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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 배우 최초로 에미상 남우주연상(<오징어 게임> 시즌1)을 수상하고 <애콜라이트>로 할리우드 프로덕션을 경험한 뒤 돌아온 배우 이정재는, 콘텐츠 제작업까지 규모를 불린 아티스트유나이티드에서 앞으로 제작자로서의 입지도 세워나갈 것으로 보인다. 오승욱 감독의 <리볼버>에서 묻어난 중후함과 연출작인 <헌트>가 보여준 저력을 더하면 지금 배우 이정재는 한국 엔터테인먼트 업계에서 독보적인 올라운더다. <오징어 게임> 시즌2로 들어가자면, 그가 맡은 성기훈의 처지는 사뭇 달라 보인다. 시즌1에서 경제적으로 궁핍했던 소시민의 절박함이 주인공을 게임으로 이끌었던 데 반해, 시즌2에선 지난 게임이 남긴 트라우마 속에서 더이상의 살육을 중단하고 배후 세력을 응징하겠다는 확고부동한 목표가 중요해졌다.

- 시즌2에서 성기훈이 게임에 재진입한 심리에 대해 관객들의 해석이 분분했다. 그 선택의 의미가 무엇이라고 봤나.
나라면 겁이 많은 성격이라 훨씬 더 고민했겠지만, 성기훈이라면 그런 선택을 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작품 내적으로 보건대 성기훈은 우리 사회에 더 많이 있었으면 하는 희망으로 만들어진 캐릭터가 아닌가 싶다. 그가 그많은 돈을 자신의 삶을 위해 쓸 수 없었던 이유가 뭘까, 고민해보면 결국 양심의 문제가 나온다. 수많은 사람들의 목숨값이자 희생의 대가인 돈으로 새 인생을 살 수는 없다고 판단한 것이다. <오징어 게임> 시리즈는 경쟁사회에서 이 정도로 양심을 저버리면서까지 승리해야 하는가에 대한 질문을 던지는 작품이다. 물론 강조하고 싶은 건 기본적으로 판타지적 설정을 안고 있는 장르물이기에 허용되는 지점도 필요하다는 것이다. 시청자를 납득하게 하는 요소와 개연성이 중요하지 않다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다소 과장된 구도나 상황 안에서 인물이 내리는 선택과 행동을 보는 일종의 사회 실험 같은 드라마가 <오징어 게임>이란 점을 꼭 말하고 싶다.
- 시즌1, 2에서 모두 등장하는 참가자 등록 사진 촬영 장면은 성기훈의 변화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처음엔 어색하고 다소 우스꽝스런 웃음을 지었던 그가, 시즌2에서는 비장한 결의에 찬 표정으로 카메라 앞에 선다. 이 극명한 대비가 두 시즌에서 성기훈이 맡게 된 역할의 본질적 차이를 보여준다고 봤다. 같은 상황을 다시 마주하는 배우 입장에선 어땠나.
기훈은 그동안의 엄청난 사건을 견뎌냈다, 혹은 이겨냈다고 표현하기 어렵다. 나에게는 차라리 트라우마를 극복하지 못한 채 그저 살아남았을 뿐인 사람처럼 보였다. 각본의 흐름대로 보아도 그는 상금을 받고 2년여간 노숙자 생활을 하며 트라우마와 씨름했다. 오일남과의 마지막 게임을 통해 심경의 변화를 겪고 비행기 티켓까지 샀지만 결국 양심이 그를 막은 것이다. 이런 변화는 이미 시즌1 후반부에 모두 담겨 있었다. 시즌2에서 기훈이 갑자기 변했다는 반응도 있지만 나는 시즌1에서 그가 이미 한 차례 큰 변화를 겪었다고 보고 그 연결성을 인지한 채 연기했다. 공항에서 돌아서는 장면부터 편의점을 거쳐 화장실에서 위치추적장치를 빼내기까지, 모든 것이 그가 앞으로 나아갈 방향을 가리킨다.
