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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퀘어 삼진그룹영어토익반) 씨네21 인터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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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10.29 12: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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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수야아!” <삼진그룹 영어토익반(삼토반)>에서 “아이 캔 두잇! 유 캔 두 잇! 위 캔 두 잇! 토익!”을 목놓아 외치던 데시벨이다. 한차례 화보 촬영을 마치고 배우 고아성과 이솜이 새로운 의상을 갈아입은 카메라 앞에 다시 섰는데, 한참을 기다려도 막내가 안 나타난다. 사라진 자매를 쾌활하게 부르는 언니들의 목소리 너머로 “다 입었어요. 갈게요”라며 웅얼거리는 목소리가 들린다. 배우 고아성, 이솜, 박혜수가 아닌, 삼진그룹 8년차 입사 동기 자영, 유나, 보람의 모습을 눈앞에서 보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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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5년 을지로를 배경으로 한 <삼진그룹 영어토익반>은 상고 출신 대기업 말단 사원 세 사람이 내부 비리를 세상에 알리는 내용을 담은 영화다. 토익 600점만 넘으면 상고 출신이라는 딱지를 뗄 수 있다는 꿈에 부풀었던 이들은 회사의 페놀 방류 사건을 접하게 된다. 생산관리3부 자영(고아성)은 페놀 방류를 목격하곤 문제의식을 느끼고, 마케팅팀 유나(이솜)는 자신의 지식을 동원해 페놀 방류를 세상에 알릴 구체적인 방법을 찾는다. 회계부 보람(박혜수)은 능력을 발휘해 수학적 근거를 뒷받침한다. 과연 이들이 승진이란 개인적 목표와 기업 비리 고발이란 사회적 목표를 동시에 성취할 수 있을까. 개봉 하루 전, 배우 고아성, 이솜, 박혜수를 만나 영화가 전하는 메시지와 그들이 재현한 90년대에 관해 이야기를 나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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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적이는 출근길, 인파를 뚫고 당찬 걸음으로 자영(고아성)이 걸어나온다. 곧게 편 어깨와 살짝 띤 미소 사이로 배어나오는 자신감. 8년차 베테랑 사원인 자영은 삼진그룹의 공장이 무단으로 폐수를 방출하는 것을 목격한 후 발로 뛰며 회사의 비리를 탐문한다.


배우 고아성은 그런 자영이 “히어로보단 작고 작은 존재”로 보이길 바랐다. “그래야 평소보다 용감하게 나설 때 자영의 의외성이 잘 드러날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래서일까. 모든 증거가 폐기된 때에도 포기하지 않겠다며 의지를 다잡고, “유 아 롱!”이라며 당당히 상대의 잘못을 꼬집는 순간마다 말단 사원인 자영은 그 누구보다 크고 단단한 존재로 다가온다. 조곤조곤한 말투로 적확한 말을 골라 인터뷰를 이어가던 배우 고아성에게서도 자영에게 보였던 올곧은 심지를 확인할 수 있었다.



-쉬는 시간에 책을 읽고 있던데 어떤 책인가.

=박완서의 <그 가을의 사흘 동안>을 읽고 있었다. 책을 좋아하는데 요즘엔 읽을 시간이 거의 없어서 틈날 때 조금씩 읽는다.



-표지 촬영 때의 밝고 당찬 모습들이 영화 속 자영과 겹쳐 보이더라. 실제 성격도 자영과 비슷한가.

=나는 좀더 내성적인 편이다. 그래서 영화 촬영 초반엔 가진 에너지를 전부 끌어올리느라 힘들기도 했다. 그런데 촬영이 다 끝난 뒤 지인들을 만나니 다들 나보고 외향적으로 바뀌었다고 하더라. 작품과 자영에게서 밝은 에너지를 받은 것 같다.



-많은 여성들과 연대하고 함께 대항하는 작품이라 에너지가 남달랐을 것 같다. 그런 면에선 전작 <항거: 유관순 이야기>(이하 <항거>)가 떠오르기도 한다.

