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 발 앞서 걷는 22년 차 배우
김유정
4세 때 광고모델로 데뷔했다. 온 국민이 그의 성장기를 목격한 셈인데 덕분에 ‘잘 자라주어 고마운 배우’로 꼽힌다. 〈구미호: 여우누이뎐〉 〈해를 품은 달〉 등에서는 아역임에도 주연 못지않은 존재감을 보였고 이후 〈구르미 그린 달빛〉 〈홍천기〉 〈마이데몬〉 등을 통해 단독 주연으로도 극을 이끌 수 있는 배우임을 증명했다. 2025년 말, 〈친애하는 X〉의 소시오패스 백아진 역으로 웹툰 이상의 화제를 모으며 OTT에서도 흥행력을 입증했다.

반 발자국, 딱 반 발자국만 앞서간다는 게 쉽지 않은 일이다. 유행도 그렇다. 대중보다 너무 앞서가면 공감을 얻지 못한다. 너무 빨리 가버린 누군가는 외로운 선구자가 된다. 교육학에서도 말한다. 좋은 스승이 되는 방법은 제자보다 딱 반 발자국 앞에서 길을 알려주는 거라고. 그보다 멀어지면 따라오기 힘들고 그렇다고 너무 곁에 서면 학습의 흥미와 의욕이 사라지기 때문이다.
김유정은 그 반 발자국의 묘를 잘 아는 배우다. 아역배우로 시작해 데뷔 22년 차를 맞은 이 배우의 나이는 이제 스물여섯. 네 살에 사회생활을 시작했고 한글도 대본으로 깨쳤다. 한때는 아역배우가 아역의 이미지를 탈피하고 독립된 연기자로 인정받는 일이 아주 좁은 문으로 보였다. 그래서 어떤 이들은 갑작스런 성인 연기로 무리수를 두기도 하고, 그러다 잊히기도 했다.
김유정은 대중의 기대보다 딱 반 발자국을 앞서갔다. 극 중에서 그는 너무 빨리 어른이 되어버리지도, 그렇다고 너무 오래 교복을 입고 학교 안에 머무르지도 않았다. 보는 이들이 그의 역할을 납득할 수 있도록 천천히 호흡했다. 덕분에 김유정은 극 속에서 무럭무럭 자랐고, 그가 등장하는 작품에 대한 보는 이들의 믿음도 함께 자랐다.
티빙 드라마 〈친애하는 X〉는 김유정이 지금까지 걸어온 길을 집대성해 보여준다. 그는 눈빛 하나로 장면을 장악한다. 가장 낮은 자리에서 태어난 백아진(김유정 분)은 가장 높은 자리에 오르기 위해 누군가를 파멸로 이끄는 법을 너무 잘 아는 인물이다. 그를 응원할 수는 없어도 왜 그의 주변인이 그에게 매혹돼 스스로 파국에 이르는지는 납득이 된다. 이제 김유정은 악역을 맡았대도, 그게 사람이 죽어도 눈 하나 깜짝 않는 소시오패스래도 놀랍지 않다. 대중은 그가 딱 반 발자국 앞서 걸으며 보여주는 멋진 신세계에 기꺼이 매료될 준비가 되어 있다.

〈친애하는 X〉는 방영되는 동안 티빙에 새로운 구독자를 유입하는 데 기여도 1위를 기록했습니다. 해외 OTT 플랫폼 라쿠텐 비키에서도 1위를 했고 아시아·태평양 17개 국가에서 방영되며 성과를 내기도 했죠.
촬영할 때보다 공개된 이후가 더 떨렸어요. 워낙 원작이 유명했던 작품이라 누가 되지 않을까 걱정했고요. 함께한 모든 사람들이 한 마음으로 최선을 다해 작품을 만들었는데 좋은 반응을 얻어 감사할 따름입니다.
원작 팬들에게는 주인공 ‘백아진’이 누가 될 것인가가 큰 관심사였죠. 이 ‘아주 매혹적인 소시오패스’ 역할 제안이 들어왔을 때 어땠어요?
처음부터 자신 있지는 않았어요. 감독님과 이야기를 나누면서 이 길을 가도 좋겠다는 믿음이 생겼죠. 백아진을 이해하기보다는 그냥 받아들이기로 했고요.
〈도깨비〉 〈미스터 션샤인〉 등을 만든 이응복 감독님은 김유정 배우의 어떤 면을 보고 백아진을 제안했을까요?