- 시즌2에선 새로운 인물들과의 상호작용이 부각된다. 성기훈 캐릭터에 관한 특기할 점은, 트라우마에 시달리면서도 여전히 타인을 믿는다는 데 있다. 주제와 연관된 특징이기도 할 텐데 배우의 해석도 궁금하다. 특히 앞서 오일남의 배신을 경험하고서도 영일-인호(이병헌)를 의심하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
나도 강조하고 싶은 부분이다. 시즌1에서 시즌2까지 일관되게 이어지는 기훈의 면모는 사람들의 사연에 공감하고 아파하는 인간이라는 점이다. 게임장이 서로를 믿지 못하고 의심하면서 경쟁해야 하는 공간인 점과 대조된다. 기훈이 사람을 쉽게 믿는 성격일 수도 있지만, 나로서는 그가 서로 의지하며 살아가야 한다고 믿는 인물로 바라보고자 했다. 바로 여기에 황동혁 감독이 말하고 싶은 바도 녹아 있지 않을까. 기훈이 아무리 이전 게임에서 혼자 살아남은 사람이래도 혼자서는 다시 시작된 게임을 멈출 수도, 주최측을 응징할 수 없다. 처음 보는 사람들에게 자신을 믿어달라고, 함께 살아서 나가자고 호소하는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일 것이다. 반란은 혼자서는 불가능할 뿐 아니라 역설적으로 동참한 사람들을 믿을 수밖에 없는 일인 것 같다.
- 게임 경험자이자 리더로서의 존재감이 두드러지면서, 시즌1에서 보여줬던 캐릭터의 아기자기한 재미나 매력을 발산할 여지는 상대적으로 줄어들었다. 대신 전체 서사를 이끌어가는 중심축으로서의 역할이 커졌는데, 작품을 보다 거시적으로 조망하는 과정에서 황동혁 감독과는 어떤 고민을 나누었나.
시즌1에서 드러나는 복합적인 모습에 비해 시즌2의 성기훈은 다소 단선적으로 비칠 수밖에 없다는 점을 시나리오 단계에서부터 인지했다. 시즌1에서 성기훈의 인간적인 매력을 즐겼던 시청자에겐 아쉬움으로 다가올 수 있는 지점이다. 고민이 없었던 것은 아니고, 이 작품이 내 커리어에서 갖는 중요도를 생각할 때 배우로서 더 많은 것을 요구할 수도 있었겠지만 그러지 않았다. 시즌1부터 시즌3까지 이어지는 전체 여정에서 성기훈이라는 캐릭터가 어떻게 설계되어 있는지 황동혁 감독의 깊은 고민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구조적으로 시즌2는 시즌1과 시즌3의 가교이기에 기훈의 주변 인물들이 다양한 색채를 나눠 가질 필요도 있었다. 그걸 배우가 수용하냐 마냐는 스스로 결정하고 따르면 된다. 시즌2라면 당연히 소화해야 하는 숙명적인 부분들이 있다고 생각한다. 나는 주어진 역할 안에서 최대한의 디테일을 찾아내는 데 집중했다.
- 시즌3에서 성기훈은 어떻게 변화할까.
시즌1의 성기훈은 지성과 피지컬이 모두 적당히 부족한, 한국의 평범한 남성상보다도 능력치가 훨씬 떨어지는 인물이었다. 살벌한 게임장에서 그가 살아남은 것은 능력이 뛰어나서가 아니라 선한 마음 때문이었다고 할 수 있겠다. 이 반전이 그를 응원할 수 있는 힘이기도 했다. 하지만 시즌2에서는 상황이 달라졌다. 주최측을 처단하려는 복수심, 참가자들을 이끌어야 하는 리더로서의 책임감처럼 큰 사명을 짊어졌는데 오히려 계속해서 실패한다. 인호의 방해도 있고 주변 환경도 녹록지 않은 데다 기훈 스스로 대의를 위해 소의를 희생하겠다는 잘못된 판단도 저지른다. 시즌2에는 기훈이 주인공으로서 리더십에 실패하는 모습도 담겨 있다. 주제적으로 매우 필수적인 과정이지만 보는 분들은 답답했을 것 같다. 이렇게 말씀드리고 싶다. 시즌3에서는 당연히 변화가 있을 것이다. 주인공이기에 더 나은 리더가 되어 다른 모습을 보여줄 수도 있고, 계속된 실패 끝에 반전을 통해 자신의 뜻을 이룰 수도 있다. 어떤 방식이든 변화는 불가피하다.

+ 황동혁감독 인터뷰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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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즌2의 핵심이 거기에 있다고 생각한다. 이건 실패에 대한 서사다. 대중적인 오락물에서 이렇게 좌절의 순간으로 마무리한다는 게 놀랍다. 적어도 주제와 캐릭터, 두 가지 지점에서 의미심장하다. 우선 캐릭터 관점부터 묻고 싶다. 시즌3에서 기훈의 변화와 선택, 성장을 보여주겠지만 적어도 시즌2까지는 실패를 반복하다보니 주도적인 주인공이라기보다 다른 캐릭터들을 받쳐주는 역할에 가깝게 느껴지기도 한다.
