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전기 태자의 공복
고려 태조는 건국후 할 일이 많아 복식제도는 당나라 제도를 수용한 신라의 복식제도를 그대로받아드려,신라의공복색(公服色)인 자,비,청,황의 관복색제(官服色制)를 태조 18년, 후백제와 남국 신라 왕조의 백관이 고려에 투항해오기 전까지그대로 따랐다. 공(상)복 겸용제로 고려가 당제를 답습한 통일신라의 복식제도를 그대로 받아들여 백관이 일상적인 공무(公務)를 처리할때, 직급에 따라 복색, 수식재료, 복재 등으로 구분되는 관복으로,공복을 착용토록 하였다.
[네이버 지식백과] 고려전기 태자 친왕 1~3품의 공복 및 상복 (문화콘텐츠닷컴 (문화원형백과 고려복식), 2002., 한국콘텐츠진흥원)
고려 태조 재위시 황태자의 제복
삼국시대부터 이미 면류관에 대한 인식이 있었던 것으로 보여지고, 통일신라 전후부터 면복에 대한 관심이 있었으며, 고려 건국초기에 당(唐) · 송(宋)나라 복식의 영향으로 이를 채택해 쓰게 된 것이다.
고려초 황태자 조복
고려초 백관의 공복
왕의 외교용 의상
제복
고려시대 황제의 제복,12류 면류관복.
복식의 배경.
면류관복은 중국의 한(漢)나라 이후 중국황제이하 백관의 대례복으로 최고의 예복이다. 후한의 명제(明帝) 영평 2년, 최초로 복식제도를 공표 하였다.
우리나라 황제나 왕이 중국의 제왕복인 면류관복을 착용하기 시작한 것은 삼국시대부터로, 사료(史料)상으로 중국은 남북조시대 부터, 우리나라 삼국의 왕에게 관작(官爵)과 함께 의례복(儀禮服)을 사여(賜與) 하였다. 고구려 고분벽화에서도 면류관복의 착용 예를 볼 수가 있다. 공식적인 기록으로는 진덕여왕 3년(649), 고신라(古新羅)가 정식으로 중국과 동일한 유교례적(儒敎禮的) 의관제도(衣冠制度)를 채택하여 따르면서 부터이다. 즉, 고려사 여복지에 ' ···신라(新 羅) 태종(太宗)왕 청습(請襲) '당의(唐儀)' 시의(是後) 관복지제(冠服之制) ..중화(中華)···..' 라 되어 있다. 당의 태조는 진평왕 46년, 관작(官爵) 사여(賜與)를 시작으로, 헌강왕 4년까지 300여년 동안 왕이 바뀔 때마다 당은 자국의 正 1품-3품의 책봉관작(冊封官爵)과 관작(官爵)에 상응하는 예복(禮服)과 예물(禮物)을 사여(賜與) 하였다.
이와 같은 사실에 입각하여, 고려초, 황제(皇帝)국을 선포한 광종(光宗)은, 제반 대례시(大禮時), 12류 면류관복제를 착용하였을 것으로 보고 있다. 그후, 고려가 송.글안(요:遼)와 양면외교를 하면서, 글안으로 부터 실제적으로 관작사여와 함께 의례복(儀禮服)을 받으면서, 고려 문종 9년 당.송의 2품관작에 해당하는 '별면 8류 7장복'을 받았고, 문종 12년 이후부터는 중국의 1품 관직자 복식인 '곤면(袞冕) 9류면 9장복'을 사여하기 시작하여, 중국측에서 왕조가 요.금.원.청으로 바뀌어도 변함이 없었다. 그러나 13세기에 들어서 원(元)과 교류당시, 공민왕은 자주적으로 몽고족의 제압으로 부터 벗어나고, 황제(皇帝) 국위(國威)를 선양하는 의미에서 '황제의 12류 면류관복'을 착용하였다.
그러나 2년후, 주원장의 명나라가 일어나면서, 공민왕과 왕비에게 중국의 1품 관직자 복식인 왕에게는 '곤면(袞冕) 9류면 9장복'과 왕비에게는 1품 명부(命婦)관복인 '9등 적의(翟衣)제도'를 사여하여, 이후 대한제국(大韓帝國)시대 고종(高宗)황제가 다시 우리나라를 황제국으로 선포하기까지 중국의 사여 품급복식(品級服飾)이 되었었다. 광무원년(고종 34년 : 1897) 고종은 대한제국을 선포하고 복제를 황제국에 준하여 제정하면서, 이미 명(明)은 패망하여 역사속으로 사라진지 오래이나 ‘대명회전’ 제도에 준하여, 가청 8년 정제(定制), 12장 면복제를 따랐다
[네이버 지식백과] 고려시대황제의 제복, 12류 면류관복 (문화콘텐츠닷컴 (문화원형백과 고려복식), 2002., 한국콘텐츠진흥원)
왕과 관료들의 조복
고려말 공민왕 조복 착용도
원말명초(元末明初) 공민왕이 원나라의 복식을 버리고 자주적인
복식(服飾) 양식으로 변화를 추구하는 시기
고려말 공민왕의 왕비 노국공주 예복
고려말 기승을 부리던 원나라가 신흥세력으로 급부상하는 명나라의 흥기로 말미암아 점점 힘을 잃어가고 있을때, 고려말 공민왕은 원나라의 지배로부터 벗어나려는 자주성을 추구하였다. 정치적인 영향이 이러할진대, 아울러 수백년동안 고려 상류층을 독식해오던 몽고문화도 공민왕대에 이르러서 배척되게 된다. 복식도 예외는 아닐진대 공민왕은 몽고복식의 흐름인 몽고풍을 버리고 그 이전 고려복식으로 돌아갈 것을 주창했는데, 이 복식의 근거가 된 공민왕과 노국공주의 초상은 몽고적 냄세는 전혀 보이지 않고, 원나라 이전 중국 송나라의 분위기가 물씬 베어나고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종묘소장, 공민왕의 왕비 노국 공주 예복 (문화콘텐츠닷컴 (문화원형백과 고려복식), 2002., 한국콘텐츠진흥원)
고려말 왕비의 예복, 소례복
고려 말에서 조선 초에 통일신라시기의 옷입는 방법인 저고리 위에 치마를 입는 양식이 치마 위에 저고리를 입는 방법과 혼재되어 사용되다가 고려가 망하고 조선조에 들어가면서 조금씩 지금처럼 치마 위에 저고리를 입는 착장방법으로 통일된 것이다.
[네이버 지식백과] 일본 서복사 소장, 관경서분변상도 근거, 왕비 소례복 [-觀經序分變相圖-] (문화콘텐츠닷컴 (문화원형백과 고려복식), 2002., 한국콘텐츠진흥원)
고려후기 황후 대례복
무희
악공
고려말 시녀 복식
고려말 상류층 귀부인
고려말 귀족 사녀
고려시대 머리
조천계
추마계
굴계
고계
이외 쌍수계 아환계 등등
채머리
귀밑(땋은머리)
얹은머리(삼국)
쌍계머리
민상투-서민남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