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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담/미스테리 키스해야 나갈 수 있는 방
4,697 18
2023.10.11 10: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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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https://sagebornsmiscellany.postype.com/post/15140979

 

 

 

2014년 11월 19일이요.

확실해요.

기억 안나요. 그냥 어느 순간부터 그 방이었어요. 전 침대에 누워있었고... 걔랑, 아니, 그 사람하고 나란히요.

처음에는 서로 깜짝 놀랐죠. 둘 다 출근하던 길이었거든요. 지하철에 탄 것까지는 기억이 나는데... 그 후로는 모호해요.

잠들었다가 깨어난 것도 아니고, 멍해졌다가 정신 차리고 보니까 그 방이었어요.

침대, 소파, 탁자, 책상이랑... 의자도 몇 개 있었고, 디지털 시계가 세 개 있었어요.

하나는 그냥 일반 시계였고, 두 개는 스탑워치요. 그 방에 들어간지 얼마나 지났는지 알려주는.

아, 그리고 현판이요. 천장 가까운 부분 벽에 커다란 현판이 달려있는데 거기에 방 이름이 적혀있었어요.

'키스해야 나갈 수 있는 방'이요.

어이가 없죠. 저도 그랬어요.

글씨체요? 그냥 굴림 폰트요. 깔끔하게 인쇄해놓은 물건이었어요.

아뇨, 하나도 없었어요. 거기 있는 내내 그것 때문에 미칠 지경이었어요. 창문이 왜 중요한지 알겠더라구요.

진짜... 바람도 전혀 없고, 덥지도 춥지도 않은 쾌적한 온도이기는 한데 뭐랄까... 그냥 조명 있는 지하실? 그런 느낌이었죠.

기분이요? 생판 처음 보는 남자와 교실 하나 크기 정도 되는 웬 지하실에 갇혔는데, 그냥 감옥도 아니고 '키스' 어쩌고 하는 방이었으니 어땠겠어요?

처음에는 그냥 장난이라고 생각했죠. 친구 중에 참 짓궂은 년이 있는데 걔가 돈 좀 깨나 썼겠다 싶었어요.

상대는, 음. 그 사람은... 유일하게 좋은 부분이었죠. 하하, 그 때는 아직 아무것도 몰랐으니까요.

그냥... 친구들이 제 취향을 참 잘 알고 있다 싶었어요.

그 뻘쭘한 상황에서 시선 여기저기 돌리다가도 자연스레 상대 얼굴로 다시 눈이 향하더라구요.

무슨 동화 속에서 튀어나온 왕자님처럼... 키도 크고, 어깨도 떡 벌어졌고.

어떻긴요. 당연히 창피했죠. 아니, 왜는 무슨 왜에요. 당연하잖아요. 키스라니요.

초등학생 때부터 보던 소꿉친구랑 입술박치기를 하라고 해도 아찔했을 텐데, 처음 본 사람하고 키스라니.

네, 뭐... 제가 지금 여기에 있으니, 부인해봐야 아무 소용 없겠네요. 거의 네 시간 걸린 것 같아요.

서로 인사도 하고, 자기소개도 하고, 어쩌다가 함께 이런 방에 갇히게 되었을지도 얘기했고...

그 외에 범인으로 의심되는 친구에 대한 이야기도 했어요.

 

그러다가 방에서 나가는 방법으로 화제가 옮겨갔고... 그냥 가볍게 이마에 입술 쪽 하는 걸 시도해봤죠.

아뇨, 아무 일도 안 일어났어요. 혹시 몰라서 볼에도 가볍게 해봤고, 입술에도 쪽 해봤지만, 별 의미 없었죠.

둘 다 얼굴이 너무 화끈거려서 나란히 그 두꺼운 철문만 쳐다보고 있었거든요.

그리고 둘이서 진짜 죽을 힘을 다해서 손잡이를 당겼는데 정말 꼼짝도 안했어요. 그래서... 네, 뭐. '키스'의 정의에 대해 좀 더 진지한 대화를 나눴죠.

네, 저는 어느 정도 예상했었어요. 진짜로 지연이 그 지지배가 이벤트 업체 같은 걸 섭외한 거면, 이게 뽀뽀 쪽 같은 걸로 싱겁게 끝날 리가 없거든요.

