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과 어둠, 삶과 죽음. 상반된 개념에서 시작되는 <조명가게>에서 영지는 언제나 빛을 잃지 않는다. 중환자병동의 24시간 환한 형광등 아래서 환자들을 돌보고, 어두운 병실이 무섭다는 목소리에 빠르게 작은 조명을 켜준다. 모두가 캄캄한 암흑에 혼란해할 때 길을 잃지 않는 유일한 사람, 나 홀로 어둠을 통과해가는 사람을 결코 지나치지 않는 사람. 영지의 차분하고 단단한 모습을 그린 박보영은 자신의 모난 것 없는 둥근 얼굴로 누구나 쉽게 다가갈 수 있는 영지를 완성했다. 우리가 박보영의 작품에 안정적으로 안착할 수 있는 건 그가 성실히 마련해준 도움닫기가 있기 때문이다.
- 싱가포르에서 진행된 ‘디즈니 콘텐츠 쇼케이스 APAC 2024’ 행사에서 디즈니 공주 같은 모습으로 연일 화제에 올랐다.
=(박수 치며) 예상치 못하게 사진에 대해 많이 이야기해주셔서 놀랐다. ‘와, 성공했다…’고 생각했다. (웃음) 아무래도 그때 미니와 미키를 함께 만난 게 행운이었던 것 같다.
- 강풀 작가와 배우 박보영의 조합이란 소식에 많은 사람들이 기대를 품었다. 그렇다면 배우 박보영은 <조명가게>를 준비하며 어떤 점을 가장 기대했나.
=어릴 적 웹툰 <조명가게>가 연재될 때 다 챙겨 보았다. 강풀 작가님의 작품을 그만큼 좋아한다. 대본을 받기 전까지는 내용이 가물가물했는데 신기하게도 대본을 읽기 시작하자 모든 게 떠올랐다. 단숨에 작품에 빠져들며 꼭 함께하고 싶다고 생각했다. 내가 맡은 영지는 원작과 달리 각색된 부분이 있어서 이 지점에 가장 큰 기대를 갖고 있다. 다른 사람들이 영지를 어떻게 받아들일지 궁금하다.
- 중환자병동에서 일하는 영지를 이해하기 위해 실제로 같은 부서에서 일하는 친구의 조언을 받았다고. 박보영 배우는 평소 자신이 맡은 역할에 관한 정보를 수집하고 탐색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이러한 탐색이 역할에 어떤 영향을 준다고 생각하나.
=우선 작품에 담긴 주제를 대하는 자세나 마음가짐에 큰 영향을 준다. 인물이 살아가는 세상에 대해 어떠한 정보도 얻지 않고 이입하면 그 인물이 직면하는 물음표에 배우로서 대답할 수 있는 게 거의 없다. ‘이럴 때 이 친구는 어떻게 말할까? 이 상황에서 어떤 식으로 반응할까?’ 내가 나한테 주는 질문을 깨나가는 것부터 어려워진다. 캐릭터를 완전한 나의 것으로 체화하기 위해 그 문화권과 정보에 대해 공부하면 적어도 제약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다. 이건 연기를 위한 기본자세라고 생각한다. 이 자세가 갖춰진 다음에 대본을 보고 세계관에 들어가야 캐릭터를 입체적으로 그려낼 수 있다.
- 병원 건물에서 승원(박혁권)을 만나 그의 눈물로 엘리베이터가 잠기는 장면이 있다. 촬영 과정이 쉽지 않았을 것 같다.
=정말 쉽지 않았다. 무릎에서 정강이까지 물이 차오르는 장면은 일반 세트장에서 촬영했고 나머지 신은 수중 세트에 엘리베이터를 통째로 완전히 담가서 촬영했다. 수중촬영이 처음이었지만 개인적으로 물을 친숙하게 생각하는 편이어서 크게 무섭지는 않았다. 무엇보다 <힘쎈여자 도봉순> 때부터 나와 비슷한 체구로 늘 대역을 해준 스턴트 배우가 있는데, 그 언니의 얼굴을 보는 순간 안도감이 밀려왔다. 이외에도 곳곳에 많은 안전요원이 있어서 안전하게 촬영을 마칠 수 있었다.