=확실히 <항거> 때 배우들끼리 느낀 뜨끈한 연대가 있었다. <삼진그룹 영어토익반>도 같은 유니폼을 입고 여럿이 함께하는 영화고, 그런 데에서 느껴지는 강렬한 에너지가 있었다. 그럼에도 명확한 차이점이 존재했는데 <항거>가 한정된 공간에서 진행된 이야기이라면 <삼진그룹 영어토익반>은 밖으로 표출되는 이야기란 거다. 분위기도 더 명랑하고. 그래서 현장에서 우리만의 맵시 있는 느낌을 가지려고 했다.



-맵시 있는 느낌이란 어떤 건가.

=사실 이종필 감독님의 표현인데, 나는 인물의 마음가짐과 태도 역시 의미한다고 받아들였다. 말단 사원이지만 자기 일을 사랑하고, 자부심을 갖고 일하는 사람의 태도 같은 것 말이다.



-듣고 보니 자영의 첫 등장이 생각난다. 당당히 인파를 헤치고 나와 영어로 자신을 소개하는 모습에서 엄청난 자부심이 느껴졌다.

=그 장면을 가장 먼저 촬영했는데, 나를 소개하는 장면으로 시작하고 나니까 그 이후의 촬영은 순탄하게 흘러가더라. 하지만 그렇게 호기롭게 출근을 한 자영이 하는 일은 사무실의 쓰레기를 치우는 것이지 않나. 그런 식으로 상반되는 장면들이 영화에 계속 등장한다. 내가 할 일은 그 순간들마다 생겨나는 리듬을 최대한 파악하고 잘 표현해내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자영을 준비할 때 90년대에 실제 대기업 사원이었던 이모의 영향을 받았다고.

=이모한테 직접적으로 뭘 묻기보단 당시의 이모에 대한 잔상과 사진들을 참고했다. 예전엔 작품을 준비할 때 상황이 비슷한 인물에게 심층적으로 물어보곤 했는데, 이제는 주로 내가 분석한 걸 토대로 인물을 만든다. 그만큼 나름의 자신이 생겼다. 자영도 그동안 내가 만난 정의롭고 진심을 다하고, 선한데 뻔하지 않은 이들의 모습을 복합적으로 담아 만들었다.



-자영의 뻔하지 않음을 강조하기 위해 기울인 노력이 있다면.

=멋있어 보이는 순간이 없었으면 했다. 자영이 작고 작은 존재로 보여야 대기업에 당당히 맞설 때 자영의 입체감이 더 부각될 것이라 생각했다. 그래서 마지막까지 자영이 히어로처럼 보이지 않았으면 했다.



-OCN 드라마 <라이프 온 마스(라온마)>에서 윤나영 순경이 사용한 80년대 서울 사투리도 화제였다. 자영도 그렇고 디테일한 말맛을 잘 살리는 것 같다.

=촬영 전부터 자영의 대사를 전부 녹음해 듣고 다녔다. <라이프 온 마스>때부터 생긴 버릇이다. 언젠가부터 언어를 나 나름대로 보완하는 재미가 생겼다. 시대극을 연달아 해서인지도 모르겠다. 윤나영 순경은 80년대 특유의 수줍고 나긋나긋한 말투를 차용했다면 자영은 90년대의 당당하고 진취적인 분위기를 반영했다. 이런 식으로 시대적 차이를 드러내고 그걸 연기로 표현하는 것들이 재밌다.



-<오피스>의 미례, <자체발광 오피스>의 호원 등, 오피스물에 연이어 참여했다. 자영은 앞의 작품들과 어떤 차이가 있다고 봤나.

=자영은 내가 연기한 직장인 중 가장 이타적이다. 가령 폐수 보고에 관한 공을 최동수 대리(조현철)에게 돌리면서도 그런 상황을 속상하게 받아들이지 않는다. 무척 작은 존재지만 동시에 회사를 상대로 싸우는 가장 용감한 사람이기도 하고. 그런 이면들을 잘 보여주고 싶었다.



-자신의 작업실을 시정방(시간과 정신의 방)이라고 부르더라. 이 시정방에선 주로 무엇을 하나.

