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맹한 무장의 나라
(4황자 왕소, 8황자 왕욱 칼부림씬 )
(4황자 왕소의 파워 기마술)
무신정권까지 있던 나라라 그런지 무협지에나 나올 법한 활약을 보인 전설적인 무인들이 꽤나 많다. 그 많은 굴욕은 단지 국력이 문제였다.고려는 요나라를 역관광 보내기라도 했지 조선은...그래도 조선도 초기엔 4군6진이나 대마도정벌등많이 했지않았나?
개국공신 중 유금필은 출동만 하면 지던 싸움도 전세가 역전되는 활약을 보였다.
고려 2대 국왕 혜종은 통일전쟁 때 활약한 무인으로 방에 자객이 난입하자 맨주먹으로 때려잡았다.
여요전쟁 때 양규는 1천여명의 병력으로 6천 거란군이 지키는 곽주성을 탈환했다.이말은 즉 6배가 넘는 적을 공성전(!!!)에서 승리했다는 뜻이다. 이후 소수 병력으로 기습전을 펼쳐 거란군을 괴롭히며 3만의 포로를 구출해 냈다.
문종 때는 '유고'라는 절충군 대정이 있었다. 그는 10명의 병사와 함께 저녁에 순찰을 돌다가 40여명의 여진족 도적의 습격을 당했다. 병사들은 놀라서 숨었지만 유고는 단기로 앞장서서 40여인의 여진 도적들과 맞서 싸웠고 결국 여진인들은 도망쳐 버렸다. 출처는 고려사절요 문종 3년(1049년) 6월.
여진전쟁 때 활약한 한국사 최강의 소드 마스터 척준경에 대해서는 더 이상 말할 필요가 없다.
무신정권의 이의민과 두경승은 수박의 고수였으며 궁궐에서 주먹으로 벽을 쳐서 힘겨루기를 한 일화가 정사에 기록되어 있다. 특히 이의민은 조위총을 토벌하던 전투 중 눈에 화살을 맞았는데 그래도 적진으로 돌진해 적군을 물리쳤다.
승려 김윤후는 화살 하나로 몽골 장군 살리타이를
저격사살했다. 후에 김윤후는 자신이 살리타이를 쏜게 아니며, 그때 자신은 활도 가지고 있지 않았다고 했다고 한다. 이후 충주성 전투에서 노비군을 이끌고 70여일을 농성하여 몽골군의 맹공으로부터 성을 지켜냈다. 이는 만화 살례탑에서 그려진다. 물론 김윤후가 사살한 것이 맞지만 겸양의 뜻으로 한 말일 수도 있다.충렬왕 때는 '한희유'라는 장군이 있었는데, 여몽연합군의 일본원정에 참전했을 때는 맨손으로 적의 칼을 빼앗아 적을 베었는데 손을 다쳤으나 그 부상 속에서도 용기를 내어 적들을 베었다. 합단이 침임했을 때는 적군에 활을 잘 쏘는 적장이 있었는데 1장 8척(약 540cm!)의 창을 휘두르며 적진에 돌입하자 적들이 놀라 한쪽으로 밀렸고, 그 적장을 움켜잡아 베어 죽이고 장창에 그 목을 걸어보이자 적의 기가 꺾였다고 한다. 이 역시 전부 정사인 고려사에 기록되어 있다.
최영은 홍산 전투에서 입술에 화살을 맞은 채로 전투를 벌여 그대로 승리했다. 고려를 침공한 왜구들이 "머리 하얀 최 만호"라고 부르며 두려워했을 정도.
이성계의 궁술에 대해서도 더 이상 말할 필요가 없으며, 활만 잘 쏜 것 뿐만 아니라 다른 무예에도 뛰어났고, 훌륭한 야전사령관이기도 했다. 하지만 이 부분도 약간 비판적으로 보아야 할 것이, 고려사에 기록되어 있는 내용이라 조선 태조인 이성계를 띄워주기 위한 기록일 수도 있기 때문.