근데 상대는 그런 생각을 전혀 안했던 거죠. 더 깊게 갈 거라고 전혀 상상도 못한 거에요.

그냥 입술만 닿으면 그걸로 문 열리고, 서로 빠이빠이하고, 각자 갈 길 갈 줄 알았나봐요.

사람이 뭐랄까, 되게 이목구비 시원시원하게 생긴 남자다운 호감상이었고, 자신감도 꽤 있어보였는데...

그 때부터는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라서는 정말, 하. 어울리지 않게 땀 뻘뻘 흘리고 말도 더듬더라구요.

아뇨, 전혀요. 그때는 전혀 몰랐죠. 그냥... 민망하면서도 좀 웃기는 추억 정도로 남을 줄 알았어요. 

그리고 나가면 지연이년 뺨 싸대기는 몇 대를 갈겨야 하나 그 생각뿐이었어요.

음, 제가 말씀드렸죠. 남자다운 호감상이라고. 그냥... 잘생겼어요, 한 마디로. 되게 잘생겼어요.

'와, 내가 이런 남자랑?' 이런 생각 드는... 그런 멋진 사람이었어요.

그땐 남자친구도 없었고, 혹시나 이 일로 엮이게 되지 않을까 기대를 안했다면 거짓말이죠.

내심 이 사람이랑 키스하면 어떤 느낌일까 상상도 엄청 했어요. 근데 상대가 너무 주저하니까, 하하, 자존심이 다 상하더라구요.

내가 그 정도로 마음에 안드나 싶고. 지금 생각하면 전혀 그럴 필요 없었는데.

네. 물론 했죠. 거기서 나오려면 다른 방법이 없었다니까요.

어... 네, 좋았어요.

흐흐, 아뇨. 그 사람은... 서툴렀죠. 진짜 의외죠?

저도 놀랬어요. '이런 얼굴을 달고 있으면서 이렇게밖에 못하나?' 싶을 정도로 너무 대충하는 거에요.

'지금 내가 너무 역겨워서 이러나?' 이 생각이 계속 들었는데...

들었는데, 되게 오래 하더라구요. 이만하면 됐는데 왜 입을 안 떼지? 한 몇 분동안 계속 긴가민가 했어요.

그 때 확신이 들었죠. 아, 내가 싫어서 이러는 게 아니라 그냥 할 줄을 모르는 거구나, 피하지 않는 걸 보니까 얘도 나름 즐기고 있구나.

그때부터는 뭐, 제가 리드했죠. 하하, 이 사람이 겉은 멀끔하게 생겨서는 숙맥도 그런 숙맥이 없었어요.

10분? 15분? 잘 모르겠는데 꽤 오래 했어요. 어느 순간부터는 얘가 제 뒷머리를 너무 세게 잡아서 아프더라구요.

그래서 이제, 제가 좀 강제로 떼어냈죠.

그랬더니 또 화들짝 놀라가지고 '어, 죄송해요, 죄송해요.'하고 연신 사과를 하는데, 하하, 아, 너무 귀여웠어요.

네, 열렸어요. 텅컹 하고 무슨 잠금장치 풀리는 소리가 되게 크게 났어요.

그게 무슨 경고음이라도 되는 것마냥, 진짜 서로 화들짝 놀라서 빠르게 멀어졌었는데... 이제 나갈 때가 되니까, 제가 먼저 용기를 냈죠.

전화번호 달라고.

그럼요. 밑져야 본전인데. 운 좋으면 존잘남이랑 사귀는 거고, 까여도 제가 까인 건 지연이 그 년밖에 모를 텐데요. 그러니까... 그럴 거라고 생각했죠.

아뇨, 밖으로 통하는 문이 아니고 다른 방으로 통하는 거였어요. 전에 있던 방이랑 똑같이 생긴 다른 방으로 통하는 문이에요.

방이 크기도 똑같았고, 창문이 없는 것도 똑같았고, 소파나 테이블, 의자도 전부 똑같은 것들이었어요.

