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은 경기 전 아침부터 뭔가 좀 이상했어요. 정대영 언니가 제 유니폼 밑단에다 뭘 적어 줬거든요. 이사야 41장 10절(두려워하지 말아라. 내가 너와 함께함이라)이었는데, 혹시라도 시합에 들어오면 잘해보자는 뜻이었죠. 평소처럼 코트 밖에서 경기를 지켜보는데 희한하게 시합에 너무 나가고 싶더라고요. 그때 마침 분위기를 반전시킬 겸 감독님이 절 넣으셨는데 예상치 못하게 제가 터진 거죠. 막내가 들어와서 잘하니까 분위기도 살고 김연경 언니도 더 신나서 때리고. 경기 결과를 떠나서 그날 경험이 제 인생에 박혀있어요. 그걸로 지금까지 버티지 않았나 싶어요.”
당시 코트 위에서 느낀 짜릿함은 김희진의 배구 인생에 첫 성장의 순간이자, 선수 생활을 지속할 수 있는 원동력으로 남았다. 그는 “당시 코트 위 언니들의 환한 웃음을 잊을 수 없다”며 “그때를 기점으로 대표팀에서도 주전으로 들어가는 경기가 생겼고 사람들에게 얼굴을 조금이나마 알릴 수 있었던 것 같다”고 떠올렸다.
또 다른 성장의 순간은 스테파노 라바리니 감독을 만났을 때다. 2019년부터 2020 도쿄올림픽까지 대표팀 사령탑을 맡았던 라바리니 감독은 김희진에겐 배움의 의지를 되살려준 고마운 스승이다. 김희진은 “감독님을 만나기 전이 딱 도전 의식을 잃어갈 때였다”고 돌아봤다. 선수 생활도 어언 10년쯤 접어드니 ‘이 정도면 되겠지’ 하는 마음이 불쑥불쑥 고개를 들었다. 그러나 라바리니 감독이 알려준 배구의 세계에선 모든 게 새로웠다.
당시 제일 많이 연습했던 건 백어택이다. 키가 큰 외국 선수들의 블로킹을 피해 크로스 각을 때릴 수 있어야 한다는 생각에 밤새 영상을 보며 공부했다.
사실 어릴 때부터 키가 크고 힘이 좋아 큰 공격이 가능했던 김희진에겐 잔기술을 익힐 겨를이 없었다. 김희진을 거쳐 간 지도자들도 세게 스파이크를 때리고 점수를 많이 내는 큼직한 것들을 기대했다. 당시에도 “키 작은 선수들이 구사하는 기술이 그렇게 부러웠다”는 김희진은 외부에 비친 강점 말고도 다른 기술을 더 익히고 싶어 연구를 거듭했다. 경기력에 기복이 있긴 했지만 그간 팀 상황에 따라 미들블로커와 아포짓을 오갈 수 있는 멀티플레이어로, 공격 루트가 다양한 에이스로 자리 잡게 된 것도 그런 노력 덕분이었다.
공교롭게도 두 성장의 순간 모두 국제무대에서 태극마크를 달고 뛸 때 겪은 것이다. 그래서인지 최근 대표팀 후배들의 경기를 지켜보면서도 남 일 같지 않다. 10여년 전 대표팀 막내로 있을 때 운 좋게 출전 기회를 얻었던 것처럼 그는 “어린 선수들도 국제 경기에 많이 출전해보는 게 중요하다”고 짚었다. 김희진은 “아시아선수권, 올림픽 예선전까지 큰 경기들을 치르고 오면 아시안게임 때는 기량이 오르지 않을까 싶다”고 덧붙였다.
올 시즌 목표는 봄배구 진출이다. 김희진은 “최근엔 추울 때 시즌을 마쳐서 따뜻할 때 배구를 해보고 싶다”고 말했다. 마지막으로 남길 말이 있는지 묻자, 목례와 함께 짧게 덧붙인다. “한 달 후에 뵙겠습니다.”
https://news.kmib.co.kr/article/view.asp?arcid=0924320180&code=12140000&cp=n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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