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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눈앞에서 성장해온 이강인은 이제 거대한 파도가 되어 신대륙으로 향한다. 새로운 항해의 출발선에 선 그를 파리에서 만났다.
FIELD OF DREAMS 레몬 컬러 카디건과 초록 팬츠가 새로운 모습을 보여준다.
한여름 같지 않은 차가운 바람이 불던 8월 초 어느 날, 한적한 파리 16구에 위치한 한 호텔. 높이 솟은 철문 사이로 들어서면 고풍스러운 대리석 분수의 물방울이 날리고, 검정 고양이가 로비를 지키는 그곳은 파리 최초의 열기구 착륙이 이뤄진 현장이었다. 그리고 우리는 그곳에서 2023년 가장 놀라운 현상으로 떠오른 이강인을 만날 수 있었다.
이강인은 우리 시선에서 벗어난 적이 없었다. 16년 전 TV 프로그램에서 공놀이를 즐기던 여섯 살 소년이 지금의 이강인이 될 거라 상상한 사람은 얼마 없었다. 하지만 덕분에 모두가 ‘축구 천재’라 불린 아이의 이름을 알았고, 그의 성장을 지켜봤다. 관심과 기대가 때로는 부담으로 이어질 법하지만 이강인은 꾸준히 피치 반대편의 골포스트를 향해 달려갔다. 한국에서 스페인으로, 이제는 파리 생제르맹(PSG)과 함께 새로운 걸음을 내디딜 차례다.
PSG는 매년 유럽 최정상을 노리는 ‘메가 클럽’이다. 카타르 왕실의 비호를 받는 풍성한 재정과 프랑스의 수도를 대표하는 구단이라는 자존심은 이 축구 클럽을 더욱 특별하게 한다. 최근 일본과 한국을 방문해 아시아 투어를 치르는 동안 우리는 축구 클럽이 지닌 힘을 느낄 수 있었다. 그 와중에 눈에 띈 건 새로운 선수 이강인에 대한 지지였다. 김해 공항에 내리는 순간 쏟아진 이강인을 향한 열렬한 환호는 팀 동료 네이마르를 웃음 짓게 했고, 그의 이름이 적힌 유니폼은 프랑스 현지에서도 구하기 어려운 ‘핫템’이 되었다. 촬영 도중 호텔에서 식사를 즐기던 어느 파리지앵 부자 역시 이강인을 알아보았다. 애정 가득한 시선으로 이강인을 바라보던 이들은 아쉬운 표정으로 떠나면서도 꼭 응원하겠다는 말을 잊지 않았다.
뛰어난 축구 선수가 필요로 하는 건 많다. 지치지 않는 체력, 넓은 시야, 순간적인 판단력, 한발 빠른 반응 속도까지. 하지만 ‘스포츠 스타’가 되기 위해서는 빼어난 경기력만으로는 부족하다. 스타디움을 가득 채운 팬들뿐 아니라, 어딘가 멀리 떨어진 곳에서 TV로 경기를 시청하는 이들의 가슴까지 뜨거워지게 만드는 ‘스타성’이 필요하다. 그리고 이강인의 플레이에는 팬들을 결집시키는 그 무언가가 있다. 지난 카타르 월드컵, 대한민국이 가나에 패배하기 직전 코너킥을 차러 가며 응원단에게 호응을 유도하던 이강인의 모습을 떠올려보자. 어느덧 한국 축구의 얼굴로 자라난 이강인은 이미 세대와 성별을 뛰어넘는 ‘스포츠 스타’다.
<보그>와의 만남은 이강인 인생에서 첫 번째 패션 화보 촬영이었다. 낯선 환경이 불편할 법도 하건만 긴장의 흔적은 없었다. 처음 보는 프로그램을 능숙히 다루며 ‘모니터링’을 하고, 스태프의 환호가 간지럽다는 듯이 웃어 보였다. 조심스럽게 주위를 관찰하고 필요할 땐 스스로에게 집중했다. 그리고 인터뷰를 위해 마주한 이강인은 자연스럽게 자신을 열어 보였다. 애써 멋진 척, 쿨한 척할 필요는 없었다. 평생을 우리의 시선 속에 살아온 그가 이제 와서 자신을 가다듬을 필요는 없다는 걸 이미 깨달은 듯했다. 결코 평범하지 않은 삶을 살아온 평범한 청년 이강인이 거기 있었다.