감독님과 ‘결이 비슷한 사람’이라고 느끼신 것 같아요. 실제로 감독님과 배우들이 정말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한 장면 한 장면을 그냥 리딩만 한 게 아니라 매번 치열하게 토론했어요. 그런 과정을 거쳐서 촬영했기 때문에 설령 내가 잘못된 방향으로 가더라도 다시 바른 길로 돌아올 수 있을 거라는 믿음이 있었어요. 그렇게 시도한 장면들을 감독님이 기가 막힌 연출로 써주시기도 했고요.
백아진이 소시오패스가 된 데에는 어린 시절의 학대와 방임의 영향이 크죠. 그 서사를 위해 아역배우가 그런 장면을 경험했어야 했는데 (배우를 위해) 직접 상담을 제안했다고요.
감독님도 이미 생각하고 있던 부분이었어요. 백아진이 겪은 일을 아역배우도 경험해야 했기 때문에 마음이 쓰였죠. 아역뿐 아니라 배우는 많은 감정을 쓰고 또 경험해야 하는 일이라 심리 상담이 필요해요. 저도 상담을 받았고요.
소시오패스는 어떻게 이해하려고 했나요?
개인적으로는 절대 응원할 수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했어요. 작품의 주인공이기도 하고 제가 맡아야 하는 캐릭터라서 이해하기보다 그냥 온전히 받아들이려고 한 것 같아요. 그의 욕망이 잘 드러나게 하되 감정은 최대한 숨기려고 했죠. 웹툰을 처음부터 끝까지 다 봤는데 이 인물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까 고민하다가 눈을 생각했어요. 감정을 읽을 수 없는 눈. 그래서 흰자가 더 도드라져 보이게 눈을 뜨기도 하고, 최대한 깜빡이지 않으면서 그의 눈을 보면 뭔가 ‘쎄하다’는 느낌이 들기를 바랐죠. 제 안에서 본능적으로 올라오는 감정을 억누르고 숨겨야 하는 순간들이 힘들었어요.
연기하기도 쉽지 않았겠군요.
상대 배우와 호흡할 때 눈을 보며 감정을 공유하는 걸 굉장히 중요하게 생각하는데 백아진은 그게 안 되는 인물이에요. 상대를 보기는 하는데 보고 있지 않거든요. 그러면 상대 배우도 힘들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미리 양해를 구했죠. 그런데 동료분들이 “아진이 연기하는 네가 제일 힘들다”면서 오히려 더 배려해 주셔서 정말 위로를 받았습니다. 이번 역할을 하면서 배운 것도 많고, 성장도 한 것 같아서 애정이 많이 가는 작품이에요.
헤어 나오기 어렵지는 않았나요?
일단 함께한 사람들이 저에게는 위로였고요. 헤어 나오기 어렵다기보다는 저에게도 질문을 많이 남긴 작품이에요. 누군가와 관계를 맺는다는 건 어떤 의미인지, 또 어떻게 맺어야 하는지요. 나에게 생긴 욕망을 어떻게 다루고 써야 하는지에 대해서도 멈춰서 생각해 보게 됐어요.
반대로 악역을 연기하다 보니 의외의 카타르시스는 없었나요? 평소라면 하지 못할 말과 행동을 마음껏 해본다든지.
있었죠. (일동 웃음) 나중에 일어나는 일은 너무 파국이라 그런 신들은 촬영하면서도 거의 탈진하는 느낌이었는데요. 학창 시절에 자신을 괴롭힌 친구에게 복수하는 장면은 조금 통쾌하긴 했어요. 실제로는 그렇게 시원하게 복수를 못 하잖아요. 대리만족이 있었죠.
김유정 배우는 미취학 아동 시절부터 자라는 모습을 온 국민이 지켜봤죠. 22년을 활동하면서 시행착오도 고민도 많았을 것 같은데 지금은 어떤 시기를 지나고 있나요?
시행착오가 아주 많았죠. 지금도 있고요. 그런 과정을 통해 제가 하는 생각은 스스로에게 실망했을 때가 가장 힘들다는 거예요. 그래서 모든 상황에서 기대치를 낮추는 훈련을 해요. 그걸 아주 오랫동안 연습한 것 같아요. 일이 잘 풀리지 않거나 계획이 틀어지면 ‘그럴 수도 있지’라고 넘기려고 노력해요.