문화
(화려함 터지는 배경을 보라)
고려시대 장례문화는 불교에 많이 영향을 받아 화장이 많이 퍼졌고, 사람이 죽은 후 제사를 지낼 때는 아들/딸들이 돌아가며 지냈고, 재산도 균분 상속되었다. 일일히 제사를 챙기기 힘들 때는 절이나 신당에 노비나 토지 등 재산을 주고 제사를 대리하였는데, 이는 유교 사상을 근간으로 억불정책을 시행한 조선시대에 들어 금지되었다. 그러다 해방 이후 2000년대인 현재에 들어 다시 퍼지고 있다. 또한 불교의 영향으로 제사상에 고기류를 올리는 대신 한과 중 고기와 과일을 대신하는 유밀과를 올리는 게 일반화되어 많이 유행하였다. 고려의 유밀과는 원 간섭기 원나라에도 전해졌는데, 맛이 좋아 원나라에서도 칭송이 자자했다고 전한다. 유밀과는 크게 유행하던 고려 당시에도 상당히 귀한 음식이라 나라에서 사치 금지령이 내릴 때마다 항상 지적되었으며, 조선시대에 들어서도 불교 억제정책과 더불어 사치스럽다는 지적을 많이 받았으나 제삿상의 필수 음식으로 계속 사랑받았다.
그 외에 경국대전에서 재혼 금지를 성문화한 조선시대에 비하면 여성의 이혼 및 재가가 상대적으로 자유로웠다. 고려도 마음대로 이혼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과부의 재혼이나 처녀성 유무에 거의 거리낌이 없었던 점에서 조선은 물론 부분적으로는 현대 대한민국 기준의 시각으로도 개방적인 부분이 있었다.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1731828
당대의 시대상을 감안하여 관직 등 지배층으로 진출하는데 제약이 있었던 것을 제외하면 여성의 지위는 아주 낮은 편은 아니었다. 당시 관직 제도를 제대로 갖춘 나라에서 여성이 관직에 진출하는 경우는 사실상 없었다. 중국이 있지만 거긴 원래 문화상 예외가 많은 나라라 기상천외한 일이 많았다.
대신 이혼 및 재가는 여성의 정절보다 가문 이익을 중시한 성향 탓도 있어서 많은 여성들이 가문을 위해 강제로 이혼당하거나 재가하는 일도 많았고 고려도 기본적으로는 가부장제 사회이기 때문에 여성들의 지위를 아주 높게 평가하는 것은 무리라고 하겠다. 처가나 외가를 중시했다지만 어디까지나 가부장 권위 내에서의 일이었으니까. 어쨌거나 이런 고려의 풍속은 조선 전기까지 이어졌다.
고려가 여성의 권한 높은 나라였는지는 논란이 있다. 여성이 사채를 놓거나 재산을 불리는 행위는 조선 때도 흔히 보이는 현상이었다. 강혜선, (조선후기 사족 여성의 경제활동과 문학적 형상화 양상), ((한국고전여성문학연구))24, 2012 참조). 또한 고려후기에 한정되기는 하지만, 여성들이 사법적 보호장치에서 소외된 삶을 살았다는 연구결과도 있다. 김남옥, (고려후기 여성의 법적 지위-범죄와 형벌을 중심으로-), ((한국고전여성문학연구))19, 2009 참조. 예수 당시 유대사회에서 여성들은 이혼이 자유로웠지만 아무도 여권이 높은 시대라고 보지 않은 것처럼, 단순히 사채를 놓거나 재산을 불리거나 하는 경제적 행위를 한다고 해서 여권이 높았다고 결론을 내리는 건 신중히 생각해야하지 않나 한다. 고려시대에 여권이 높았다는 것에 대한 반론은 다음과 같은 논문, 저술을 참조. 권순형, (고려시대 여성의 규범과 삶), ((유교사상문화연구))14, 2000; 권순형, ((고려의 혼인제와 여성의 삶)), 서울:혜안, 2006.