패션 화보 촬영은 처음입니다. 힘들지는 않았나요?
촬영은 원래 다 힘들어요. 그래도 ‘결과만 좋으면 됐지’ 싶습니다. 제가 지켜보고 있을 테니 편집 잘 부탁드립니다(웃음).
파리로 온 지 한 달이 지났습니다. 지금까지 경험한 파리는 어땠나요?
일단 날씨가 추워요. 파리는 되게 큰 도시잖아요? 볼 것도 많고, 사람들도 많고… 한 달밖에 안 돼서 파리를 잘 알지는 못하지만, 지금까지는 좋은 점만 느꼈습니다.
스페인부터 파리까지, 해외에서 생활한 지 10년이 넘었습니다. 크고 작은 어려움도 있었겠죠?
아주 어릴 때부터 와서 그런지, 저는 해외가 더 익숙해요. 불편한 점도 크게 없고요. 가족과 같이 살아서 더 그럴 수도 있죠.
최근 PSG 구단과의 인터뷰에서 ‘쉬는 날 가장 하고 싶은 것’을 묻는 질문에 ‘가족이랑 밥 먹기’라 답했습니다. 가족과 유대 관계가 아주 끈끈한 편인가요?
어릴 때부터 그랬어요. 항상 같이 있었고.
이강인 선수에게 가족이란 어떤 의미인가요?
가족이 항상 제 옆에 있고, 저도 늘 가족 옆에 있고. 항상 같이 있으니까, 한 몸처럼 느껴져요. 이번에도 가족이 전부 파리로 이사했죠. 나중에도 어디로 가든 함께 있지 않을까요?
집에서는 물론 PSG와 국가 대표 팀에서도 ‘막내 라인’에 속합니다.
PSG에서까지 막내는 아니에요. 팀에 어린 선수들이 너무 많거든요. PSG에서는 중간쯤?
막내 생활이라는 게 쉽지만은 않을 텐데요.
선배가 누구냐에 따라 다르지 않나요? 근데 저는 진짜 그런 게 없어요. 막내인 게 너무 편했고, 지금도 편해요. 평생 막내였으면 좋겠는데, 그건 불가능하겠죠(웃음).
팬 서비스가 좋기로 유명합니다. 마요르카 때도 훈련장에 찾아온 모든 팬에게 사인을 해줬고요.
그렇게 먼 곳까지 찾아오셔서 응원해주시는 게 감사하죠. 많이 관심 가져주시고, 좋아해주시니 항상 다 사인해드립니다. 팬분들을 보면 큰 힘이 돼요. 팀 동료들도 부러워하죠.
어릴 때부터 축구에만 전념하며, 축구만을 위한 삶을 살아왔습니다. 그 과정에서 오는 아쉬움은 없나요?
아직까지는 없습니다. 그게 아주 정상적이라고 받아들였거든요. 연락하고 지내는 친구들도 축구를 했거나, 지금도 하고 있고요.
축구 선수가 아니었다면, 어떤 일을 하고 있을까요?
별로 생각해본 적이 없어서… 뭘 하고 있었을까요?
바로 대답이 안 나온다는 것 자체가, 지금의 삶이 만족스럽다는 걸까요?
따로 그렇게 생각해본 적이 없어요. 어릴 때도 그런 생각을 해본 적이 없고. 그냥 흘러가는 대로, 다른 직업을 찾아가지 않았을까요?
축구를 제외한 특기를 하나만 꼽자면?
스페인어 잘하잖아요. 그게 특기죠.
경기나 훈련이 없는 날, 뭘 하며 시간을 보내나요? 가족과 함께 밥 먹는 것 빼고!
일단 잠을 많이 자요. 하루 종일 자고, 먹고. 그러다 휴대폰도 보고, 재밌는 영화나 드라마 보다가 하루를 그냥 보내죠. 쉬는 날이니까 ‘특별한 무언가를 해야겠다’라기보다는, 그냥 흘러가는 대로? 잘 쉬는 것도 중요하니까요.
축구 선수로서의 꿈, 그리고 인간 이강인으로서의 꿈이 궁금해요.
일단 축구 선수로서는 대한민국이라는 나라를 대표해 월드컵 우승을 거두는 것. 개인적으로는 가족을 포함해 소중한 모든 사람과 함께 행복하게 살고 싶어요. 중간중간 걱정거리가 생길 수도 있지만, 그럼에도 주어진 것에 즐거움을 느끼면서요. (V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