=원래는 연기 연습을 하고 싶어서 만든 작업실인데 이제는 집중이 필요한 일을 전부 거기서 한다. 나의 최후의 보루가 된 느낌. (웃음) 한번은 작업실에서 새벽까지 책을 읽는데 그 순간이 너무 좋아서 ‘아, 나중에 내가 이런 시간을 얼마나 그리워할까’, 그런 생각이 들더라. 그만큼 내게 무척 중요하고 소중한 공간이다.



-마지막으로 올해가 가기 전, 서른이 되기 전 바라는 점이 있다면.

=무사히 <삼진그룹 영어토익반>이 개봉하는 것. 그거 말고는 딱히 바라는 일이 없다. 이 영화가 현재 당면한 내 삶의 전부라 그런가보다. (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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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분한 목소리로 속삭이듯 말하던 전작의 모습과 다르다. 배우 이솜이 연기한 <삼진그룹 영어토익반>의 유나는 사람들 앞에 나서서 또랑또랑한 목소리로 이야기하는 인물이다. 적극적으로 몸을 움직여 삼진그룹의 페놀 비리를 기자에게 제보하고, 상무실에 잠입해서 비밀금고를 열 수있는 묘수를 떠올리기도 한다. 전작인 <소공녀>에서 좋아하는 위스키를 마시는 게 행복해 조용히 미소짓고 <마담 뺑덕>에서는 도시에서 온 남성에게 마음이 뺏겨 몰래 지켜보던 것과 대조적인 모습이다.


모델을 꿈꾸며 패션 잡지를 장식하길 원했던 이솜은 고등학생 시절 그 꿈을 이루고 지금은 배우로 활발하게 활동 중이다. 모델로서의 경험은 <삼진그룹 영어토익반>의 큰 자산이 되었는데, 의상팀과 함께 동묘시장을 찾았을 때 모델의 밝은 눈으로 90년대 스타일의 의상을 속속 찾아냈다. 가까이에서 본 그는 <소공녀> 속 미소와 비슷한 분위기를 풍겼지만, 실행력만큼은 <삼진그룹 영어토익반>의 유나와 꼭 닮아 있었다.



-원래 영어 이름이 제니퍼였는데, 미셸로 직접 바꿨다고 들었다. 재밌게 본 영화 속 인물 이름이라고.

=<퐁네프의 연인들>에서 배우 줄리엣 비노쉬가 맡은 캐릭터가 미셸이다. 어느 해 겨울 광화문 시네큐브에서 <퐁네프의 연인들>을 봤는데 정말 좋았다. 이후 레오스 카락스 감독의 팬이 되어서 그의 모든 영화를 찾아봤다.



-자영은 비리를 발견하고, 보람은 수학적 근거를 대는 캐릭터라면, 탐정소설을 탐독하던 유나는 내부 비리를 세상에 알리기 위해서 구체적으로 판을 짠다.

=맞다. 그런 유나를 표현하기 위해서 감독님과 고민을 많이 나눴다. 탐정소설 속 이야기와 유나가 실제로 행동하는 모습이 연결됐으면 좋겠다고 생각했고, 탐정소설을 언제 노출시키면 좋을까, 당시 유행했던 노스트라다무스 지구종말론에 대한 책은 또 어떨까, 소품 하나하나를 감독님과 함께 고민했다. 탕비실에서 신문을 읽던 유나가 커피를 타는 직원들에게 “대단하다 대단해”라며 힘 빠지는 소리를 한다. 원래 시나리오에는 신문이 아니라 탐정소설을 들고 있었는데 모든 장면에서 탐정소설을 소품으로 쓰기보다는 어떤 장면에서는 신문으로 바꿨으면 좋겠다고 감독님에게 제안했고 지금의 장면이 탄생했다.



-안 그래도 탕비실 신에 대해 묻고 싶었다. 유나가 커피를 타는 모습은 나오지 않는다. 남에게 시킬 것 같지는 않은데 유나는 언제 커피를 탔을 거라고 생각하나.