어떻긴요. 완전 속은 기분, 함정에 빠진 기분이었죠.

첫번째 방은 그냥 수위 높은 프랭크나 몰래카메라 같은 느낌이었는데, 두번째 방은 확실히... 잘못 됐다는 게 확실했죠.

들어오자마자 불안했어요. 일단 어이가 없잖아요. 나가는 문인 줄 알았는데 똑같이 생긴 다른 방으로 연결되어 있으니까.

그 와중에 뒤에서 문이 떨컹 하고 닫히니까 진짜... 뭐랄까, 등에 얼음팩이라도 갖다 댄 것처럼 정말 가슴이 싸늘해졌죠.

네, 있었죠. 첫번째는 '키스해야 나갈 수 있는 방'이었잖아요. 두번째는... 그게... 그러니까, 두번째 방은 말이죠...

음, '섹스해야 나갈 수 있는 방'이었어요.

아뇨. 전혀 아니에요. 진짜로. 그때부터는 불안하고 불쾌해서 그럴 기분이 전혀 안 들었어요.

처음 방은 친구들이 장난친 줄 알았으니까 어영부영 응해줄 마음이라도 들었는데, 이건 뭐, 친구들하고 전혀 상관 없다는 게 확실해졌잖아요.

섹스가 무슨 뉘 집 개 이름도 아니고. 제 친구들이었으면 절대 그렇게 선 안 넘거든요.

그 때부터는 저희 둘 다 핸드폰만 붙잡고 어떻게든 바깥에 도움을 요청하려고 했어요.

문제는, 그 방이 전화랑 문자메시지는 안 터지고 인터넷만 가능하더라구요.

아뇨, 안돼죠. 인터넷 가지고는 진짜 아무것도 안돼요. 생각 해보세요. 일단 112나 119에 전화할 수 있으면 적어도 구조는 받을 수 있어요.

장난전화라고 생각하면서도 구조대원들이 어쩔 수 없이 출동하거나, 경찰이 빡칠 대로 빡쳐가지고 이 새끼 잡아다가 꼭 벌금 물린다고 달려오거나,

누구라도 일단 저희를 찾으려고 했겠죠.

 

그런데 인터넷으로는 대체 뭘 할 수 있겠어요? 

SNS에 "생판 처음 보는 사람이랑 '섹스해야 나갈 수 있는 방'에 갇혔어요. 도와주세요." 하고 글이라도 올려요?

하... 당연히 해봤죠. 아무도 안 믿었어요.

일단 보이스톡을 하면, 말에는 뉘앙스라는 게 있으니까 진지하게 도움 요청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거든요.

 

근데... 저는. 저는 진짜 절박했는데... 친구들은 내내 웃기만 했어요. 특히 지연이가 쪼갤 때, 아니, 웃을 때 진짜 죽이고 싶더라구요.

이 미친년이 지금 누구는 급해죽겠는데... 아, 아무튼 그랬어요.

아뇨. 소리도 지르고, 울고, 욕도 했는데 도무지 안 믿더라구요. 하나마나였어요.

그 다음에는 부모님께 보톡을 걸었는데, 뭐... 112나 119에 신고 해달라고 한 삼백번은 말한 것 같아요. 다 헛짓이었지만.

아뇨. 더 이상 말하고 싶지 않아요.

슬프니까요.

네.

하아... 그래야겠죠.

삼일 정도 걸렸어요.

네, 음식은 나와요. 조그마한 승강기 같은 걸로 꼬박꼬박 음식 넣어주고, 화장실이랑 욕실도 딸려있었어요.

그 승강기라는 게 사람이 들어갈 크기가 절대 안돼요. 피자 한 판이 멀쩡하게 못 들어가서 조각조각 포개서 오는 그런 수준이었어요.

그럼 달리 어떡해요? '섹스하면 내보내준대요. 한 판 하죠.'하고 바로 달려들어요? 그 땐 불안했다니까요.

네, 그런 셈이었죠.

어떻게 해도 나갈 수는 없고, 핸드폰 배터리도 다 꺼졌고, 남은 게 그것밖에 없었거든요.

