Q. 들판과 잘 어울리는 남자로 자리매김했습니다. 공교롭게도 전작 〈나의 해방일지〉에 이어 〈힙하게〉 또한 푸릇푸릇한 농촌 마을을 배경으로 하니까요
A. 자연을 좋아하기 때문에 저는 뭐, 들판과 어울리는 남자, 아주 좋습니다(웃음).
Q. 하지만 〈나의 해방일지〉의 염창희와 〈힙하게〉의 문장열 모두 고즈넉한 풍경과는 상반되는, 자신의 처지로부터 탈출을 염원하는 ‘욕망캐’들이죠
A. 창희는 자신이 욕망으로 달리는 사람인 줄 알았지만 알고 보니 주변과 회사 사람들이 달리는 방향에 휩쓸려 살아왔다는 걸 알게 되는 캐릭터였죠. 일이든 돈이든 ‘그 어디에든 꼭 깃발을 꽂아야 하나, 꼭 어딘가로 가야 하나’라는 의문을 품고 끝내 자신은 그런 사람이 아니었다는 걸 깨닫고요. 장열이는 더 단순해요. 원래 자신이 있었던 수도권 광수대로 돌아가야 한다는 생각에 꽂혀 앞뒤 재지 않는 친구죠. 코미디 장르라 과장된 면도, 막무가내인 면도 있고요. 그런 점이 다르겠죠.
Q. 이민기의 욕망은 이들과 어떻게 다른가요
A. 성공이나 성취욕, 심지어 승부욕도 별로 없어요. 다만 도전하는 건 좋아하니 일을 계속 의욕적으로 해나가고요. 새로운 역할을 맡아도 그걸로 뭔가 이뤄내겠다는 욕망은 없었는데 지난해 〈나의 해방일지〉를 끝내고 목표가 생겼어요. 깃발을 그쪽으로 꽂으니까 그 방향으로 가려고 노력하게 되더군요. 물론 저만의 목표이기 때문에 아직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Q. 비밀이라니 더 캐묻고 싶어집니다(웃음). 상대방의 몸을 만지면 상대방의 과거가 보이는 극중 봉예분(한지민)의 능력이 탐날 정도로요
A. 그런 상상을 가끔 해요. 초능력이 생긴다든지 비현실적인 능력을 갖고 싶다는 갈망이 아직 있죠. 가까운 사람들의 과거는 굳이 알고 싶지 않아요. 알면 스스로 불행해질 수도 있으니 능력이 있더라도 굳이 보지 않을 것 같고요. 스스로의 기억도 왜곡되는 경우가 많으니 일단 나부터 만져봐야 할 것 같은데요.
Q. 〈힙하게〉의 김석윤 감독과는 〈조선명탐정: 흡혈괴마의 비밀〉 〈나의 해방일지〉에 이어 세 번째 호흡을 맞춥니다. 전작에서 발휘된 ‘코믹력’과 예능 PD 출신 감독의 시너지가 제대로 폭발할 것 같습니다만
A. 사실 코미디적 호흡으로 얘기하자면 한지민 누나가 ‘액션’을, 저는 ‘리액션’을 담당해요. 장열이의 거친 성격이 관계를 리드하는 것처럼 보여도 진짜 포인트는 지민 누나 쪽에 있죠. 감독님도 전작은 드라마 장르니 인물과 환경의 흐름에 집중해 찍으셨다면, 이번에는 코미디 구조에 맞춰 어느 정도 판을 짜놓고 신을 만들어 찍는 경우가 많았어요. 이런 장르는 또 이렇게 촬영하시는구나, 새롭게 보게 된 부분도 있었죠.
Q. 한지민 또한 김석윤 감독과 세 번째 호흡이니 타이 기록을 보유했네요. 진작 만나야 했을 사람들이 만난 것 같은, 어벤저스가 모인 듯한 현장이 그려지는데요
A. 감독님이 팀을 한번 꾸리면 거의 계속 함께하니까 대부분 다 아는 스태프였는데요. 지민 누나도 마찬가지죠. 그래서인지 서로 낯가림 같은 게 없었어요. 누나와 저도 처음부터 잘 섞일 수 있었고요.
Q. 한지민에게서 새롭게 발견한 매력이 있나요
A. 한지민이라는 사람 자체도 존경하지만, 배우로서도 참 멋있어요. 누나가 처음에는 코미디에 자신 없다고 했어요. 김석윤 감독이니까 믿고 한다며 함께 힘을 냈는데, 그럼에도 불편하거나 연기가 막힐 수 있잖아요. 그런데 누나는 한번 믿으면 정말 활짝 열고 믿더라고요. 감독님이 뭘 요구해도 ‘진짜 이렇게 해도 되는 거 맞아요?’ ‘저 못하겠어요’ 이런 태도는 없고 뭐든 해봅니다. 경력이 길수록 이게 쉽지 않거든요. 자기 안에 단단한 게 있으니까요. 그런데 그 문을 아주 쉽게 열고 받아들이더라고요.
Q. 엄청난 애정인데요! 무진마을의 수상한 편의점 아르바이트생 김선우를 연기한 수호의 뮤지컬 〈모차르트!〉를 함께 보러 가기도 했습니다
A. 둘이 관객석에 앉아 누나는 옆에서 ‘쟤 기특한 것 좀 봐’를 연발하고, 저는 흐뭇하게 웃었죠. 제 연기도 아닌데 괜히 뿌듯한 거 아시죠? 수호가 너무 잘해주니까 예쁘고, 멋지고, 현장과는 또 다른 모습도 발견했어요. ‘본업’이라는 표현이 이상하지만, 그간 쌓아온 가수로서의 자질과 연기가 하나로 접목된 모습이 매력적으로 보였어요.