=유나라면 미리 타놨을 거 같다. 일에 대한 열정이 있고, 오르고 싶은 자리가 분명하고, 능력도 너무 좋은 친구라 미리 타놨을 것이다. 관객이 영화를 보고 유나의 진심을 아셨으면 좋겠다. 겉으로만 보면 자기 손으로 커피를 안 탈 것같이 외모는 화려하고 말로는 돌직구를 날리지만, 진작 탕비실에 와서 커피를 타놨을 친구다. (웃음)



-탕비실에서 유나가 산업혁명과 여성 노동의 역사적 맥락을 짚어주는 장면이 재밌었다. 연기하는 배우로서는 유나가 재수 없어 보이지 않고, 흥미로운 인물로 보이도록 톤 조절을 했어야 했을 텐데.

=자영, 보람 등 친구들에게 말하는 톤과 상사들에게 말하는 톤이 달랐다. 상사들에겐 긴장감이 있고 딱딱해 보이게 했다면, 친구들에게는 90년대 당시 톤으로 말했다. 탕비실 신에서 런던을 “른든”이라고 발음하는데, 당시 말투다. 나만 아는 미세한 차이다. (웃음) 90년대 자료들을 찾아보면서 그때 말투를 많이 연습했고 과하지 않게 그때 사용했던 단어들이나 뉘앙스들은 넣으려고 했다.



-유나가 쓰는 “썁썁년”이란 욕설도 90년대 표현인가.

=감독님이 90년대에 그런 말이 있었다고 하더라. 처음 들었을 때 이게 무슨 욕인가 싶고 너무 귀엽다고 생각했다.



-90년대 의상과 헤어, 메이크업을 위해서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고 들었다. 가족 앨범에 꽂힌 어머니 사진 중에 특별히 매료된 사진을 제작진에게 들고 갔다고.

=(휴대폰을 꺼내 기자에게 보여주며) 이 사진들이다. (웃음) 하나는 집에서 찍은 것이고, 하나는 결혼식장에서 찍은 것이다. 몇장 없는 엄마 사진들이다. 이 사진들을 보면 짠한 마음이 드는데, 한편으론 사진 속 엄마가 너무 멋쟁이시다. 이 시절의 엄마랑 유나는 다른 인생을 살았지만 영화 속에서 엄마의 모습을 담고 싶었다.



-90년대 의상을 표현하기 위해서 의상팀과 함께 동묘시장을 찾았다고 들었다.

=그 시대를 살았던 분들이 보고 “그 시대 느낌이 난다”고 얘기할 수 있으면 했다. 허투루 하고 싶지 않았고 과감하게 표현하고 싶었다. 테스트 촬영을 하기도 전인 영화 제작 초반, 영화 의상팀이 동묘시장에 간다기에 나도 가겠다고 했고, 동묘시장을 거의 다 돌았다. 같이 간 김에 피팅도 하면서 이런 핏으로 제작하면 좋겠다고 의견을 내거나, 유나나 자영이, 보람이에게 입히면 좋겠다 싶은 의상을 함께 찾아봤다.



-전작인 <소공녀>에서 연기한 미소는 자기 처지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타인을 향해 찌르는 말을 하지 않고도 자신을 지켜나간다. <삼진그룹 영어토익반>의 유나는 돌직구를 날리는 캐릭터라서 상반돼 보인다. 실제 성격은 두 캐릭터 중 어디에 더 가깝나.

=이런 질문이 항상 어렵다. (웃음) 이런 부분도 있고 저런 부분도 있다. 나는 아무래도 <소공녀>의 미소쪽에 가까운 것 같다. 우정과 사랑을 대하는 모습에 있어서 미소와 같다. 물론 시기에 따라 다르기 때문에 어떤 때에는 미소처럼 차분하고 유나처럼 에너지가 넘칠 때가 있다. 배우로서 여러 캐릭터를 해왔지만 거기엔 어느 정도 다 내가 있다고 생각한다. 시나리오를 선택할 때부터 어느 정도 공감이 되어야 하니까 캐릭터에서 나를 발견하고, 또 현장에서 연기하면서 내가 일정 부분 녹아들어간다.



-차기작인 단편영화 <울렁울렁 울렁대는 가슴안고>가 올해 부산국제영화제에 초청됐다. <소공녀>에 함께 출연했던 배우 안재홍의 연출작인데, 울릉도에 살고 있는 남자 친구를 찾아가 이별을 통보하지만 풍랑주의보로 섬에 발이 묶이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다. <소공녀>에서 사우디로 가버린 한솔을 찾아간 미소의 이야기와 비슷할 것 같은 예감이 드는데, 어떤가.