하여튼 고려는 물려받은 재산으로 사채를 놓거나 장사를 해서 재산을 불리는 여성들도 있었거니와 일부다처제를 주장했던 대신이 저자거리에서 분노한 여성들에 의해 봉변을 당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그리고 현대보다 나은 점도 있긴 했는데 얼마전까지 한국 사회에서 문제가 된 호주제의 경우 고려에선 여성도 호주가 될수 있었다는 점을 들수가 있으며 제사의 경우에도 현재 우리가 제사 하면 떠올리는 조선 후기의 유교적인 분위기와는 많이 달랐다. 형제들이 돌아가면서 지내거나 지금처럼 아예 깔끔하게 절이나 무속인들에게 돈을 내고 조상님 제사를 위탁하는 경우가 많았다. 근세 시기까지 불교가 국교였던 일본은 지금도 이렇게 절에 위탁하는 경우가 일반적이다. 우리나라는 조선 중기로 넘어가면서 없어졌다가 근현대에 들어 다시 나타났다. 이런 분위기때문에 고려는 아들이 없으면 딸이나 사위 집안에서 제사를 이어갔다. 지금의 명절, 제사 풍토를 생각하면 확실히 흥미로운 대목. 이건 당시 불교가 사실상 국교였던 것의 영향이다. 그리고 여자가 제사를 맡아서 지낼 수 있었던 배경이기도 하다. 절에 돈만 주면 제사의 의무가 끝나고, 여자도 재산 상속을 받으니 재산에 여유가 된다면 스스로 제사를 올릴 수 있다.
그리고 여성호주 자체는 구한말까지도 존재했던 것으로 여겨진다. http://blog.naver.com/lord2345/220279809489
쌍화점, 만전춘등을 비롯한 고려가요들은 훗날 조선의 성리학자들에게 음란, 퇴폐가요로 낙인찍혀 대부분 검열삭제 당하는 안타까운 운명을 맞이한다. 또한 고려의 멸망을 안타까워 하며 지은 학자이자 시인인 이색의 부벽루가 전해진다.
(욕탕에서 여유로운 한때 보내는 황자들)
(4황자 뒤 나오는 욕탕을 주목)
달의 연인 작가 인터뷰 中
http://tvdaily.asiae.co.kr/read.php3?aid=14720834881151115002
( 4황자 왕소&해수 메이킹 장면)
고려의 남녀혼욕
“남녀 구별 없이 모두 의관을 언덕에 두고 물굽이에 따라 벌거숭이가 되어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는다.”는 내용이 《선화봉사고려도경宣和奉使高麗圖經》에 실려 있다. 한 가지 아쉬운 것은 저자 서긍徐兢은 애당초 삽화를 넣었다는데, 전해지는 것은 그림이 없는 부본뿐이라는 것이다. 목욕 장면을 그림으로 그렸는지 여부는 알 수 없지만, 있었다면 고려 시대의 개방성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작품이 되었을 지도 모를 일이다. 고려 시대는 조선 시대보다 개방적인 사회였다. 부인이나 승려도 남자처럼 절을 했다는 기록이 있으며, 남녀 재산 균등 상속은 무려 17세기 즉 조선 시대 중후반까지 이어졌다고 한다.
이런 개방성을 잘 알 수 있는 대목이 바로 남녀 혼욕 문화인 셈이다. 그것도 몰래 하는 혼욕이 아니라 모두에게 공개된 시내에서 했다는 것은 오늘날의 한국 문화에서도 상상하기 힘든, 서구의 누드비치nude beach에서나 볼 법한 자유로움이다.
http://webzine.nfm.go.kr/?p=3410
고려인들은 아침에 일어나면 목욕을 한 후에야 집을 나서며 여름에는 하루에 두 번씩 목욕을 했다. 흐르는 시냇물에 남녀가 모여 모두 의관을 언덕에 놓고 속옷을 드러내는 것을 괴상하게 여기지 않는다. 서긍은 "고려인들은 중국인들을 때가 많다고 늘 생각했다"면서 "중국문헌에 고려인은 예로부터 깨끗하다고 했는데 여전히 그러했다"고 적었다.
고려 사람들은 언제나 입을 열면 청결하지 못한 중국인들을 비웃을 만치 목욕을 즐겼다. 남녀의 구별 없이 강가에 나와 의관을 강가에 벗어놓고 흐르는 물에 몸을 담그는데, 이를 이상하게 여기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한다. 허나 ‘사대부의 나라’ 조선은 그런 야만적 풍속이 사라진 지 오래 라며 중국 역사서에서 삭제해줄 것을 요구하기에 이른다.
http://www.hani.co.kr/arti/BOOK/102814.html
http://premium.mk.co.kr/view.php?no=15621
사전적 의미의 '목욕'은 머리를 감으며 몸을 씻는 것이고, '목욕재계'는 제사를 지내거나 신성한 의식을 행할 때 목욕해서 몸을 깨끗이하고 마음을 가다듬어 부정을 피하는 것을 뜻한다.
