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태사자 ‘타임’
왠지 낯이 익다. “혹시 TV에 나오던 분 아니세요?” 40대 초반의 택배기사는 빠른 걸음으로 떠난다. 마침내 기억의 램프가 켜진다. 아, 그 사람. ‘길을 걷다 우연히 널 마주치게 되면/나는 아무 말도 못하고 너를 피할 것만 같아/그렇게도 너를 좋아했기에/그렇게도 너를 아꼈기에’(태사자 ‘타임’ 중). 발코니에서 내려다보니 배송차에 오르기 전 택배기사가 위쪽을 보며 씩 웃는다. 불현듯 가슴이 아려온다. ‘마음속의 눈물을 보아야 하나요/사랑한다 말을 마오/유행가 가산 줄 아오/갈래면 가지/왜 돌아봅니까’(윤복희 ‘왜 돌아보오’ 중).
새벽에 택배기사는 몇 장의 사진과 함께 안부를 올린다. “걱정 안 하셔도 돼요. 나름대로 열심히 재미있게 살고 있어요.” 가상의 상황 속 주인공이 드디어 지난주 예능프로에 출연해 육성으로 근황을 전했다. 왕년의 아이돌에서 지금은 ‘생활미남’으로 변한 3명의 아저씨와 함께 20년 전의 노래와 춤을 힘겹게 복기했다. 거의 20년 만인지라 다들 외모에 신경 썼다고 했다. 몸무게는 줄였지만 벽면에서 뿜어져 나오는 화면 속 청년들(과거의 그들)의 에너지는 못 따라갔다. ‘그래 나도 이제 이런 내가 보기가 싫어/하지만 너를 잊지 못하는데 어떻게 하라고/친구들은 나를 비웃겠지/그래도 난 신경 쓰지 않아’(‘타임’ 중).
택배 에피소드는 한 편의 CF로도 괜찮을 성싶다. 고객과 택배기사를 한때의 연인 사이로 설정한다면 좀 더 극적일 것이다. 태사자 4명(사진)이 완전체로 출연한 프로그램은 ‘투유 프로젝트 슈가맨3’(JTBC)다. 택배기사 김형준은 지금까지 3만 개 정도를 배송했단다. 축구를 좋아하는 그는 땀 흘려 번 돈을 모아 자신이 좋아하는 팀을 응원하러 세계여행도 다닌다. 구김살이 없어서 오히려 애틋하다.
기억이 강물과 다른 건 거슬러 올라갈 수 있기 때문이다. 제자가 내게 영상 하나를 전송했다. 온라인 탑골공원이 뜨는 분위기와 맞물려서 1990년대 말 ‘음악캠프’(MBC)를 보다가 제작진 명단에서 내 이름을 발견한 것이다. ‘음악캠프’는 그 당시 내가 책임PD였다. 생방송이 있는 토요일 여의도공개홀에서 처음 태사자를 만났다. 아이돌 그룹이지만 프로 냄새가 나지 않았다. 실력이 아니라 인상과 인성이 아마추어 같았다. 수수하고 순수했다. 때가 묻지 않아 보였다. ‘타임’이라는 노래 또한 독특했다. 간주와 후주가 묘하게 가슴을 후볐다. 반주에 맞춰서 연습한 각도대로 정확히 움직이는 군무도 인상적이었다.
‘슈가맨’의 객석은 10대부터 40대까지 네 그룹이 따로 앉는다. 세대별로 음악에 대한 기억과 파장이 다르다는 의도다. 10대는 태사자의 춤을 ‘희한하다’고 표현했다. 좋다는 건지, 안 좋다는 건지 모호할 때 쓰는 말이다. 스튜디오에는 웃음이 흘렀지만 열성팬의 마음은 편치 않았을 거다. 하지만 어쩌랴. 그것이 ‘타임’의 규칙인 것을.
‘슈가맨’의 모티브가 된 건 다큐멘터리 ‘서칭 포 슈가맨’(2011)이다. 미국의 포크록 가수 시스토 로드리게스는 1970년대 초 밥 딜런 풍의 앨범 2장을 낸다. 자국에선 존재감이 없었는데 엉뚱하게도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인종차별저항운동을 상징하는 음악으로 부활한다. ‘미국에선 제로지만 남아공에선 히어로다’(American zero, South African hero)라는 기사까지 날 정도였다. 그는 남아공을 4번 방문해 30번 넘는 공연을 펼쳤다. 하지만 그것이 전부였다. 로드리게스는 디트로이트에서 건물 철거나 수리, 복구현장에서 짐을 나르며 노후를 보냈다.
한때 지하철 3호선에는 성형광고가 많았다. ‘영화처럼 살고 싶다면 몇 번 출구로 나오세요’ ‘타임’의 가사에도 ‘이젠 아주 오래된 영화처럼 느껴질 뿐’이라는 부분이 있다. 사실 얼굴을 바꾸는 것보다 마음을 바꾸는 게 유익하다. 행복의 출구는 압구정에 있는 게 아니라 마음에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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