=전혀 다르다! 두 작품을 연결해서 생각하는 분들이 계실까봐 다른 톤을 표현하려고 감독님과 고민이 많았다. <울렁울렁 울렁대는 가슴안고>는 블랙코미디에 가깝다. 감독님이 블랙코미디를 만들어내는 능력을 가지고 있더라. (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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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진그룹 영어토익반>은 여직원들의 출근길을 보여주는 오프닝과 그 장면이 비슷한 구도에서 변주되는 후반의 어떤 신을 같은 날, 첫 촬영때 찍었다. “눈빛부터 발걸음까지, 그들이 어떻게 변했는지 보여준다. 타임머신을 타고 미래로 먼저 간 느낌이었다. 덕분에 이후 촬영에서 그 중간 과정도 방향을 잘 잡아 연기할 수 있었다.” 특히 박혜수가 연기하는 보람은 첫 촬영날 느꼈을 변화값이 가장 극적인 인물이다. 보람은 삼진그룹 영어토익반 친구들과 함께 페놀 유출 사건을 해결하는 수학 천재이면서, 무기력했던 그가 자신이 좋아했던 선배에게 의문을 갖고 질문을 던지며 한 단계 성장하는 독립적인 서사를 책임진다.



-포스터가 공개됐을 때 박혜수인지 아예 알아보지도 못했다는 반응이 많았다.

=그 반응이 너무 뿌듯했다. (웃음) 실제 머리를 자른 건 지난해 9월쯤인데, 개봉하기 전까지 비주얼을 철저하게 숨기고 영화가 공개됐을 때 관객에게 충격을 주고 싶었다. 그래서 지난해 청룡영화상 신인상 후보로 초청받았을 때도 가발을 썼다. 외적으로 강렬한 변신을 시도한 건 보람 캐릭터가 처음이다. 너무 좋은 경험을 했다.



-어떻게 보면 너드 캐릭터 계보에 있는 인물이라 볼 수 있다.

=걸음걸이나 손동작, 표정 같은 디테일을 많이 고민했다. 페놀 방류량을 계산할 때 주판 올리고 내리는 액션도 자연스럽고 빠르게, 실제 숫자에 맞게 연습했다. 아는 사람이 봤을 때 손동작이 틀리면 안되니까. 이런 너드 캐릭터가 대중의 사랑을 받기 좋은 매력적인 인물임은 분명하지만 자칫하면 허공에 붕 뜬 사람처럼 보이기 쉽다. 귀엽고 너드미도 있지만 현실감도 있어야 사람들이 자기 얘기 같다고 느껴 위로받을 수 있다. 그렇다면 보람에게 너드 같은 모습을 몇 퍼센트의 농도로 입혀야 하는가, 그런데 여성이 너드인 경우가 많지는 않더라. 레퍼런스로 찾아본 인물들이 대부분 남자였다. 아무래도 보람은 무성에 가까운 캐릭터 같다고 생각해서 소년 캐릭터를 위주로, 특히 <문라이즈 킹덤>의 샘 캐릭터를 제일 많이 참고했다.



-90년대 여상 출신 여직원과 <스윙키즈>의 양판례는 비슷한 면이 있지 않나.

=<스윙키즈>의 판례가 살았던 한국전쟁 시대의 성차별이 훨씬 심했다. 판례가 더 강한 압박 속에서 벗어나려고 애쓰는 인물이었다면, 보람은 그 시기보다는 잔잔하지만 엄연히 존재하는 차별을 겪는다. 수학올림피아드에서 우승할 때는 지금 모습처럼 주눅 들지는 않았을 텐데, 분노하기 보다 체념하고 포기한 상태가 됐다. 자영(고아성)이 페놀 유출 사건을 직접 해결하고 싶다고 할 때 보람은 적극적이었다기보다 그냥 친구가 하니까 끌려간 것이다. 그러다 이 일을 하며 자신이 진정 살아 있다는 걸 느끼고 자기 삶을 의미 있는 것으로 만들어 나가려고 한다.