첫번째 방에서 문 열리는 조건이 뭐였는지 생각하면 입이나 손으로 하는 걸로 퉁치고 넘어갈 순 없을 것 같았어요.

없었어요. 그래서 허공에 대고 콘돔 내놓으라고 몇 시간 동안 계속 악을 썼는데, 웃기죠? 아니, 웃으셔도 돼요. 제가 생각해도 웃겨요.

아뇨, 설마 줬겠어요? 오히려 줬으면 진짜 웃겼을 거 같아요. '아, 섹스는 강제로 하더라도 안전하게 피임하면서 해야하는구나!' 무슨 공익광고에요?

음, 아뇨, 그 반대였어요.

되게 뭐랄까, 위로 받는 느낌이었어요.

이제, 저랑 걔는, 그 사람은 일면식도 없다가, 갑자기 웬 방에 갇혀가지고 어쩔 수 없이 이걸 해야 하는 입장이었잖아요.

 

그런 상황이었는데도 저를 싫어하거나, 제 몸을 역겨워한다거나 하는 인상은 못받았어요.

생각해보세요. 갑자기 처음 보는 사람하고 그걸 해야 하는데 그게 솔직히 기분이 좋겠어요? 근데 그런 티를 그 사람은 전혀 안냈어요.

그보다는, 미안해하는 것 같더라구요.

손길이 섬세했어요. 

제가 사람이 아니고 푸딩이라서 조금만 세게 만져도 망가질 것처럼 되게 부드럽고... 그래서... 분명히 시작했을 때는 걱정이 태산이었거든요.

이걸로 임신하면 어떡하나, 이렇게 했는데도 문이 혹시 안 열리면 어떡하나, 회사 며칠 못 나갔는데 짤렸으면 어떡하나.

정말이지, 이 거지 같은 방에서 나가야 하니까 어쩔 수 없이 하는 거라는 마음이 강했는데, 다 끝났을 때는 하, 다리에 힘이 풀려서, 아, 왜 웃어요!

하하! 웃지 마요!

그런 건 아무래도 좋았죠. 문이 열렸는지 어떤지는 안중에도 없었고, 그냥 침대에서 계속 같이 누워있고 싶더라구요.

하하. 지금 생각하면, 음... 고맙죠. 자기도 나 못지 않게 불안했으면서...

그게 중요한가요?

음, 뭐랄까. 그 사람이, 음... 분명 키스할 때는 완전 젬병이었는데, 그... 다른 부위에는 혀를 되게 잘 쓰더라구요. 또 왜 웃어요! 

있는 그대로 말해달라면서요. 있는 그대로 말씀드리잖아요.

네, 열렸어요.

바깥으로 통하는 게 아니라 삼일 전에 있던 첫번째 방으로 통하더라구요.

어이없었죠. 허탈하고, 울고 싶고.

'섹스 두 번 해야 나갈 수 있는 방'이요.

진짜... 기분 더러웠죠. 한 번도 아니고 두 번이나 속았는데. 세번째 방, 아, 사실 첫번째 방으로 돌아간 거지만, 헷갈리니까 그냥 세번째라고 할게요.

제가 거기서 좀 많이 울었어요. 너무 분하고, 짜증나고... 핸드폰 배터리도 다 나갔으니까 그냥 바깥세상하고는 완전히 단절된 채로 갇힌 거잖아요. 

그러니 정상일 수가 없었죠. 그 때 걔가 많이 위로해줬어요. 자기도 불안하면서.

일주일 정도.

이제 그만 애기하고 싶은데요.

네.

아, 그러게요. 네, 돈값은 해야죠.

네. 질문이 뭐였죠?

어떻게 안좋은 날만 있었겠어요. 사실 좋은 날도 있었죠. 행복했던 날도 있었고. 하지만 중간에 어땠건 감금생활이었잖아요.

방 자체는 좋게 받아들일 수가 없죠.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속이 문드러지죠.

네.

그건... 그 정도는 가능할 것 같아요.

네번째 방은 '섹스 세 번 해야 나갈 수 있는 방'이었어요. 딱 하루 걸렸어요. 다섯번째 방은 네 번 하라고 했고, 여섯번째 방에서는 다섯 번 했죠. 

