 기반으로 팬덤 외부에서도 자주 소비된다. SM이 즐겁고 신나는 음악에 자세히 살펴보지 않으면 지나치기 쉬운 메시지를 심는다는 사실이 케이팝 향유자들에게 널리 알려져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면에 보다 많은 사람들을 끌어들이기 위해, SM은 탐미적인 결과물을 만드는 데 주력한다. 우선 보기에 좋고 예쁜 것들을 사용해 시선을 사로잡고, 그와 상반되는 기괴함을 곳곳에 심어 호기심을 불러일으킨다. 클래식과 명화라는 고전적인 소재를 차용한 "Feel My Rhythm"에서는 이 대비가 더욱 두드러진다. 뮤직비디오는 히에로니무스 보스의 '세속적인 쾌락의 정원'을 배경으로 삼는다. 예리와 조이는 에덴동산과 인간세계에, 아이린과 슬기는 지옥에 머물며, 웬디는 그곳으로 '유혹 당하는' 인물이다.
세속적인 쾌락의 동산에 다수 등장하는 딸기는 쾌락을 뜻하는데, 뮤직비디오에는 딸기를 주거나, 먹거나, 움켜쥐는 장면들이 반복적으로 나온다. 각자의 역할은 몰라도, ’딸기‘가 웬디와 조이, 예리를 슬기와 아이린이 있는 저편으로 끌어당기는 매개임은 틀림없다. 딸기가 지닌 상징성 즉, 돌이킬 수 없는 유혹은 우리에게 함의적인 과일로 익숙한 석류를 연상시키며, 페르세포네를 떠올리게 만든다. 뮤직비디오에서 이미 비너스와 오르페우스 등 신화 속 인물이 등장하는 명화를 여럿 오마주 했기에 이 가능성 또한 재고해 보게 된다.
하지만 상징 분석에는 별 재주가 없을뿐더러, 이미 구체적이고 흥미로운 해석들이 많이 나왔기에 여기에 대한 의견은 접어둔다. 그저 이 무궁무진한 함의에 덧붙이고 싶은 말이 있다. 레드벨벳이 풀어주는 세계관에는 정답이 없는 게 당연하게 느껴진다는 점이다. 우리를 "오만과 편견"에 가두지 말라는 가사처럼, 레드벨벳은 레드와 벨벳, 그리고 레드벨벳의 세계에서 대중들이 던지는 모든 오해와 이해를 수용한다.
모호하지만 매혹적인 비유, 실제 없는 실재, 부조화의 조화, 그럴듯한 스토리 텔링, 이 모든 것을 납득시키는 비주얼은 팬덤이 가장 가지고 놀기 좋은 먹잇감이다. 나는 이 수수께끼 같은 점이 레드벨벳의 매력이라고 생각한다. 각자의 입맛에 맞춰 마음껏 이해하고, 또 오해할 수 있게끔 적당히 혼란스러우면서도, 적당히 명확한 부분이 말이다.
같은 소속사의 에스파와 NCT의 경우 각각 방대한 설정과 복잡한 시스템 때문인지, 친절하게 세계관을 설명해 주는 영상이 있는 반면 레드벨벳은 데뷔부터 지금까지 언제나 보는 이들에게 전적으로 해석을 맡겨왔다. 에스파가 하나의 굳건하고도 웅장한 세계관 위에 쌓아올린 걸그룹이라면, 레드벨벳은 매 앨범 다른 콘셉트를 내놓으며 그 사이를 비교적 자유롭게 오간다.
따라서 레드벨벳이 구축하는 세계관 속 상징들은 때로 반복적이지만, 대개는 하나의 콘셉트 안에서만 유효한 경우가 많다. 매 앨범마다 다른 레퍼런스를 차용하고, 새로운 메타포를 내놓는다는 뜻이다. 7월 7일에서는 뱀파이어 콘셉트를 선보였고, 정규 1집 [The Red]는 여러 동화를 모티브로 하고 있으며, 피카부는 샤이닝을 필두로 이야기를 전개해나갔고, Feel My Rhythm은 인간의 타락을 암시하고 있다.
