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려서 문제? 실력대로 뽑은 것
그나마 다행인 건 옛날처럼 선수들의 정신력과 근성을 탓하거나 껌을 씹는다고 씹어대는 식의 비판은 거의 사라졌다는 점이다. "선수들 배에 기름이 찼다"거나 "훈련량이 부족하다"는 식의 낡은 비판도 이제는 입밖으로 내면 말한 사람이 욕먹는 분위기가 형성됐다. 그러나 여전히 핵심을 벗어난 엉뚱한 비판, 문제 해결에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엉터리 진단도 적지 않다. "KBO리그 144경기가 너무 많다"는 일부 현장 야구인들의 볼멘소리가 대표적이다.
이들은 국내 리그 경기수가 지나치게 많아서 국제대회 때 제대로 된 경기력을 발휘하기 어렵다고 외친다. 하지만 3년 전 도쿄올림픽 때는 정규시즌 중 리그를 중단하고 진행했고, 작년 WBC는 정규시즌 개막 전에 열렸다. 미국 메이저리그 선수들은 연간 162경기를 치르고 가을야구에서도 엄청나게 많은 경기를 소화하지만 체력 핑계는 대지 않는다.
20대 초반 젊은 선수들 위주의 무리한 세대교체가 실패의 원인이라는 비판도 결과론일 뿐이다. 실제 데이터를 살펴보면 이번 대표팀이 나이를 떠나 현재 리그에서 가장 뛰어난 선수들로 구성된 것을 볼 수 있다. WAR(대체선수대비 기여승수·스탯티즈 제공) 기준으로 볼 때, 선발투수진의 경우 원태인(5.87), 곽빈(5.00), 임찬규(4.39), 손주영(4.23)이 국내 선발 가운데 리그
1위, 3위, 5위, 6위를 각각 차지했다. 원태인과 손주영의 부상 이탈만 없었다면 충분히 경쟁력 있는 선발진이었다. 반면 대표팀 단골멤버였던 베테랑들의 기록을 보면 양현종(5.01·2위), 류현진(4.44·4위), 김광현(3.42·9위)이 어린 후배들보다 압도적인 경쟁력을 보였다고 하기 어렵다. 불펜투수진 역시 김택연(3.23·불펜 1위), 박영현(2.72·4위), 정해영(2.44·6위), 조병현(2.37·9위) 등 리그 최정상급 투수들로 구성됐다. 야수진에서도 김도영(8.32), 송성문(6.13), 홍창기(5.06), 박동원(4.40), 문보경(4.32), 김주원(3.75), 박성한(3.60), 윤동희(3.13) 등 국내 야수 최상위권 선수들이 대거 포진했다. 구자욱(5.69)과 김지찬(3.98) 역시 부상만 없었다면 당연히 발탁됐을 선수들이었다. 젊은 선수들이 단지 나이가 어리다는 이유만으로 발탁된 것이 아니라, 기량으로도 충분한 경쟁력을 갖추고 있었다는 의미다.
한국야구의 전반적 수준이 저하됐다는 비판 역시 근거가 부족하다. 역사적으로 한국야구가 일본보다 객관적인 기량에서 우위였던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전력과 선수층의 열세를 몇몇 스타 선수들의 기대 이상 활약으로 만회해온 게 한·일전의 역사다. 고교팀 수가 100여개에 불과한 한국이 4000개 가까운 고교팀을 보유한 일본을 상대로 통산 9승 14패(프로선수 출전 대회 기준)를 기록하며 비교적 대등한 승부를 펼친 것만 해도 기적에 가깝다.
미·일의 엄청난 데이터 활용법… 한국은?
청소년 야구 레벨만 놓고 보면 한국야구의 경쟁력은 세계 상위권에 속한다. 최근 성적이 증명한다. 한국 청소년 대표팀은 최근 5차례 열린 U-18 야구월드컵에서 모두 4강 이상의 성적을 거뒀고, 평균 순위는 3위를 기록했다. 매번 예선 탈락하는 성인 대표팀과는 극명하게 대비되는 성적이다.