시즌을 나눌 때 당연히 그런 우려가 있었다. 많은 등장인물이 있지만 그럼에도 <오징어 게임>은 어디까지나 기훈을 따라가는 여정이다. 아무것도 모르고 해맑던, 인간성은 살아 있는 사람이 실패를 거듭하며 자각하는 과정이 주요 골자다. 기훈은 프런트맨(이병헌)을 추적하다가 실패하고, 게임에서 사람들을 살리려다 실패하고, 투표를 통해 상황을 바꿔보려다 실패하고, 시스템을 전복하는 무장봉기를 일으키려다 실패한다. 일련의 좌절을 겪은 후에 한 인간이 어떻게 바뀌는지가 중요하다. 다만 다음으로 도약하는 변곡점 직전에 멈추기 때문에 시즌2에서는 캐릭터의 성장과 변화를 묘사하는 측면에선 한계가 있었다. 그걸 보완하려고 기훈의 다양한 일면을 주변 동료들에게 나눠주었다. 가령 정배(이서환)는 목적에 매달려 시야가 좁아져가는 기훈의 잃어가는 인간성을 보완해주는 캐릭터로 불러왔다. 한 인간의 내면에 있는 다양한 얼굴을 여러 캐릭터에 분산시킨 셈이다. 그런 인물들간의 관계가 이어지는 과정을 거미줄처럼 보여주는 것이 이번 시리즈의 핵심이기도 했다.
- 사실 기훈이 하는 건 거의 없다. 기훈이 최후의 1인이자 이야기의 주도자가 될 수 있었던 건 거의 운에 가깝다.
맞다. 역설적으로 그래서 기훈이 중요했다. 선의를 가진 평범한 인물이 이 상황을 어디까지 끌고 갈 수 있을까. 계획과 의도가 좌절될 때 한 인간이, 나아가 인간 군상이 어떻게 바뀌어나가는지를 보고 싶었다. 기훈과 프런트맨의 불꽃 튀는 두뇌 대결을 기대한 분들도 있겠지만 일단 기훈은 그 정도로 스마트하지 못하다. 어쩌면 프런트맨은 기훈이 다다를 수 있는 미래 중 하나다. 프런트맨은 참가자들, 특히 점점 목적에 잠식되어가는 기훈을 보며 어떤 확신과 희열을 느꼈을 것이다. 프런트맨은 한 캐릭터 안에 여러 모습을 가진 다중적인 인물이다. 그는 상황을 통제하는 프런트맨이자 정체를 숨긴 참가자 오영일이고, 오징어 게임을 우승해본 인호이기도 하다. 이병헌 배우는 리액션을 할 때 인호, 오영일, 프런트맨 중에 어떤 자아로 대해야 하는지 매번 묻기도 했다. 반면 기훈의 다면성은 주변 동료들이 나눠 가진다. 정배, 현주(박성훈) 등 인물의 빈틈을 메워주고 때로는 과거의 인물을 불러오는 촉매가 되기도 한다. 개인적으로 정배와 불침번을 서며 대화하는 장면을 참 좋아한다. 전체적으로 이번 시즌에선 웃음기나 인간적인 서사를 보여줄 장면이 적었는데, 자신의 과거를 슬쩍 이야기하는 정배의 모습을 통해 부피를 만들 수 있어서 특히 마음이 간다. 비슷한 맥락에서 현주의 게임을 응원하는 장면도 기억에 남는다. 생존을 위한 경쟁으로 가득할 때 모두가 한마음으로 성공을 응원하는 순간에서 게임 자체를 즐겼던 어떤 순수함이 전해지길 바랐다.
+ 이병헌배우 인터뷰 중
http://m.cine21.com/news/view/?mag_id=106891
- 오영일과 성기훈의 관계성을 좋아하는 시청자들이 국내외에 많더라. 이정재씨와 함께한 작품이 무엇이 있나 거슬러 올라가봤더니 드라마 <백야 3.98>가 있었다. 그때 이후로 작품으로는 오랜만의 재회다.
<백야 3.98>에서 직접 마주친 장면은 없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오징어 게임> 시즌1 때는 거의 만난 적이 없다. 하지만 처음부터 자연스럽게 합을 맞추며 촬영했다. 이번에 작업하면서 이정재라는 배우의 자기 관리에 깜짝 놀랐다. 나도 <지.아이.조> 시리즈나 <아이리스>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을 위해 몸을 만들어본 적이 있지만 이정재씨는 근육질 몸매를 만들기 위한 게 아니라 성기훈 캐릭터를 위해 식단 관리를 했다. 체중 감량을 위해 식사를 거의 하지 않고 물만 마시는 등 나로서는 상상하기 힘든 관리를 해서 대단하다고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