- “난 지금도 가끔 누군가를 봐요. 사람인지 아닌지 모르겠는 사람. (중략) 의식이 없는 사경을 헤매는 환자였어요. 그래서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걸 할 뿐이에요.” 알코올중독 환자에게 혼자 이룰 수 없는 의지에 대해 말해주는 이 대사는 <조명가게>를 아우르는 중요한 메시지이지만 아직 시리즈 중반이기에 너무 힘을 주면 안되는 미션이 있다. 이 대사를 어떻게 전달하고자 했나.
=이 신은 준비를 정말 많이 했던 장면이다. 영지의 경험과 삶에서 비롯한 이야기를 직접적으로 고백하면서 응원의 마음도 함께 전해야 했다. 동선에도 많은 변화가 있었다. 원래는 앉았다 일어났다 하며 동선이 조금 더 복잡했는데 현장에서 김희원 감독님이 직접 해보고는 대사를 전하기 좋은 방향으로 정리해주셨다. 그런데 진짜 그대로 해보니까 훨씬 안정됐다. 그 덕에 영지의 대사를 더 담백하게 전할 수 있었다.
- 김희원 감독은 배우에게 주어진 장면적 미션을 피부로 이해하고 있는 듯하다.
=감독님은 디렉션이 정말 정확하다. “이런 느낌으로 말을 해달라”, “이런 분위기로 행동해달라” 등 추상적으로 디렉션을 주는 법이 없다. 정확하게 어떤 타이밍에서 몸을 쓰고 대사를 던져야 하는지 명확하게 짚어준다. 또 본인이 현장에서 시연해본 후 연기가 땅에 붙지 않는 부분들을 먼저 캐치하고 수정해주신다. 내게도 신기한 경험이었다. 어느 순간 무조건 감독님의 방향만 믿고 따라가면 된다고 믿었다. 정말 김희원 감독님에게 많이 의지했다.
- 박보영 배우의 시간을 돌아보면 어떤가. 나 혼자 감당하고 버텨왔다고 생각했는데 돌이켜보면 누군가의 의지가 자신에게 힘을 더해준 경험이 있다면.
=힘들 때에는 아무것도 안 보이는 것 같다. 내 주변에 얼마나 좋은 사람들이 많이 있는지, 그들이 나를 위해 얼마나 많이 고민하고 노력했는지. 최근 문상훈님 유튜브에서 이런 말을 들었다. “좋은 말은 항상 글로 남기고, 나쁜 말은 말로써 휘발되게 한다”고. 그래서 많은 사람들에게 편지를 쓰고 문자를 보낸다. 고맙다는 말을 영영 남기고 싶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내 주변에 있는지 아는 것도 중요하다.
- <오 나의 귀신님> <힘쎈여자 도봉순> 등 명랑하고 밝은 캐릭터가 주를 이루었던 2010년대 초중반과 달리 어느 시점에서부터 차분하고 온도가 낮은 캐릭터를 선택해온 듯하다. 박보영의 화살표 변경은 어떤 연유에서 시작된 것인가.
=항상 밝은 성격의 인물을 맡아오다 보니 대중에게 지루하게 느껴지지 않을까 걱정됐다. 무엇보다 내가 스스로 반복되는 연기를 하는 느낌이 너무 싫었다. 뭔가 발전하지 않고 그냥 그 자리에 편안하게 머무는 느낌이 들었다. 그래서 다른 것을 해보고 싶었다. 이제 내게도 30대의 얼굴이 잘 보인다. 다양한 장르, 다양한 캐릭터를 시도할 수 있을 때가 왔다고 생각해서 그때부터 조금씩 나의 범위를 넓혀나갔다. 그런데 요즘은 다시 또 그렇게 사랑스러운 로코가 하고 싶다. 푸하하!
- 늘 일기 쓰길 좋아하는 박보영은 작품이 한편 끝날 때마다 그 인물에게 편지를 쓴다고. 영지에게도 편지를 남겼나.
=편지를 쓰긴 썼다. 내가 뭐라고 썼더라…. (한참 고민한 후) 어머! 편지 내용이 기억났다! 말 못한다, 못한다. 언젠가 말할 수 있으면 좋겠지만… 말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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