가장 상징적인 사례는 2012년 U-18 야구월드컵이다. 당시 한국 청소년 대표팀은 오타니 쇼헤이가 선발 등판한 일본을 상대로 승리를 거뒀다. 그러나 12년이 지난 현재 오타니는 7억달러의 몸값을 받는 세계 최고의 스타가 된 반면, 당시 오타니를 이겼던 한국 선수들은 대부분 은퇴했거나 프로 1~2군을 전전하고 있다. 청소년 시절엔 세계 레벨이었던 유망주들이 정작 성인 무대에 가서는 성장하지 못하거나 오히려 퇴보하고 있다는 얘기다. 문제는 선수들이 아니라, 좋은 유망주들의 잠재력을 제대로 키우고 활용하지 못하는 한국야구의 시스템과 지도자들에게 있다.
현대 야구에서 데이터 분석과 활용은 승리를 위한 필수 요소가 됐다. 한 경기 패배가 곧 탈락으로 이어지는 단기전과 국제대회는 데이터가 더 중요해진다. 메이저리그 포스트시즌에서 펼쳐지는 데이터 활용의 수준은 엄청나다. 단순한 좌우타자 상대 피안타율을 넘어 공의 무브먼트, 릴리스 포인트, 로케이션, 타구질까지 일반 야구팬들의 상상을 뛰어넘을 만큼 방대하고 세밀한 데이터가 활용된다. 처음 만나는 투수와 타자의 매치업도 데이터를 활용해서 '생소함'을 최소화한다. 빅리그 구단들은 비슷한 유형의 타자가 해당 투수와 가장 비슷한 투수들을 상대로 기록한 수백, 수천 타석을 바탕으로 예측값을 산출한다. 투수와 타자의 투구 궤적과 스윙 궤적, 그리고 이들의 접점까지 고려해 대응책을 마련한다. 최근에는 '트랙젯(Trakjet)'이라는 첨단 피칭머신이 등장해 한 번도 상대해본 적 없는 투수의 공을 가상으로 체험할 수 있는 수준까지 발전했다.
이런 데이터의 힘은 국제대회에서 약체로 평가받던 팀들의 성과로 이어졌다. 야구의 변방인 이스라엘은 지난 도쿄올림픽에서 MLB 구단에서 받은 데이터를 활용해 기대 이상의 성과를 거뒀고, 프로리그가 없는 체코는 작년 WBC에서 경쟁국 경기 영상과 투구 및 타구 트래킹 데이터를 활용해 세계를 놀라게 했다.
메이저리그에서 데이터를 가장 잘 활용하는 팀이 '부자구단'인 LA 다저스와 뉴욕 양키스인 것처럼 국제무대에선 최강팀인 미국과 일본이 데이터를 활용해 전력을 극대화한다. 이번 프리미어12에서 미국 대표팀의 마이크 소시아 감독은 흔히 '올드스쿨'로 분류되는 노장 감독이지만, 데이터에 기반한 혁신적인 운영을 보여줬다. 5경기에서 미국팀 선발투수들의 평균 투구 이닝은 3이닝에 그쳤고, 가장 오래 던진 투수도 3.1이닝을 넘지 않았다. 아무리 잘 던지고 있어도 상대 타자와 세 번째로 만나게 되면 가차없이 교체했다. 이는 한 투수가 같은 타자를 세 번째 만나는 것이 위험하다는 최신 데이터에 근거한 결정이었다. 타순에서도 팀내 최고 타자인 맷 쇼를 전통적인 3번이나 4번이 아닌 2번에 배치하는 등 현대 야구의 트렌드를 충실히 따랐다.
반면 한국 대표팀의 모습은 3년 전 도쿄올림픽 때와 전혀 달라지지 않았다. 대회 기간 내내 "선발투수가 없다" "4번타자가 약하다"는 말만 고장난 레코드처럼 되풀이할 뿐이었다. 선발이 없어 한 경기를 불펜투수만으로 운영한 LA 다저스가 월드시리즈 우승을 차지하고 팀내 최고 타자인 오타니를 1번에 기용하는 등 창의적인 전력 운영을 보여주는 동안, 한국 대표팀은 선발투수와 4번타자에만 집착하는 구시대적 운영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했다.
