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놓친 것이 무엇일까. 첫 번째 소년. 엄마를 기다리는 소년. 두달이나 엄마는 집에 오지 않는다. 오늘 온다고 해서 저녁을 준비한다. 하지만 소년이 모르는 건 엄마는 오늘 저녁에 오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이다. 아마 앞으로도 오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엄마는 다른 가족들과 함께 저녁을 먹어야 하기 때문이다. 두 번째 소년. 소년의 친구. 얼굴을 숨기고 간드러진 여자 목소리로 마이크를 잡고 캣피싱을 하는 ‘넷카마’ 소년은 오늘 밤에도 여왕벌처럼 욕정에 사로잡힌 남자들을 꼬드긴다. 하지만 언젠가는 발각당할 것이다. 다만 그때가 오늘이 아닐 뿐이다. 그다음, 한 소녀. ‘나비 약’이라고 불리는 다이어트 알약 펜터민을 먹으면서 화장실 변기에 토하고 또 토한다. 살이 찌면 안돼. 하지만 소녀는 이미 앙상해 보인다. 게다가 부작용으로 원숭이처럼 털이 무성하게 자라고 있다. 그저 그게 눈앞이 아니라 등 뒤 척추뼈를 타고 자라나는 게 다행이랄까. 하지만 “아빠처럼 키도 크고 게다가 힘이 세서 좋아” 마음을 사로잡은 소년과 섹스할 때조차 옷을 벗지도 못한다. 가엾어라. 네 번째 등장인물. 소녀를 한눈에 사로잡은 소년. 들리는 말에 의하면 예전 학교에서 유도를 하다가 “사람 하나 병신 만들었다”고도 하고, “여자 하나 임신시켰다”고도 한다. 그런 소년이 전학을 온다. 요염하게 눈웃음을 짓는 소년. 하지만 이 소년에게 소녀는 아무려면 어때, 라며 빠져들어 다 줄 결심을 한다. 다 준다는 말은 엄마 대신 소녀를 지켜주겠다고 맹세한 첫 번째 소년을 마음 아프게 할 것이다.
여기까지 따라오면 무슨 일이 생길지 알 수 있을 것이고, 그리고 예상했던 그 일이 생기고, 그리고 예상보다 더 나쁘게 벌어지고, 또 그리고 그래서 더 나쁜 일이 벌어질 수 있는 끝까지 간다. 한창록감독의 <충충충>은 애벌레 유충들이 꼼지락거리는 모습으로 시작한다. 아마 첫 장면만 보면 <蟲 蟲 蟲>으로 읽을 것이다. 엄마를 기다리는 용기(주민형), 여자 목소리로 넷카마 방송을 하는 덤보(신준항), 나비 약에 중독된 지숙(백지혜)은 학교라는 둥지를 벗어나지 못하면서 꿈틀거리는 애벌레처럼 보인다. 하지만 중간에 세번, ‘충동(衝動), 충돌(衝突), 충격(衝擊)’이라는 자막이 떠오른다(한자도 함께 괄호 안에서 화면에 오른다). 그러므로 <충충충>은 <衝衝衝>이다. 세명, 혹은 전학 온 우주(정수현)까지 네명이 계속 부대끼고, 뒤얽히고, 찌르고, 부딪친다, 는 제목. 누군가는 다섯명이라고 할 것이다. 영화 중간에 마치 그들의 운명을 예고하듯이 옥상에 올라가 자살을 중계방송하는 여고생을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운명을 예고하는 것처럼 영화가 시작하면 (마티외 카소비츠의 <증오>의 첫 대사를) 랩 가사처럼 프랑스어로 낭독한다. “건물에서 추락하는 남자의 이야기를 들어본 적 있어? 여기까지는 괜찮아, 여기까지는 괜찮아, 추락한다는 게 중요한 게 아니야. 어떻게 착륙하는가, 가 중요한 거지.” 네명 중 아무도 건물 옥상에 올라가지 않는다. 옥상에 올라간 여고생만이 뛰어내릴(지 그 장면을 찍지 않아서 보지는 못했지만 아무래도 그럴) 것이다.