신라시대는 목욕재계를 계율로 삼는 불교가 전해지면서 목욕이 습관화되었으며, 마음을 깨끗이 하라고 죄수에게 목욕벌을 내리기도 했다. 삼국과 고려의 불교가 목욕재계를 율법으로 정하면서 주술적 수단이었던 목욕이 진일보했다. 불교가 국교로 부흥하면서 우리민족의 목욕문화는 더욱 성행하게 된 것이다. 삼국시대에 대중화된 풍속으로 자리 잡은 목욕문화는 백제왕이 불상, 경전을 일본에 보내면서 함께 전파되었으며 불교가 발전한 통일신라시대에 증기욕이 발달되면서 더욱 확대되어 일본에 전파되기도 했다. 이는『先ぅ風俗史』라는 일본문헌에서 찾을 수 있다. 삼국시대 한증탕이 일본 서민들의 공동탕으로 지방에 널리 퍼졌다는 일본의 목욕풍속이 기록되어있다.
통일신라시대의 목욕문화는 고려시대 서민들의 생활양식으로 전승되어 대중화되었다. 그동안 주술의 수단이었던 목욕은 고려시대부터 질병치료 및 예방의학의 개념이 정립되었으며,『고려도경』에는 ‘고려인들이 하루에 서너 차례 목욕을 했고 개성의 큰 내에서 남녀가 한데 어울려 목욕을 했다’고 기록되어있다. 온천의 치료효과에 관한 고려인들의 목욕문화를 엿볼 수 있다. 또『고려사절요』에는 역대 왕들은 온천행차를 즐겼으며 병이 난 신하에게 온천욕을 권장했다는 기록이 있다.
고려, 조선의 역대 왕들은 온천욕을 즐겼는데 황해도 평산군에 있는 평산온천을 자주 찾았다고 한다.『신증동국여지승람』의 기록을 살펴보면 태조, 세종, 세조가 온양온천에 머무르며 목욕하고 유숙하였다고 한다.
http://newsplus.chosun.com/site/data/html_dir/2013/12/30/2013123000739.html?to_inside
화장
(현대에서 화장품 회사 직원하다 고려로 타임슬립한 해수가 4황자 왕소의 얼굴 흉터를 화장으로 가려주는 씬(이 아닐까 추측하는 장면))
고려시대 고려시대의 화장과 화장품의 개발은 신라의 화장문화가 전승, 발전된 것이었다. 고려 태조가 신라의 정치·문화 제도와 문화전통을 계승하는 정책을 시행하였다. 게다가, 종교 역시 불교를 계속 신봉하였고, 신라 초기에 생성된 미의식인 영육일치사상이 이어졌다. 그 결과 고려의 화장문화는 외형상 사치해졌고, 내면상으로는 탐미주의(耽美主義) 색채가 농후해졌다.
목욕의 경우를 보면, 청결관념이 더욱 강조되어 송나라 사신 서긍(徐兢)이 목격하여 ≪고려도경 高麗圖經≫에 기록한 바와 같이, 남녀가 한 개울에서 한데 어울려 목욕하고, 하루에 서너 차례나 목욕할 만큼 깨끗한 신체를 간직하고자 노력하였다.
그리고 흰 피부로 가꾸기 위한 여러 가지 방법이 강구되었는데, 전신목욕이 성행하고 부유층에서는 갓난아이 적에 복숭아 꽃물에 목욕시키기도 하였다. 부유층의 여자들은 난탕(蘭湯), 즉 향수에 목욕하기도 하였다.
≪고려도경≫에는 고려 귀부인의 화장에 대하여, 향유(香油) 바르기를 좋아하지 않고 분은 바르되 연지를 즐겨 바르지 않았으며, 눈썹은 넓게 그리고, 검은 비단으로 만든 너울을 쓰고, 감람(橄欖) 빛깔의 넓은 허리띠를 두르고 채색한 끈에 금방울을 달고, 비단 향낭을 여럿 차는데, 향낭을 여러 개 패용할수록 자랑스럽게 여겼다고 기록되어 있다.
서긍의 이 기록은 중국인의 눈에 비친 것으로서, 중국의 화려한 색채화장과 대비한 표현임을 감안한다면, 통일신라시대에 우리 고유의 엷고 우아한 화장이 다소 중국화하였다고 하지만, 기본은 고려시대에도 거의 변함이 없었음을 말해주고 있다.