한국은 대만이 사이드암에 약할 것이라는 막연한 추측으로 고영표를 선발로 내세웠다. 결과는 2이닝 6실점 패배였고, 사실상 이 경기 패배로 한국의 본선 진출은 물건너갔다. 대만 타선이 우타자 위주에 스윙이 거칠어 사이드암을 제대로 공략하지 못한다는 건 10년 전 얘기다. 류중일 감독은 쿠바전을 앞두고는 "쿠바 선발이 소프트뱅크 왼손투수로 알고 있는데 내일 오전에 분석해서 공략하도록 하겠다"는 말로 실소를 자아내기도 했다. 다른 나라들이 선수 선발부터 경기 준비, 실제 경기장에서의 의사결정까지 방대한 분석의 도움을 받을 때 한국 대표팀은 여전히 막연하고 주관적인 '감'과 '경험'에 의존했다.
과거의 인물들로 구성된 코칭스태프
3년 전 도쿄올림픽 참사 이후 KBO 관계자는 "어쩌면 사령탑 얼굴보다 더 중요한 게 기술위원회 인사"라며 "도쿄올림픽에서 부족함을 느꼈던 데이터 야구 활용 폭을 넓히기 위해선 그런 방향으로 정통한 인사가 필요하다"고 밝혔다. 야구단으로 치면 프런트에 해당하는 기술위원회에서부터 대대적 변화가 있을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이후 이뤄진 변화는 기대와는 거리가 멀었다. 2022년 항저우 아시안게임을 앞두고 구성된 기술위원회에는 그나마 데이터 전문가를 포함시키는 시늉이라도 했지만, WBC를 앞두고 기술위원회를 전력강화위원회로 명칭만 바꾸고 확대 개편하면서 다시 예전 방식으로 회귀했다.
조계현 전력강화위원장은 아무리 좋게 봐도 데이터 야구나 최신 세계야구의 흐름과는 거리가 먼 인물이다. 다른 위원들 역시 대부분 해설위원이나 코치 출신으로 야구계의 최신 트렌드를 이해하고 대표팀 운영에 반영하기엔 한계가 뚜렷하다. 직접 데이터를 활용하고 분석할 줄 아는 인물도 찾아보기 어렵다.
대표팀 감독과 코칭스태프 구성도 마찬가지다. 류중일 감독은 과거 삼성 시절엔 뛰어난 지도자였지만 지금은 전성기가 지난 인물이다. 이번 대회에서 류 감독의 운영은 여러 면에서 '감이 떨어졌다'는 인상을 남겼다. 투수 교체는 한 박자씩 늦었고 선수 기용은 경직됐다. 불펜 최고 투수인 박영현은 오직 9회 세이브 상황에서만 등판했고, 한 번도 3연투를 해본 적 없는 곽도규를 갑자기 3연투 기용하는 등 구시대적인 기용도 대회 내내 비판의 대상이 됐다.
일본의 '사무라이 재팬'은 일본프로야구협회(NPB)와 독립된 기구로 운영되며 U-12부터 U-15, U-18, U-23, 그리고 성인 대표팀까지 체계적인 시스템 아래 운영된다. 대표팀의 바이오메카닉스 데이터는 연령대별로 원활하게 공유되고, 코치진도 대표팀에만 전담으로 집중할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되어 있다. 한국도 이제는 변화가 필요하다. 1년에 10경기도 치르지 않는 대표팀 감독에게 수억원의 연봉을 지급하느니, 그 자원을 대표팀 시스템 구축에 투자해야 한다. 전력강화위원회를 상시 운영되는 전문가 집단으로 재편하고, 선수 선발부터 대회 준비, 경기 운영까지 체계적이고 유기적으로 돌아가는 체제를 갖춰야 한다. 대표팀 선수단은 세대교체됐는데 시스템과 코칭스태프는 옛날 그대로인 부조화도 사라져야 한다.
https://naver.me/Fw7KvU51
배지헌 기사인데 좋은 기사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