하지만 그걸 지켜보는 당신은 감정이 동요되지는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한창록은 그런 정도로 그럴 거라고는 믿지 않기 때문이다. <충충충>을 보고 있으면 누가 누구하고, 누가 아무나하고, 아무나가 누구하고, 화해하거나, 타협하거나, 위로하거나, 이해할 수 있을 거, 라는 느낌이 전혀 들지 않는다. 명랑하지만 음울한 공기가 감돈다. 동화 같은 장면과 마주치기도 하지만 곧 이 장면이 분신 환각, 혹은 망상장애를 앓고 있는 상태라는 걸 알게 된다. 용기가 병원에 가서 의사를 만나지 않기 때문에, 나는 병명을 알지 못한다. 일인이역을 하면서 엄마와 대화를 나누는 용기가 해리장애가 아니라면 달리 무엇이겠는가. 이 방에 발을 들여놓으면 이미 잘못되었고, 잘못되어가고 있고, 그뿐만 아니라 점점 더 잘못될 것이라는 기분이 든다. 하지만 한창록은 그저 가엾다고 여긴 다음 재빨리 발을 뺀다. 지숙은 돈이 없고, 나비 약은 비싸다. 그러면 할 수 있는 방법은 자신을 때렸던 아버지에게 욕설이 담긴 문자를 보내는 것이다. 아버지는 마치 자판기처럼 50만원을 입금한다. 그러면 지숙은 만족한 웃음을 짓는다. 덤보는 ‘오빠들’에게 목소리의 퍼포먼스를 들려주면서 자기가 세상의 중심에 있다고 즐거워한다. 하지만 ‘오빠들’은 덤보를 찾아내서 조롱의 중심에 가둔 다음 침을 뱉고 뺨을 때리고 발로 밟을 것이다. 그리고, 그리고 우주가 남았다. 소문이 둘러싸고 있다. 소문을 찾아 인스타그램을 뒤진다. 몇명이 질문에 응답을 보낸다. 아이디 X는 우주 때문에 여동생이 자살했다고 알려준다. 하지만 그 응답이 정말일까? 그래서 딥페이크 조작으로 자위하는 동영상을 만들어서 뿌린다. 누가? 용기가. 왜? 지숙을 위해서. 지숙은 커터 칼을 들고 우주를 죽이겠다고 찾아간다. 그걸로 뭘 어쩌려고? 소파에서 지숙은 용기에게 기대어 앉아 독백하듯이 말한다. “이상한 이야기해줄까. 정우주한테 정신없이 처맞고 있는데 이상하게 마음이 편했어. 어렸을 때 생각이 났어. 아빠가 안 때리는 날에는 오히려 무서웠거든. 오늘은 얼마나 때릴까. 오늘은 얼마나 더 아플까. 그런데 맞으면 오히려 편해.” 그런 다음에 용기를 돌아본다. “너 왜 나 같은 애한테 그렇게 잘해줘?” 용기는 대답하는 대신 물어본다. “그 새끼 죽이면 돼? 내가 우주 죽이면 돼? 나 뭐든지 할 수 있어.” 그때 덤보가 두 사람을 찾아온다. “도와줄게, 다 죽이자 씨발.” 허공에 던진 휴지가 불타서 재가 되어 춤을 추며 지상에 떨어진다. 추락하고 있다. 아니, 착륙하고 있다. 하지만 재가 될 것이다. 아무도 후회하지 않을 것이고, 반성하지 않을 것이며, 그럴 바에는 차라리 체념하는 쪽을 택한다. 하지만 이들이 모르는 게 하나 있다. 종말 앞에 서면 더 멀리 나아갈 수 없다는 것이다. 너무 뻔한 진실. 왜 그걸 모르는 것일까. 하지만 어쩔 수 없다. 자기들이 돌아가기에는 너무 멀리 밀려와버렸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10대 소년, 소녀의 오류 추론. 이 오류의 가장 큰 문제는 무엇일까. 자신들이 20대를 맞을 리 없다는 믿음이다. 가능성이 없다는 믿음보다 더 놀라운 믿음이 있을까.