그러나 재가승(在家僧)의 출가법 팔계재(出家法八戒齋) 가운데 도식향만(塗飾香鬘)·불착화영락(不著華瓔珞)·불향도신(不香塗身)·불착향훈의(不著香薰衣) 등의 항목이 있고 보면, 통일신라시대에 화려하고 사치스러워진 경향이 고려시대에 일부나마 더욱 사치스러워져, 이에 대한 반발이 적지 않았음을 말해준다.
일부 계층에 한정된 것이기는 하지만 신체와 머리카락·옷에 향료를 뿌리거나 발랐으며, 옷에 향내를 스미게 하였고, 갖가지 보석 장신구를 패용하고, 여러 가지 화장품을 겹겹이 진하게 바르기도 하였기 때문에, 일부 사찰에서는 이러한 차림의 신자들에게 출입을 금지시킨 예도 있다.
고려 여인들의 화장경향에 대한 서긍의 표현과 출가법 팔계재에 나타난 그것이 이처럼 다른 까닭은 고려 여인들의 치장이 신분에 따라 달랐기 때문이다.
대표적인 예로서, 기생 중심의 분대화장(粉黛化粧)을 들 수 있다. 분대화장을 간단히 요약하면, 분을 도포하듯이 하얗게 많이 바르고, 눈썹을 가늘게 가다듬어 또렷하게 그리고, 머릿기름은 반질거릴 만큼 많이 바르는 특징이 있다.
기생을 분대라고 별칭할 만큼 기생들이 판에 박은 듯 한결같이 분대화장을 하였는데, 고려 초기에 교방(敎坊)에서 기생이 훈련되고 분대화장법도 교육됨으로써 분대화장은 기생이라는 직업여성의 상징이 된 바 진하고 야한 화장을 으레 분대라고 부르는 의미변화를 가져왔다.
여기에서 나아가 진하거나 야한 화장을 한 여인들, 즉 궁녀나 미인(화장한 여인이라는 뜻) 역시 분대라고 별칭하게 되었는데, 고려 기생의 분대화장형태는 조선시대에도 여전히 계승되었다. 그러나 조선시대에는 고려시대의 신분별 화장형태가 무너져, 궁녀·기생 등 직업여성과 비직업여성으로 대별되었다.
즉 여염의 규수나 부인들은 평상시에는 화장하지 않고 연회나 나들이 때에만 화장함으로써 애써 직업여성으로 오해받지 않으려고 분대화장을 기피한 까닭에 분대화장은 더욱 기생의 상징이 되었다.
다시 말하면 직업여성 위주의 분대화장류의 화장과 여염여자들의 비분대화장류, 즉 엷디 엷은 화장으로 이원화되었는데, 그것은 고려 초기에 싹트기 시작하였다. 한편 고려시대에 특기할 사항은 면약(面藥)이 사용되고 있었다는 점과 염모(染毛)가 시행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서긍의 ≪고려도경≫에는 송나라의 정사·부사·도할관·제할관의 자리에 은제(銀製) 면약호(面藥壺)를 두고, 그 밖의 사람들에게도 구리로 만든 면약호를 두었는데, 면약호의 생김새는 둥근 배에 목이 길며 뚜껑이 다소 뾰족하다고 하며, 높이는 5치, 배의 지름은 3치5푼, 용량은 한 되였다고 한다.
이와 같은 크기와 생김새로 보아 면약은 여자 외에 남자들도 항시 사용하는 안면용 액상(液狀)의 화장품으로 추측된다. 즉 요즘 로션에 해당하는 피부미백제 겸 보호제였던 듯하다. 또 고려 말엽에 읊어진 사설시조 중에 “백발에 센(흰)머리에 흑(黑)칠하고 태산준령으로 허위허위 넘어간다……”(이 시조는 조선 초기의 작품이라고도 함) 하는 구절로 미루어볼 때, 머리 염색이 서민사회에까지 확산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한편 고려시대 공장(工匠)에는 소장(梳匠)과 경장(鏡匠)이 배치되어 있었다. 이것은 화장의 기본도구인 빗과 거울을 양산하기 위한 조처로서, 화장이 보편화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인데, 화장품제조 기술자도 따로 배치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왜냐하면 면약의 사용이 적지 않은 동시에 기생용 분대의 소비량이 적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네이버 지식백과] 화장 [化粧]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삼국시대에는 화장품 제조기술이 뛰어나 일본과 중국에 그 기술을 전하였고, 화장기술 역시 고도의 수준에 도달했었다. 화장뿐 아니라 옷 ·장신구 등 모든 생활이 사치에 흘러, 고려시대의 정치가들 사이에서는 신라의 패망이 사치풍조에서 비롯되었다 하여 사치금압(奢侈禁壓)을 강력히 주장하는 사람도 있었다.