Q. 당신의 배우생활 변곡점으로는 대부분 〈이번 생은 처음이라〉 혹은 〈나의 해방일지〉를 꼽을 것 같습니다. 배우로서 스스로 변화를 준 작품이 있다면
A. 30대에 접어들고 처음 찍은 작품이 〈이번 생은 처음이라〉인데, 그때부터 역할을 대하는 태도가 확실히 달라졌어요. 20대는 주로 흡수했던 시기였어요. 연기뿐 아니라 음악이든 사람이든, 뭐든 내 것으로 받아들였죠. 30대 때는 뭐든 분리하려고 했던 것 같아요. 어떤 역할을 맡아도 자신과 일치시키는 게 서른이 지나고부터 마음에 들지 않았어요. 역할은 그저 역할로 표현돼야 한다고 생각했던 거죠. 그런데 요즘은 캐릭터가 마냥 캐릭터 같다는 느낌이 들어요. 물론 역할에 푹 빠진 채 연기하지만, 조금 떨어져서 보면 내가 전혀 들어가 있지 않은 것 같달까요. 이제는 나를 드러내고 싶네요.
Q. 엄청 잘 속였네요. 최근 연기한 캐릭터들은 실제로 이민기가 저런 사람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일치된 느낌을 받았거든요
A. 분리하려고 해도 나라는 사람이 연기하는 거니까, 어느 정도는 나 자신이니까 그렇게 보이는 부분도 있을 거예요.
Q. 〈힙하게〉에는 당신을 전보다 더 많이 녹였나요
A. 저를 다시 꺼내 보고 싶었달까요. 세월이 지나고 사람도 바뀌어가면서 연기도 바뀌잖아요. 장열의 경우는 역할이 캐주얼하고 코미디적 캐릭터이다 보니 제 일상이 드러나야 하는 경우가 많았어요. 확실히 좀 더 자신을 붙여보려고 노력했죠.
Q. 낯설고 새로운 캐릭터에 친밀하게 접근하는 이민기만의 방식이 있나요
A. 이 방법 저 방법 다 써보았는데, 대본을 자주 보는 게 제일 도움이 되던데요. 내가 쓰는 표현들, 주로 느끼는 감정들이 쌓여 지금의 나를 만들잖아요. 그러니 작품을 하는 동안에는 캐릭터 대사를 자주 보고, 말을 자주 하고, 그 감정에 나를 자주 노출시키면 ‘그’를 닮아간다고 생각했어요. 대본을 1시간 더 본다면 이민기보다 ‘그’인 시간이 1시간 늘어나니까. 사실 〈나의 해방일지〉의 창희를 보며 제가 그런 말투를 쓸 거라고는 생각지 못했어요. 속사포 같은 말투와 장기하의 비트를 붙여놓은 ‘밈’도 봤는데(웃음) 연기할 때는 전혀 몰랐거든요. 의도하지도 않았고요. 대본을 계속 보면 저도 모르는 사이 닮아가는 지점이 생기는 것 같아요.
Q. 그 밈을 기억합니다(웃음). 늘상 진지해 보이는 얼굴을 하고 있지만 꽤 타율이 좋은 이민기의 ‘개그력’은 어디에서 만들어지나요? 혹 웃기려는 욕심도 있나요
A. 조금 있습니다. 스스로 없다고 생각했는데, 그래도 사람들 만나면 농담하려고 노력하는 거 보면 분명 있는 거겠죠. 웃기려고 집착은 하지 않지만, 그런 분위기를 만들고 싶기는 해요.
Q. 지금 세상에는 코미디가 왜 필요할까요. 〈힙하게〉가 세상에 필요한 이유이기도 하겠죠
A. 웃음기 없는 시기이기도 하잖아요. 에너지는 일종의 ‘유행’인데, 좋지 않은 일이 생기면 연쇄적으로 그 우울감이 퍼지기도 하고, 밝은 기운은 또 그 자체로 빠르게 사람 사이로 전염되죠. 코미디의 활기차고 즐거운 분위기가 SNS를 타고 돌면 즐거운 분위기도 생긴다고 봐요. 그런 기쁨의 알고리즘이 필요하죠.
Q. 뜨거운 사랑을 받은 작품도 있지만, 호응을 얻지 못한 작품도 있다는 점이 배우생활의 기쁨이자 슬픔일 것 같습니다. 운이 안풀린다는 생각이 들 땐 어떻게 돌파하는 편인가요
A. 빛을 보지 못한 작품이 있었고, 그 이후 제가 일을 못할 정도로 힘들었다면 돌파구를 찾았어야 했을 텐데요. 그래도 늘 다음은 있더라고요. 그런 이유로 힘들어한 적은 없는 것 같아요. 작품은 저 혼자 해내는 일도 아니잖아요. 혼자 힘들어하는 것도 웃기죠. 그래서인지 작품이 잘돼도 별로 즐기지도 못해요. 내가 누려야 할 게 아닌 것 같아서 눈치 보이거든요(웃음). 항상 중간쯤에 은은하게 머물러 있습니다.
Q. 은은하고 잔잔한 욕망일지라도 당신은 어떤 걸 욕망할지
A. 욕망이라기보다 전혀 노력하고 있지 않으니 욕심과 가까운 것 같은데요. 언어를 자유자재로 쓰고 싶어요. 영어 등 외국어 같은 ‘말’들 말이죠. 세상을 좀 더 가까이 느끼며 살고 싶거든요.
Q. 세상을 더 잘 느끼고 싶은 이민기에게 ‘힙’이란
A. 질문을 듣자마자 문득 생각난 건데, 지구를 잘 지켜야 하지 않나. 그게 요즘 할 수 있는 가장 ‘힙’한 것 아닐까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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