그러면 <충충충>은 무엇을 찍은 영화인가. 물론 추락의 속도를 찍은 영화이다. 한창록은 이 속도의 하강 포물선을 기록할 수 있다고 믿는다. 그리고 그 기록의 아름다운 숏들, 숏들 사이의 충돌, 숏을 만들어내는 여러 종류의 카메라, 한대의 디지털카메라에서 여러 개의 폰 카메라까지 들고, 그 카메라에 하나의 신을 마치 미분하듯이 잘게 쪼개 여러 개의 숏으로 이리저리 옮겨가면서, 그리고 그때마다 광각렌즈, 표준렌즈, 망원렌즈를 수시로 바꿔 달면서, 게다가 그걸로 만족하지 못하고 필터를 붙여서 화면을 채색한다. 그린 필터. 아름답기는커녕 세상이 녹슬어가는 것처럼 보인다. 서로 다르지만 같은 정동으로 그렇게 생기를 잃고 빛바래면서 마모되어가는 것만 같아 보이는 청춘의 부식(腐蝕). 핸드헬드로 부산하게 이동하는 카메라는 마치 더 빨리 추락하면 덜 아플 텐데 왜 이다지도 천천히 떨어지고 있는 것일까, 라고 푸념하는 것만 같다. 그러면서 수시로 카메라의 위치는 아래서 위로(low_angle) 올려다보는 위치로 옮겨간다. 무슨 문제가 생기는가. 이 자리로 가면(angle) 이 사람과 저 사람 사이에서 주고받으면서(shot_reverse shot) 진행하기 힘들어진다. 무슨 뜻인가. 두 사람 사이에서 상상선을 그어서(imaginary_line) 대화할 수가 없다. 그들은 각자가 각자의 방식으로 문법 안에서 고립되어 있다. 영화는 그들 각자를 마치 날 제발 혼자 내버려두세요, 라고 독백하는 것처럼 찍는다. 혹은 한창록은 그들 사이의 대화에 귀 기울일 생각이 없다. 어쩌면 그럴 겨를이 없는 것인지도 모른다. 왜 그런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는가. <충충충>은 틀림없이 편집실에서 오랜 시간을 보낸 영화(일 것)이다. 한창록은 하나의 신에 오래 머무는 걸 좋아하지 않는다. 어쩌면 등장인물들, 용기, 지숙, 덤보, 우주가 지루하게 생각하는 것인지 모른다. 일단 신이 시작하면 숏과 숏 사이의 간격은 건너뛰고(jump_cut), 그 사이에 있어야 할 시간은 사라진다. 그렇다. 내가 세상에 있어야 할 시간이 점점 사라져가고 있다. 종종 간격 사이의 논리는 사라지고, 그 사이에서 세상을 감각으로 재구성해보고 싶다는 운동의 경기장 안으로 들어선 기분이 든다. 네명의 소년, 소녀는 간신히 붙들고 있는 시간의 질서조차 놓쳐가는 것만 같다. 뒤에 있어야 할 장면이 다음 장면보다 앞질러 침입하기도 한다(flash_forward). 그래서 종종 편집의 리듬은 허우적거리고 있다는 느낌을 준다. 하지만 세상은 치밀하고 촘촘하게 이어져 있다. 그리고 삶은 조각나고 엉성하게 이어진다. 아뿔싸, 그렇게 산다고 세계가 그렇게 되는 것은 아니다. 경기는 엄격한 규칙으로 이루어져 있고, 바깥으로 나가는 출구는 닫혀 있다. 그래도 하여튼, 일단 세계 안에 들어서면 경기를 해야 한다. 하여튼, 이라니. 경기 앞에서 이보다 무서운 탄식이 어디 있겠는가. 어떤 경기? 여기서 살아야 한다. 그래서 흥분은 느껴지지만, 이 세계를 부숴버리기에는 몹시, 아니, 솔직하게 말하면, 거의 불가능하게, 힘겨울 것이다. 그래도 살아 있다는 기분을 느껴보고 싶다. 쉬지 않고 찌그러져가는 세계로부터 신음하듯이 흘러나오는 일렉트로니카 프로듀서 아티스트 리비게쉬의 브레이크 비트 샘플링은 그렇게 편집실에서 한 신 안에서 내리쳐 흩어놓은 숏들을 다시 하나로 가까스로 연결한다. 이 네명의 소년, 소녀에게 가까스로, 보다 더 적절한 부사(副詞)가 달리 무엇이겠는가. 세계를 부술 수 없다면 남은 방법은 하나뿐이다. 내가 부서지는 것이다. 이미 방법을 알려주었다. 마티외 카소비츠의 대사. “중요한 것은 추락이 아니”다. 하지만 아무도 착륙하는 방법을 알려주지 않으면 어떻게 할 텐가. 엄마, 그걸 가르쳐주어야 할 엄마, 용기의 엄마는 다른 가족과 살고 있다. 아빠, 그걸 가르쳐주어야 할 아빠. 지숙의 아빠는 돈을 입금할 뿐 통화하지 않는다. 덤보의 부모는 다른 소년들에게 집단 폭행을 당할 때 어디서 무얼 하는 것일까. 우주의 아버지는 우주가 업어치기로 내동댕이쳐질 때 멀리서 구경만 한다. 한명 더, 여고생이 옥상에서 뛰어내리겠다고 중계방송할 때 부모는 전화 한통을 하지 않는다. 남은 수단은 뛰어내리는 것뿐이다. 왜 이다지도 이들은 남김없이 버림받은 고아 상태처럼 보이는 것일까.
