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굉장히 난감한 영화였음
이 감독의 전작 중에 괜찮게 본 것도 있는데
이 호불호 갈릴만한 작품에서 불호의 극단에
내가 있을 줄이야 ㅠ 그러니까
너무 정성스럽게 퀄리티를 높이고자 하는
시도가 많아서 못 만들었다고 하긴 어렵지만
오히려 그냥 재미없거나 완성도가 낮은
영화들보다 심적 데미지가 심한 느낌?
일단 영화를 보면서 상당히 힘들었던 건
'정말 이 얘기가 재밌나' 하는 거였는데 ㅠ
잘쓴 소설과 잘 만든 영화는 상당히 다름
소설은 이상할 정도로 수용력이 높아서
플롯이 없거나 나쁘거나 이상해도
문장이 준수하고, 의식의 흐름이 흥미롭고
작가가 개념 설계를 잘 하고
의미가 좋거나 이미지와 묘사가 아름다우면
그걸로 소설 전체를 먹여살릴 수 있고 심지어
매우 뛰어난 문학 작품이 되는 것도 가능함

근데 소설을 영화로 만들면 압축 손실이
엄청나게 발생해서 장면과 캐릭터, 플롯 외에
굉장히 많은 부분이 죽게 됨
히가시노 원작이 영상화에 강한 이유는 그의
소설에서 문장을 싹 날려도 골격이 남기 때문임
그러니까 아가미는 이미지와 관계의 모호성,
환상성과 탐미성에 주력한 이야기 같은데
뼈대 자체는 그만큼 강하지 않아서 컨셉과
소재가 약속하는 전개와 결말을 주지 못함
그리고 아가미는 이것을 아름답다고 느껴라,
이 관계를 복잡하게 읽어라, 이 고통을
문학적으로 받아들여라 ㅠ 하고 상당히
구체적인 감상법을 요구하는 종류의 작품이라
근본적인 미학에 동의하지 못하면, 이를테면
신비하고 수동적이며 무력한 미소년이 끊임없이
수난에 빠지는 모습을 탐미적으로 담는다든가
자기연민 가득한 인물의 추락이나 방황을
극적이고 아름답게 표현하는 것 등에
거부감이 있을 경우에는
강력한 심적 저항을 받게 됨

기이한 유럽 배경이나 재즈의 불협 화음
배우의 어색한 더빙 같은 요소들은
여기에 더해지는 추가 감점인데
이 영화의 난해하고 괴상한 문어체 문장은
전문 성우에게도 매우 까다롭기 때문에
아무리 낭독을 잘하는 사람이라도
자연스럽게 읽기는 쉽지 않을것임
하지만 전문 성우가 했으면 양식적인 연기가
비현실적인 그림과 문어체 언어에 맞물려서
최소한의 모양새는 맞출 수 있었을테고
배우들의 비교적 현실적인 호흡과 목소리에
절대로 자연인이 하지 않을 문장과
이상한 이야기 및 작화가 합해져서
마이너스 시너지가 강력하게 나는
지금의 사태는 맞이하지 않았을거라서
이게 결정타가 되는 것이지 ㅠ
결국 개별 요소가 나쁘지 않을수도 있는데
그 조합을 너무 견디기 힘들었음
조향사가 정성스럽게 10개의 향을 골라서
아름답게 피웠는데 하필이면 그 10개가
전부 내가 싫어하는 것들이라 2시간동안
꼼짝달싹 못하고 감금 당하는
그런 기분이었달까 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