-고아성, 이솜과 한 숙소에서 모여 잘 만큼 가깝게 지낸 듯한데.

=내가 기대했던 게 100이라면 실제로 얻은 게 1000 정도다. 요즘 인터뷰에서 이런 얘기를 할 때마다 항상 운다. 완전 주책바가지다. (웃음) 일을 하며 정말 좋은 분들을 많이 만났고 인복이 많다고 생각하는데, 유독 언니들이 더 애틋하고 소중하다. 또래 여성이라 그런 것 같다. 내가 겪고 있는 아픔도 언니들이 겪어봤을 아픔이고, 내가 하고 있는 고민은 언니들 역시 해봤을 고민이다. 그런 부분에서 내가 얻는 위로가 너무 많다. 그리고 진짜 신기한 게, 현장에서 서로를 아끼고 사랑하는 마음으로 영화를 찍고 나니 그 기운을 관객도 느끼는 것 같다. 영화 홍보 활동도 셋이 놀러다니는 것 같은 마음으로 하니까 그 모습을 보고 영화가 궁금해졌다는 분들도 있었다. 2019~20년에 내가 얻은 게 있다면 언니들이다.



-국문과 출신이고, 지금도 시나 가사를 쓰는 것을 보면 글쓰기에 대한 욕망이 남아 있는 것 같다. 연기와 맞닿은 부분도 있나.

=예전에는 꿈이 많았다. 내 삶을 기록으로 남기고 싶은 욕심이 있었다. 연기도 내가 남기는 기록 중 하나지만 음악이나 글쓰기쪽이 좀더 개인적이다. 예전에는 막연하게 글을 쓰고 싶다, 책을 쓰고 싶다는 생각을 했는데 나이를 조금씩 먹어갈수록 그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절감한다. 내가 쓴 글을 세상에 내보인다는 건 엄청난 무게감을 느껴야 하는 일이다. 하지만 글은 계속 쓴다. 현장에 있다 집에 돌아왔을 때 그날의 감흥을 일기로만 적는 게 아니라 시의 형태로 기록할 때도 있다. 이후 연기를 하느라 마음 한켠에 숨겨두고 있던 노래에 대한 꿈도 다시 꾸고있다.



-드라마 <용팔이>로 배우 데뷔를 한 후 <청춘시대> <내성적인 보스> 등으로 빠르게 주연을 맡았다. 그런데 이후 행보를 보면, 신인배우들이 다양한 필모그래피로 노출 빈도를 높일 시기에 공백기가 있었다.

=시작할 때 엄청 바쁘게 휘몰아치듯 일을 하다가 어느 순간 뚝, 끊기고 일을 쉰 적이 있다. 아마 회사에서 엄청 골치가 아팠을 거다. (웃음) 내가 내린 결정이었다. 그 당시 나에게 주어지는 많은 기회와 운을 완벽히 소화하지 못했다. 아무리 준비를 하고 현장에 가도 자신감이 부족했고, 일을 쉬지 않고 하다보니 내 자신을 칭찬해줄 시간 없이 스스로를 다시 몰아세워야만 했는데, 어느 순간 벼랑 끝에 홀로 서 있는 쓸쓸함을 느꼈다. 그래서 진짜 아무것도 안 해봤다. 오늘은 밥 먹고 설거지만 해야지, 오늘은 책만 읽어야지. 그렇게 고요하고 잔잔한 시간을 보냈다. 내 안에 쌓여 있던 찌꺼기가 빠져나가면서 마음에 디톡스가 되더라. 시기적으로는 더 많은 작품을 하며 나를 알리는 게 좋았을 수도 있다. 휴식 후 만난 작품은 온전히 가능한 모든 에너지를 쏟을 수 있었다. 작품을 천천히 만나면서 내가 진정으로 행복할 수 있었다. 연기에 대한 고민은 늘 어렵고 힘들지만 궁극적으로 행복감이 더 커야 오래오래 연기할 수 있다는 것도 이번에 깨달았다. 나에겐 옳은 선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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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필 감독의 상업영화 데뷔작 <전국노래자랑>(2013)은 <전국노래자랑> 무대에 서는 게 꿈인 평범한 사람들의 이야기였다. 두 번째 영화 <도리화가>(2015)는 여성은 소리를 할 수 없던 시대에 판소리에 도전했던 여성과 그 스승이 주인공인 이야기였다. 현실의 벽에 부딪히거나 무언가에 도전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는 <삼진그룹 영어토익반>의 이야기와도 상통한다. 이종필 감독은 “직업인으로서의 영화 연출자”라는 말을 반복하며, 맡은 일에 최고로 숙련된 솜씨를 보여주는 영화 속 주인공들처럼 “최선을 다해 이번 영화를 잘 만들고 싶었다”는 이야기를 전했다.