이 네명의 소년, 소녀, 혹은 한명 더, 중계방송하는 건물 옥상의 여고생, 이들을 둘러싼 세계의 풍경을 본다. 어쩔 수 없이 등교한 학교, 그렇지 않다면 지각할 리가 없다. 소란스럽지만 조금도 다정하지 않은 한반의 또 다른 소년, 소녀들. 그들은 누군가 피를 흘리면 도와주는 대신 앞다투어 폰을 꺼내 들고 동영상을 찍기 시작할 것이다. 그리고 잠시 후 그렇게 할 것이다. 그래서 학교가 끝나면 자신들의 방으로 피난을 간다. <충충충>은 학교와 방을 제외하면 전쟁이 진행 중인 (것만 같은) 폐허의 철거촌 풍경을 볼 수 있을 뿐이다. 여기에 드론이 날아와서 폭격해도 조금도 놀라지 않을 것이다. 우크라이나, 이란, 이스라엘, 주변의 중동, 그리고 한국의 고등학교 주변. 그들 사이에 아무 차이가 없다는 것을 어머니, 아버지, 어른들, 당신들만 모르고 있다. 오토바이 뒤에 사랑하는 지숙을 태우고 달려가는 용기의 저편으로 황량한 들판 너머 공장 굴뚝에서 무심하게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다. 두 세계는 상관없지만 공존하고 있다.
<충충충>을 장르영화라고 부를 수는 없지만 지숙은 팜므파탈(femme fatale)이다. 달리 무엇이라고 부를까. 지숙은 용기가 자기에게 순정을 바치고 있다는 걸 잘 알고 있다. 그런데도 용기와는 하지 않지만, 우주와는 한다. 너무 이르긴 하지만 그건 내가 간섭할 일이 아니다. 그런데 용기와 덤보는 버림받은 지숙을 위해서 우주의 옛 애인들을 찾아 나서고 딥페이크 동영상을 만들어 학교에 뿌린다. 그러자 지숙은 자신을 위해 한 일을 우주에게 알리고 그런 다음 용기를 함정에 빠트린다. 그래도 우주가 돌아오지 않자 이번에는 우주를 함정에 빠트린다. 아니, 정확하게는 계획을 실행하려다가 중간에 그만두려고 한다. 하지만 그 마음을 몰라주자 실행한다. 이번에는 겁만 주는 용기와 도망친 우주에게 지숙은 실망한다. 지숙이 그토록 허기진 것은 무엇일까. 자신의 욕망을 은폐시킬 수 있는 주변의 희생. 용기는 그걸 해야 한다. 용기는 거기서 멈추지 않고 칼을 들고 학교 교실까지 찾아가 우주를 찌른다. 피투성이가 된 우주. 그때 용기는 지숙이 진정 원하는 것이 뭔지를 알았다. 용기는 마지막 일격으로 칼을 들고 자기 가슴을 찌른다. 그 가슴에는 지숙을 위한 심장이 담겨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팜므파탈은 거기서 멈추지 않는다. 지숙은 사건 조사를 나온 수사관들 앞에서 거짓말을 한다. 팜므파탈은 용기를 위한 어떤 애도도 하지 않는다. 여기에는 어떤 교환도 없다. 어려움을 무릅쓰고 말하겠다. 지숙이 여기까지 따라온 당신을 괴롭히는 것은 <충충충>에 후회나 반성을 끌어들여서 안심할 수 있는 결말을 보장해주지 않는다는 것이다. 교실 창문에 매달려서 열심히 촬영하던 다른 소년, 소녀들이 모두 떠난 다음에도 자살하는 용기를 바라보는 건 지숙이다. 그 광경에서 지숙은 사랑의 시련을 느껴보지 않는다. 그러면 여기서 결말은 무엇인가. 영화가 끝난 다음 누군가 나 대신 같은 질문을 했다. 한창록이 조용하고 예의 바르게 알려주었다. “원래 제목은 벌레, 였어요. 그래서 충(蟲)이라고 지었는데 그러다가 충(衝)이라는 글자를 발견했어요, 그 글자에는 찌르다, 라는 뜻이 있어요. 저는 이 영화가 찔렀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아마 찌르고 싶은 분도 계실 것이고, 찔린 분도 계실 것입니다. 그렇게 찔리고 찌르면서 뒤엉키고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어요. 하지만 섣불리 희망을 말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여기서 희망을 찾지는 말아주세요.”(2026년 7월3일 밤, <충충충> 영화가 끝나고 난 다음 관객과의 대화에서, 정성일 진행).
https://cine21.com/news/view/?mag_id=11035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