얼마만에 나왔는지는 기억 안나요.

음, 아홉 번 하라는 방이 마지막이었으니까, 열번째 방까지는 계속 주구장창 섹스만 하라고 한 거죠.

아마 CCTV 같은 걸로 섹스테이프라도 녹화하지 않았을까요.

상상에 맡길게요.

아, 그 얘긴 정말 하고 싶지 않은데요.

슬프니까요.

그럼... 기본적으로 되게 배려심도 많은 사람이고, 저를 안심시키려고 노력을 엄청 많이 했어요. 

서로 바깥 얘기 할 때마다 제 얘기도 되게 잘 들어주고. 울고 싶을 때마다 귀신 같이 알아채고 뒤에서 끌어안아줬어요. 

걔한테 그렇게 안겨있으면 그것만으로도 위로가 돼요.

아뇨. 착한 거랑 점잖은 건 다른죠. 성격 좋은 건 맞는데, 음... 아재 개그를 너무 좋아했어요.

갑자기 뜬금없이 터져나오는 그... 와, 뭐라 말이 안나오네. 

이건 당해봐야 돼요. 직접.

그런 얘기는 한 적 없는데요. 제가 그런 되도 않는 개드립 좋아하지 않는 건 맞는데, 그게 걔 단점은 아니죠. 걔한테는 단점이 없었어요.

왜냐면 저랑 그 바람 한 줄기 없는 방 안에 같이 있어줬던 것만으로도 세상에서 가장 완벽한 사람이었으니까요. 뭐... 속궁합도 좋았구요.

그건 좀 어이가 없는 질문인데요. 그런 사람하고 사랑에 빠지지 않는 방법이 있나요?

아뇨. 그런 사람은 다시는 만날 수 없어요. 그래서 전 혼자서 쓸쓸하게 죽을 거에요.

그 외에 여러가지 있었죠. 많았어요. 나름 좋은 것도 있었고, 재밌는 것도 있었고... 진짜 비인간적이고, 무서운, 잔인한 것도 있었죠.

'빰을 때려야 나갈 수 있는 방'이요. 그게 처음으로 마주한 '무서운 방'이에요.

제가 때리는 역할이었어요. 그 녀석 고집이 엄청났거든요. 자기 뺨을 때리거나 약하게 때리는 걸로는 안 열리더라구요.

'배를 걷어차야 나갈 수 있는 방'.

네. 그 녀석은... 절대 저한테 그런 짓은...

아뇨, 하아. 그냥 지금 계속 할래요. 나중에 또 떠올리긴 싫어요.

'피를 흘려야 나갈 수 있는 방'이요. 친절하게 얼마만큼 흘려야 한다고 계량컵까지 넣어놨더라구요.

그래도 무서운 방 미션 중에서는 이게 수행하기 쉬운 편이었어요. 그냥 혈관에 삽관 박아서 피 좀 모으면 그만이거든요.

적어도 처음 몇 번은 그랬죠.

아뇨, 제 전공은 프랑스어에요. 근데 간호사가 아니어도 그 상황에서 달리 어쩌겠어요. 

제가 문과지만, 동맥은 절대 손상되면 안되고, 정맥이 파란색인건 알고 있었거든요.

맞아요. 진짜 운 좋았죠. 아니... 그게 운이 좋은 건가요? 그런 곳에 갇혔는데.

그 방을 여러 번 들어갔어요. 처음 들어갔을 때는 50ml만 모으라고 하다가 나중에는 2L짜리 들통을 넣어놨더라구요.

마지막에는 지혈할 기운도 없어서 제가 과다출혈로 갈 뻔한 적도 있어요.

자세히 기억 안나요. 한... 여섯번인가? 50ml, 100ml, 200ml... 그 다음에는 500ml, 1L 2L 순서였던 것 같아요.

아뇨, 그렇게 가만 놔두질 않아요. 저희도 그 생각 당연히 해봤죠. 

그래서 2L 요구를 맞닥뜨렸을 때는 저희가 하루에 각자 100ml씩 열흘동안 뽑아서 그걸 채우려고 했어요. 