그러나 고려가 신라의 정치 ·경제 ·군사제도를 거의 그대로 답습한 데다가 문화와 생활관습마저 계승하였으므로 신라의 화장경향 역시 계승 ·진보하였다. 고려인의 화장을 중국측의 기록으로 추측해 보면, ‘부인은 귀밑머리를 오른쪽 어깨에 내려 드리우고 나머지 머리는 아래로 내려 댕기로 매고 비녀를 꽂았다’(《宋史》)고 하였으며, ‘짙은 화장을 즐기지 않아 분은 사용하나 연지를 사용하지 않았으며(不喜塗澤 施粉無朱), 버드나무 잎같이 가늘고 아름다운 눈썹을 그렸다. 또한 비단향료주머니를 차고 다닌다’(《高麗圖經》)고 했는데, 이들 기록만으로 고찰한다면 고려인의 화장이 담장(淡粧)에 그쳤던 것으로 믿어진다.
그러나 이와 같은 표현은 이 기록자들이 송(宋)나라 사람들이기 때문에 매우 짙은 화장을 했던 송나라 여인들보다 엷다고 표현한 것뿐이다. 고려인들의 화장이 결코 엷었거나 연지를 사용하지 않았을 리 없는 것은 불가(佛家)에서 짙은 화장을 금했던 것으로도 알 수 있다(佛家 八戒齊 중에 不著華瓔洛 不香塗身 不著香董衣 등의 조항이 있다). 또, 고려시대 초에 제도화된 기생(妓生) 중심으로 짙은 화장, 즉 분대화장(粉黛化粧)이 성행하였다. 분대화장은 반지르한 머리, 눈썹과 연지화장 외에 백분을 많이 펴 바른 것으로서 당시로서는 매우 짙은 화장이었는데, 기생을 분대라고 부를 만큼 기생의 상징적인 치장이었다.
분대화장 역시 평면화장에 지나지 않았지만, 기생들의 직업적인 의식화장이 조선시대에까지 계승되고 여염집 여성들은 엷은 화장을 고수하여 고려시대부터 화장경향이 2원화되고, 기생들의 분대화장으로 인하여 화장을 경멸하는 풍조가 생겨나기도 했다.
고려인들은 향을 애용한 나머지 조정향(助情香)을 먹기까지 하였는데, 기생들이 특히 그러하였다. 고려가요 《만전춘별사(滿殿春別詞)》가 그러한 예로, 향을 먹은 기생의 노래이다. 이처럼 기생들의 분대화장은 화장에 대한 기피성향 ·경멸감을 발생시킨 반면에 화장의 보급과 화장품 발전에 기여하기도 하였다. 그것은 기생양성소인 교방(敎坊)에서 기생들에게 화장법을 가르치고, 이들이 사용할 화장품을 지급하였기 때문이다.
고려 조정에서는 수은(水銀)을 수입하여 거울을 만들게 하고 빗도 만들게 하였다(宮中에 鏡匠, 梳匠을 두었다). 뿐만 아니라 고려시대 후기에는 치졸하나마 머리염색도 유행했던 것 같다. 《청구영언(靑丘永言)》에 의하면, “백발에 화냥노는 년이……센(흰)머리에 흑칠하고……과그른 소나기에 흰 동정 검어지고 검던 머리 다 희거다.…”란 속요(俗謠)가 그것을 입증하고 있다. 고려시대의 화장수준을 간접적으로 설명해 주는 것으로 각종 화장도구와 화장품 용기가 있다.