<삼진그룹 영어토익반>은 글로벌이 화두였던 1995년, 삼진그룹의 상고 출신 직원 자영(고아성), 유나(이솜), 보람(박혜수)이 어쩌다 회사의 페놀 유출을 목격하고 내부고발하는 이야기를 만화적 톤으로 발랄하게 그린 영화다. ‘파이팅’하는 삶과는 거리가 멀었던 이종필 감독을 저절로 파이팅하게 만든 영화 <삼진그룹 영어토익반>에 대해 시시콜콜 이야기를 나눴다.



-전작 <도리화가> 이후 5년이 흘렀다. 그동안 어떻게 지냈나.

=<도리화가>가 결과적으로 잘 안됐는데, ‘이 영화는 왜 안됐을까’ 생각해보니 다 내 잘못이었다. 관습적으로 영화를 해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영화광에다, 영화학교(한국예술종합학교) 출신이다. 졸업 후 상업영화 연출을 맡게 됐을 때 그 누구도 내게 ‘상업영화는 이래야 돼’라고 말하지 않았는데 스스로 ‘상업영화는 이래야 돼’라는 관념으로 영화를 대했던 것 같다. 애초에 관습은 없는 게 아닐까 생각하면서 반성의 시간을 가지니 3년이 훌쩍 흘렀더라. 그러다 2018년 6월쯤 <삼진그룹 영어토익반> 제작사 더램프의 박은경 대표에게 연락이 왔다. 처음엔 의아했다. 첫 영화 <전국노래자랑> 이후엔 시나리오가 꽤 들어왔지만 <도리화가> 이후엔 아무도 나를 찾는 사람이 없었으니까. “왜죠? 왜 나를? 무슨 이야기예요?” 물었더니 “1990년대가 배경이고 상고 나온 대기업 말단 여자 직원들이 파이팅하는 이야기”라고 하더라.



-그 한줄 로그라인이 마음에 들었나.

=‘파이팅’이란 말이. 양지를 지향하는 인간이 아니어서인지 파이팅이라는 말이 참 낯설면서도 내가 생각하는 파이팅은 뭘까 싶었다. 시나리오를 읽으니 생각한 방향과는 좀 달랐다. 홍수영 작가의 초고는 사회 고발물이었다. 미투 플롯과 페놀 유출 사건, 두 가지 축이 있는 이야기. 이걸 해야 되나 말아야 되나 고민하다가 밥이나 먹어야겠다 싶어 냉장고 위 쌀 포대에서 쌀을 푸는데 쌀 포대가 떨어져 사방에 쌀알이 흩어졌다. 내가 아는 나란 인간은 그런 상황에서 ‘나는 왜 항상 이 모양일까’ 하며 자괴감에 빠져야 하는데, 나도 모르게 쭈그리고 앉아 ‘주우면 되지’ 하고 쌀알을 줍고 있더라. 시나리오 속 캐릭터들에게 영향을 받은 건가? 이 이야기 속 캐릭터들은 뭔가 해결하는 인물이니까. 연출을 맡기로 하고 작업에 착수했을 땐 생각보다 힘들었다. 자연스레 연상되는 기획들이 있지 않나. <히든피겨스>나 <에린 브로코비치>. 두 영화는 실존 인물에 실화가 바탕인 영화인 반면 <삼진그룹 영어토익반>은 배경으로서의 실화는 있지만 스토리로서의 실화는 없다. 실존 인물이나 사건이 있으면 그걸 잘 따라가면 될 텐데 이건 하나의 큰 배경(대기업에서 고졸 사원을 대상으로 토익반을 개설한 일)과 하나의 큰 사건(페놀 유출 사건) 사이에서 따라갈 점이 없었다.