근데 자고 일어나 보니까 그 들통이 조금은 차있어야 하는데 텅텅 비어있는 거에요. 깨끗했어요.

그것도 해봤죠. 근데 잠을 안 잘 수가 없어요. 피를 뽑았잖아요. 엄청 피곤하단 말이에요. 저희가 진짜 별짓을 다했어요. 

그 들통에서 피비린내 진동하는데 그걸 끌어안고 자기도 해보고, 한 사람만 피를 뽑고 다른 사람은 불침번을 서기도 했는데.

음식에 수면제 들어있는 걸 그 때 알았어요.

대략 두 달 정도요. 결국은 항복했죠. 제가 먼저 항복했어요.

'니네가 왜 이러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뭘 원하는지는 알았으니 주겠다.' 대충 이런 마음이었던 거 같아요.

걔가 자는 사이에 제가 혼자서 그 들통을 4분의 3 정도까지 채웠어요. 

거기까지만 보고 제가 중간에 기절했는데, 이제, 이 녀석이 일어나서 제가 한 짓을 본 거죠.

걔가 저를 지혈해주고 나머지를 채운 거죠. 그래서 저 일어난 다음에 걔가 처음으로 엄청나게 화를 냈어요. 목소리 그렇게 큰 줄 처음 알았죠.

아무 말 못했어요. 가만히 듣고 있었죠. 제가 잘못한 게 맞으니까요. 

뭐. 한 사람 죽으면 다른 사람은 내보내준다는 보장이 있는 것도 아니었고. 제가 바보짓 한 게 맞아요. 

TV, 휴대폰, 책, 아무것도 없는, 아니, 나중에 가면 책은 주긴 했지만, 아무튼, 그런 방에 혼자 남는다는 생각만으로도 충분히 미칠 수 있거든요. 

제가 알죠. 저도 그런 상상 많이 했으니까.

그리고... 그때쯤에는 서로 좋아한다는 걸 알고 있었어요.

반대로 걔가 그렇게 피를 많이 흘려서 죽을 수도 있는 상황까지 갔다면, 그래서 제가 혼자 남을 뻔했다면 저도 똑같이 화냈을 거에요.

아까 제가 말씀드렸잖아요. 그런 사람하고 사랑에 빠지지 않는 방법이 있냐구요.

네, 사랑했다고 생각해요. 그렇지 않고서야 무슨 수로 항상 그렇게 따뜻했겠어요.

음... 아홉번 하라는 방 이후에도 저희가 좀... 자주 오붓한 시간을 보내긴 했죠.

처음 몇 년은 할 게 그것밖에 없기도 했고, 할 때는 일단 세상에 저희 둘밖에 없잖아요. 

주변에 뭐가 결여되어 있는지 전혀 신경쓸 필요도 없고, 그냥 상대만 바라보고 기뻐하면 되니까.

네, 좀 나아졌어요.

네,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해볼게요.

저도 다 기억은 못해요. 워낙 많아서. 무서운 방 중에 또 기억에 남는 게... '그릇에 든 것을 전부 삼켜야 나갈 수 있는 방'이요.

그릇에 든 게 압정이었거든요. 압정 8개요.

같이 했어요. 목이 찢어져서 죽어도 같이 죽는 게 그 방에 혼자 덩그러니 남는 것보다 낫거든요.

아뇨, 그렇게까지 무모하진 않았죠. 식사로 나오는 것 중에 가끔 떡이 있었어요. 떡이 굳으면 딱딱해지는 거 아시죠? 

떡 굳은 걸 충분한 크기로 잘라서 거기에 압정을 꽂았어요. 

뾰족한 부분 튀어나오지 않는 거 확인까지 다 마친 다음에 알약 먹는 것처럼 물하고 꿀꺽 삼키는 거죠. 그리고 바로 토했어요.

삼켜야 나갈 수 있다고 했지, 먹어서 소화시키라고 하지는 않았으니까요.

네, 문 열리더라구요.

하하, 아뇨. 제 아이디어가 아니에요. 걔가 생각해낸 거에요.

그럼요. 거의 항상 저보다 똑똑했어요. 그래서 믿음직스러웠구요.