삼국시대의 화장용기는 주로 토기 ·목제로서 파손되기 쉬워 남아 있는 것이 그리 많지 않으나 고려시대에는 금 ·은 ·청동 등 금속제 외에 청자로 대량 제조되어, 화려하고 견고한 화장품 그릇이 많이 남아 있다. 유병 ·향수병 및 연지합 ·분합 등이 대표적인 것들인데, 특히 화장합[粧匳]인 청자상감모자합(靑瓷象嵌母子盒)은 신라의 토기화장합(국립경주박물관 소장)을 발전시킨 것으로서 예술적 가치가 높다. 뿐만 아니라 청자 ·백자 등의 화장품 용기는 화장품의 안전도를 고려할 때 어떤 재질(材質)의 용기보다 가장 적합한 것이다.
고려시대의 화장수준이 높고 관심이 높았던 사실은 삼국시대, 조선시대보다 고려시대에 청동거울이 가장 많이, 그리고 정교하게 제조된 사실로도 충분히 입증된다. 이와 같은 고려시대의 화장문화는 중국 특히 원(元)나라에 크게 전파되었으리라 믿어진다. 고려와 원은 왕실끼리의 혼인으로 밀접한 관계를 유지했는데, 우위(優位)였던 고려의 문화가 대량으로 원에 전파되어 고려양(高麗樣:고려풍속)의 유행을 이루기도 했기 때문이다.
[네이버 지식백과] 고려시대의 화장 (두산백과)
(극 중 기생이 된 후백제의 마지막 공주 우희의 화장 장신구)
(해수의 화장 장신구)
(나전대모칠 국화넝쿨무늬모자합. 화장용구를 담는 그릇 구성품의 하나로 추측)
(고려시대 화장합 장신구)
(고려시대(12세기 중엽) 청자갑문상자. 안에는 5개의 화장품 용기가 들어 있음)
[출처] ◆ 한국화장(Make-up)의 역사|작성자 미스제이
통일신라·고려시대·조선시대
이 당시의 화장품이라 하면 대부분이 향유(지금의 향수), 연지, 분, 머릿기름 등으로 한정되어진다. 그리고 이들 화장품을 담는 용기는 당시의 시대를 반영한 토기, 청자, 백자 등의 사기로 만들어졌다.
당시 향유를 담은 병은 모두 사용할 때 조금씩 덜어 쓰기 쉽고 또 향의 증발을 막기 위해 병목을 좁게 만들었다. 통일신라시대에는 토기, 고려시대에는 청자, 조선시대에는 백자 및 분청사기로 제작됐다.
고려시대의 화장문화는 신라의 화장술과 화장품 제조법이 그대로 전래되었고, 불교와 청자 문화의 발달과 함께 더욱 발전하여 화려하고 다양한 문양과 형태의 화장구를 제작하여 널리 사용했다.
당시에는 천연원료를 사용하여 화장품을 제조했기 때문에 자연히 크지 않은 용기를 사용했다. 분합은 일반적으로 높이가 낮고 직경이 넓게 제작되었다. 특히 신라의 토기 화장합을 발전시킨 청자상감모자합(靑磁象嵌母子盒)은 큰 합 속에 작은 합이 여러 개 겹쳐 있는 합으로서 아름다움과 기능성을 모두 갖추어 옛 선조들의 지혜를 엿볼 수 있다. 금, 은, 청동 등 금속제 외에 청자로 대량 제조된 화려하고 견고한 이 시대의 화장품 그릇이 오늘날에도 많이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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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BC 57~935)는 아름다운 육체에 아름다운 정신이 깃든다는 영육일치사상(靈肉一致思想)의 발현으로 화장기술 및 화장품 제조기술이 상당한 수준으로 발달하였다. 특히, 종교적 의미에서도 청결한 몸과 치장을 중요하게 여겼기 때문에 목욕문화와 향문화가 발달할 수 있었다.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이후, 세 나라의 문화가 어우러지면서 통일신라(676~935)의 화장문화는 더욱 발전한다. 더불어 외국과의 빈번한 교류도 화장문화의 번성에 영향을 주었다. 당시 여인들은 아름다움을 위해 머리빗을 각종 보석으로 꾸며 꽂고 다니는 것을 즐겼다고 한다. 빗에 대한 사랑이 얼마나 컸던지, 흥덕왕(興德王)은 규제를 통해 계급별로 사용할 수 있는 빗 장식의 재료와 범위를 제한할 정도였다. 화려했던 통일신라의 화장문화는 문화 번영기였던 고려(918~1392)로 이어져 절정에 이르렀다. 높은 수준으로 발달한 화장문화는 일반인과 직업여성의 화장문화에 차별화도 가져왔다.