-어떻게 실마리가 풀렸나.

=확실한 기조는, 내부 고발이라는 주제는 무거울 수 있지만 이 친구들이 신나게 활약하는 이야기였으면 좋겠다는 거였다. 판타지일지 언정 한번이라도 승리하는 이야기를 보고 싶었다. 그리고 함께 시나리오를 쓰던 손미 작가가 “그러면 코지 미스터리는 어때?”라고 장르적 방향성을 던져줬다. 형사나 탐정이 아닌 보통의 인물이 사건을 해결해가는 소프트한 탐정물 장르인데, 탐정물로서의 장르적 재미와 성장영화의 재미를 더하면 괜찮을 것 같았다.



(공지위반으로 중략)



-영화를 보면 자영, 유나, 보람은 퇴근 후 도넛, 떡볶이, 국수 등 늘 무언가를 먹으며 계획을 세운다.

=주인공들의 집이 영화에 한번도 등장하지 않는다. 왠지 90년대 한국의 직장인들은 밤낮으로 일했을 것 같은 느낌이 있었고, 그러면 영화에 직장만 나오는 것도 괜찮겠다 싶었다. 캐릭터에 정이 들면서, 이들을 집에서 재우지 못하는 것에 대한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그러면 먹이기라도 잘 먹여야겠다고 생각했다.



-고아성, 이솜, 박혜수 세 배우가 한 화면에 등장하는 장면이 많다. 세 배우의 이미지나 기운이 서로 다른데, 이들이 조화롭게 잘 어울릴 거란 느낌이 있었는지.

=겉모습의 개성은 생각하지 않았다. 걸 그룹을 결성하는 것도 아니고. 한명은 키가 커야 되고 한명은 귀여워야 하고 등등 그런 외적인 모습은 생각지도 않았다. 그저 누가 자영에 어울릴까, 누가 유나와 보람에 어울릴까만 생각했다. 개인적으로는 세 배우가 영화를 찾아서 와준 것 같다. 극단적으로 얘기하면 세 배우가 한 영화에서 만나기 위해 이 영화가 존재한 것 같다는 생각도 든다.



-글로벌 캐피털이라는 나쁜 자본주의에 맞서 ‘우리’ 회사를 살려야 한다는 결말부에는 은근한 애국주의와 애사심도 깔려 있는데.

=계몽적이고 도식적인 결론일 수 있다. 내부 고발 이야기들을 보면 회사 밖에서 싸우는 이야기가 많은데, 나는 안에서 싸우는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요즘 세대의 가치로는 ‘회사를 떠나고 말지, 망해버려라’라고 할 수도 있지만, 우리의 일을 우리가 안에서 싸우면서 해결한다는 개념이 중요했다. 보람 캐릭터만 봐도 애사심이 없는 친구다. 친구가 얽힌 일이고, 숫자와 관련된 일이고, 그러다 보니 엉겁결에 회사를 지키는 일에 동참하게 된다. 애사심이나 정의감이 아니라 ‘엉겁결에’, ‘어쩌다’가 동기가 된다. 자영 입장에서도 그냥 넘어가기엔 괴로우니까, 이것마저 참고 넘어가면 너무 쪽팔릴 것 같으니까 행동했던 게 아닐까. 과정은 ‘어쩌다’였지만 마땅히 그래야 했던 결과에 도착해 있는 거랄까. 이들이 승리하는 걸 보고 싶다는 강박 때문에 이야기에 비약이 생긴 것 같은데, 인물들은 잘못이 없다.



-과거엔 간간이 연기를 했다. 요즘은 연기 안 하나.

=잊을 만하면 연기 제안이 온다. 지금은 연출이 우선이란 생각이다. <삼진그룹 영어토익반>에 더 집중하고 싶다. 영화에서 보람이 “숫자한테 미안해”라고 하는데, 나 역시 ‘영화한테 미안해’ 하는 마음이 있어서, 연기엔 크게 뜻이 없다.



글 : 씨네21 취재팀사진 : 오계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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