그 시간 동안 세상도 정말 많이 변했잖아요. 아날로그적 현장부터 지금의 OTT 시대까지 모두 경험한 배우이기도 하고요.
변화를 온몸으로 체감하고 있죠. 사실 제가 변화에 취약한 편이라 나중에야 찾아보고 따라가는 편인데, 이 모든 걸 관통하는 시대에 살고 있다는 게 감사하기도 해요. 그리고 이전 방식을 경험해 봤다는 것도요. 저 자체는 아날로그적 사람이지만 변하는 시대에 잘 적응해서 너무 깊이 고민하지 않고 한 걸음 한 걸음 잘 나아갔으면 좋겠습니다.
평소에 아날로그적인 나는 어떤 걸 좋아하나요?
운동, 여행을 아주 좋아해요. 촬영 현장에 오기 전에 꼭 운동하려고 해요. 이른 아침이라도요. 그래야 뭔가 몸이 준비된 느낌이더라고요. 작품이 끝나면 여행을 가는데요. 산티아고 순례길이 정말 기억에 남아요. 한 번도 안 간 사람은 있어도 한 번만 간 사람은 없다고 하더라고요. 시간이 허락되면 또 가보고 싶어요.
한번 맺은 인연도 오래가는 편이죠. 〈구르미 그린 달빛〉 팀과의 인연은 10년 가까이 이어지고 있고요.
그때는 다들 어렸고 또 다 같이 치열했거든요. 그래서 서로 더 애틋한 것 같아요. 그 애틋함이 오랜 인연으로 이어졌고요. 그런 일이 흔치 않다는 걸 알아서 더 소중해요. 아마 〈친애하는 X〉 팀도 그런 인연 중 하나가 될 것 같아요.
〈구르미 그린 달빛〉 팀이 “치열하고 애틋했던” 인연이라면 〈친애하는 X〉는 어떤 인연인가요.
서로를 ‘친애하는’ 인연? 처음부터 끝까지 서로를 지켜주려고 엄청 애를 썼어요. 거기서 온 위로나 감정은 쉽게 사라지지 않을 것 같아요.
어떻게 지켜주려고 했어요?
백아진으로서 저는 작품 안에서 많은 상처와 자극을 주잖아요. 작품 속 인물이더라도 제 얼굴과 목소리로 한 행동이니까요. 그래서 이 얼굴과 표정과 행동으로 그 상처를 치유해 주고 싶더라고요. 촬영이 끝난 뒤에는 같은 얼굴로 좋은 추억과 감정을 쌓아주고 싶었어요.


김유정의 얼굴과 목소리로 우리는 얼마나 많은 위로와 감동을 받았을까. 2003년 ‘크라운산도’의 작은 꼬마로 등장했을 때부터 그랬다. 그렇게 자란 꼬마가 자연스럽게 작품의 주인공이 되고 멜로와 로맨스도 가능하다는 걸 보여준 작품은 〈구르미 그린 달빛〉이었다. 1999년생인 그가 열일곱에 찍은 작품이었고 무려 남장 여자를 연기하는 사극이었다. 시작할 때만 해도 주목받지 못했던 이 작품은 쟁쟁한 경쟁작들을 물리치고 시청률 20%를 넘기는 기염을 토했다. 그리고 그 영광의 나날을 지나 김유정은 뒤늦게 깊은 사춘기를 앓았다. 너무 일찍 정상을 경험해 버린 느낌이었다. 그때 알았다. 자기 페이스를 지키는 게 얼마나 중요한지.
그의 뒤를 따라서 수많은 아역배우들이 자라고 있다. 반 발자국 앞선 그의 행보는 뒤따르는 이들에게도 좋은 모범이 된다. 좋은 스승은 딱 반 보 앞에 선다고 하지 않던가. 그러다 보면 소시오패스같이 까다로운 악역을 맡게 될 날도, 그 역할로 보는 이들을 납득시키다 못해 현혹시킬 날도 온다. 김유정은 생각보다 백아진을 응원하는 사람이 많아 놀랐다고 했다. 거기에는 여러 감정이 섞여 있겠지만 아마 백아진을 품고 작품에 몸을 던진 김유정을 향한 응원이 있었을 것이다. 처음 본 순간부터 우리는, 김유정을 친애했으니까
http://topclass.chosun.com/news/articleView.html?idxno=35671
인터뷰가 좋아서 가져왔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