레드벨벳의 세상은 하나의 수식어로 정의할 수 없지만, 그렇기에 하나의 구심점이 생긴다. 대중에게 선보이는 이 모든 콘셉트들이 무대 위에 올린 역할극이라는 점이다. 앞서 말한 것처럼 레드벨벳은 종종 동화를 래퍼런스로 삼는데, 기존에 있던 이야기는 물론 새로운 이야기를 창조해내기도 한다. 현실세계를 동화로 변혁시키는 힘은 환상성에서 나온다.
레드벨벳의 뮤직비디오에서는 콜라주나 데칼코마니, 각종 작품 오마주, 갑작스러운 공간 전환 등 초현실주의를 연상케 하는 기법이 종종 사용된다. "내 맘을 적시며 번지는 빛"(Rainbow Halo), "내일은 어떤 맛일지"(Good, Bad, Boy), "눈을 감고서 잘 들어봐 여름이 오는 소리를"(여름빛), "투명한 내 맘속 Wine 가득히 차올라 저 하얀 달 위로 쏟아"(BAMBOLEO) 등 (공)감각적인 표현을 살린 가사 또한 환상성을 부각하는 요소다. 물론 이는 어느 한 그룹의 전유물이 아니지만, 레드벨벳의 경우 상황이나 감정을 아름답게 표현하는 데 그치지 않고 그 환상성을 기반으로 "온 세상 모든 경계가 휘저"어진 신비로운 세계를 그려낸다는 특징이 있다.
강렬하고 매력적인 레드와 클래식하고 부드러운 벨벳 사이, 레드벨벳은 "오른쪽을 고르면 또 또 난 왼쪽이 맛있어 보"(Taste)이고, "이랬다저랬다 나도 내 맘 모르겠"(In & Out)다며, 어느 한쪽을 선택하기 어렵다고 말한다. "눈을 감고 골라 모르니까 더 Attractive'(Good, Bad, Ugly)"하다며, 고민 자체를 즐기기도 한다. 다분히 이분법적인 사고를 팀 색깔의 기반으로 삼아, 양쪽의 세상을 자유롭게 넘나드는 존재가 되는 것이다.
레드벨벳은 보란 듯 과일이 가득한 세계를 자유로이 탐험하는 동시에, 도망치는 피자배달부를 석궁으로 맞추길 즐기며, 세속적인 쾌락의 동산과 양산을 든 여인을 오간다. 레드벨벳이 지닌 양면성은 이들을 지켜보는 사람들에게 포장지를 완전히 풀기 전까지는 그 안에 무엇이 들어있는지 쉽게 단언할 수 없다는 긴장과 기대를 선사한다.
The Reve Festival, 레드벨벳이 벌이는 꿈의 축제라는 앨범명 안에서 그 환상성은 더욱 짙어진다. Queendom에서 마법진이 새겨진 맨홀 안으로 들어간 에어팟이 신비한 마법세계로 이끌었던 것처럼, 레드벨벳은 클래식의 케이팝 샘플링을 통로 삼아 우리를 이곳이 아닌 저곳으로, 저곳이 아닌 이곳으로 우리를 안내한다. 일상성이 배제된, 그러나 현실과의 경계가 흐린 "상상할 수 없던 곳"에 세워진 왕국에서는 지금 축제가 한창이다.
이 축제가 매혹적인 것은 일상에서 벗어난 곳에서 일상을 변화시키는 일이자, 영원하지 않기 때문이다. 가사에 의하면 춤을 추는 건 "달빛"이 보이는 "밤"으로, "해"가 떠오르면 축제는 막을 내리게 되어있다. 끝날 것이 정해져있음에도, 노래는 이 축제가 "끝나지 않는 꿈"이라고 속삭인다. 이 아이러니함은 "이 순간을 놓지" 못하게 만들며, "온 세상이 멈"춘 것 같은 착각 속에서 레드벨벳이 들려주는 음악에 맞춰 춤을 추게 한다. 말 그대로 "Feel My Rhythm"인 셈이다.
정반합(正反合)의 공식 속에서 레드벨벳은 끊임없이 이전의 자신들을 극복해나간다. 지금 벌어지고 있는 이 환상적인 무도회가 영원하지 않다는 게 아쉽지 않다고 하면 거짓말이겠지만, '세속적인 쾌락의 동산'을 지나면 나올 또 다른 세상이 기다려지는 것도 사실이다. 데뷔곡에서 선언한 것처럼 레드벨벳의 모든 행보가 곧 "어제 오늘 내일의 행복을 찾는 나의 모험일기"이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