화장하는 일이 많았던 직업여성들은 진한 분대화장(粉黛化粧)이라 하여 머릿기름을 바르고 하얗게 분을 바르며, 가늘고 또렷한 반달눈썹과 함께 뺨에는 연지를 발랐다. 반면 여염집 여성들은 치장에 있어 얼굴에 바르는 것을 좋아하지 않아 연지를 쓰지 않는 옅은 화장인 담장(淡粧)을 선호했다. 고려시대 화장문화의 발달 요인으로는 화려함을 추구했던 당시의 사회 분위기 이외에도 청자와 거울[銅鏡] 제작기술의 발달도 많은 작용을 했다. 청자기와로 지붕을 덮을 만큼 뛰어났던 고려의 청자 제작기술은 식기(食器)와 생활용품은 물론 다양한 종류와 형태의 청자 화장용기 제작으로까지 이어졌다. 이것만이 아니다. 손재주가 좋았던 고려인들은 중국에서 전해진 거울을 바탕으로 독자적 방식의 고려경(高麗鏡)을 만들어 생산력을 높였다. 대량 생산이 가능해진 거울은 점차 일반에게까지 보급되면서 화장도구로 널리 쓰이게 되었고, 고려의 화장문화는 더욱더 화려하게 성장해 나갈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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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 당시에는 이런 일이 있었단다. 전쟁에 참전한 명나라 군인들은 일본군 병사들의 목을 베었다며, 엉뚱하게도 조선 사람의 머리를 잘라 바쳐 상을 받는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 그래서 나중에는 일본군인지 조선 사람인지 가려내기 위해 귀를 뚫고 귀걸이를 했는지 살펴보았단다. 조선 사람들은 모두 귀걸이를 하고 있었으니까.
그렇다면 우리나라에서는 언제부터 남자들이 귀걸이를 하기 시작했을까? 그 역사를 알려면 삼국 시대에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한사군 가운데 하나인 낙랑 땅에서는 한때 귀걸이가 유행했다고 한다. 그 중국산 귀걸이는 고구려에 전해졌고, 신라에까지 널리 퍼져 남자, 여자 가리지 않고 귀걸이를 하게 된 거다.
신라 고분에서 발굴된 귀걸이를 보면, 당시에 남자들도 귀걸이를 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귀걸이는 굵기에 따라 태환과 세환으로 나뉘는데, 경주 부부총에서 발굴되어 국보 제90호로 지정된 ‘금제 태환 귀걸이’ 등 여러 점의 남자 귀걸이를 찾아볼 수 있다.
신라 시대에 화려한 귀걸이를 하고 얼굴에 화장까지 한 것은 화랑으로 뽑힌 젊은 남자들이다. 신라에서는 낭도 수천 명을 거느린 화랑을 뽑아 인재들을 양성했는데, 당나라 스님이 쓴 ‘신라 국기’라는 책에는 화랑에 대해 이렇게 씌어 있다.
“귀족 출신 자제 중에 얼굴이 잘생긴 사람을 뽑아 얼굴에 분을 바르고 연지를 발라 화랑으로 받드니, 많은 무리가 그를 따르고 받들어 섬긴다.”
우두머리로 권위상징
화랑은 화장을 하고 귀걸이를 다는 등 곱게 단장을 했다는 거다. 그것은 아름답게 보이기 위해서라기보다는 우두머리로서 권력과 권위를 나타내기 위해서였다. 그러니까 귀걸이와 화장은 자신의 신분을 드러내고 과시하는 수단이 되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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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적으로 볼 때 원조 화장은 남성의 것이었다고 한다. 삼국시대, 고려시대 남성들의 무덤에서 부장품으로 화장 그릇, 거울 등이 많이 출토됐다. 또 화장 용기뿐 아니라 풍잠, 관자, 귀고리 등을 포함한 화려한 액세서리들도 남성의 무덤에서 주로 나왔다. 전문가들은 화랑 문화에 기인한 것으로 보고 있다.
http://lady.khan.co.kr/khlady.html?mode=view&code=8&artid=2014010915181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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