저도 물론 뭔가 하긴 했죠. 음, 일단 생각나는 게... '뼈가 부러져야 나갈 수 있는 방'이요. 고민 끝에 제일 쓸모없는 손가락을 장도리로 찍었죠.

제 약지요. 그래서 또 대판 싸웠어요.

아뇨, 그 때 이렇게 된 게 아니에요. 그 때는 무사히 뼈가 붙었어요.

젓가락을 대고 있었죠. 아마 그게 없었으면 걔가 제 손을 그냥 식탁에 딱 붙여뒀을 거에요.

'48시간동안 물을 마시지 않아야 나갈 수 있는 방'이랑 '일주일 동안 손을 쓰지 않아야 나갈 수 있는 방'도 끔찍했어요. 

화끈한 고통이 아니라 길고 오래가는 고통이었죠.

손을 못쓰니까요.

네, 뭐, 입이랑 발로 해결되는 일이 있고, 해결 안되는 일이 있죠. 

화장실에서 볼일보고 뒷처리하는 게 대표적인 '해결 안되는 일' 중 하나에요. 그 때 녀석이랑 진짜 볼 거 다봤죠.

하나도 안 웃겨요.

그게, 그 때는 무사히 뼈가 붙었는데 그 다음에 '손가락 두 개를 잘라야 나갈 수 있는 방'을 들어갔어요.

아뇨, 바로는 아니고 다른 방 몇 개 더 거친 후에요.

'도미노를 세워야 나갈 수 있는 방이랑', '술래잡기를 해야 나갈 수 있는 방', '가위바위보에서 연속으로 여덟번 비겨야 나갈 수 있는 방' 다음에... 

'한 달 동안 침묵해야 나갈 수 있는 방', '한 달 동안 금욕해야 나갈 수 있는 방'에다가... 

또 몇 개 더 있었던 거 같은데. 지금 생각해보니 다 '좋은 방'들이네요.

네, 일정 기간동안 계속 수행해야 하는 미션을 주는 방들이 꽤 많아요. 당연히 그때도 한 달을 다 채웠죠.

그만하면 좋은 방이죠. 무서운 방은 실패했을 때 리스크가 정말 무서울 정도로 큰 곳이구요.

맞아요. 안하면 그만이긴 한데, 안하고 있으면 어쩌겠어요? 

가만히 앉아있으면 그냥 평생 갇혀있는 것밖에 안되는 반면에, 미션이라도 성공하면 다음 방에는 뭔가 새로운 게 나타날지 모르잖아요.

운 좋으면 실마리 같은 거라도 얻어서 나갈 수 있을지 모르구요. 그러니 아무리 위험해도 할 수밖에 없었죠.

아뇨, 왼손만 이래요. 보세요. 사람이 두 명이었으니까 하나씩 자르면 됐죠.

부러뜨렸을 때랑 똑같은 이유죠. 약지가 가장 쓸모 없잖아요. 

새끼손가락은 엄지에서 가장 멀리 떨어져있으니 보조라도 하죠. 안중근 의사도 이 손가락을 자르신 걸로 알고 있어요. 

그리고 그 때쯤에는 저희가 굉장히 오랫동안 함께 한 뒤였거든요.

4년 7개월 13일이요.

그 방에 시계가 세 개 있었다고 말씀드렸죠. 하나는 그냥 시계였고, 나머지 두 개는 방에 들어온 뒤로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 알려주는

스톱워치였어요. 

둘 중 하나는 새로운 방에 들어갈 때마다 리셋됐는데, 다른 하나는 제가 나올 때까지도 계속 작동 중이었죠. 

그래서 얼마나 오래 됐는지 항상 알 수 있었어요.

무슨 상관이냐면요. 저희 결혼반지가 이 손가락이거든요. 반지로 삼을 만한 게 없으니, 그냥 손에다가 평생 남을 표식을 새기기로 했죠.

단 두 사람의 세상이었으니까요. 결국 끝나버렸지만요.

혼인신고는 못 했어도 결혼이 맞다고 생각해요.

증인이 없긴요. 설마하니 그 방이 혼자서 돌아가는 물건이었겠어요? 

저희를 위해 음식 만드는 사람, 그걸 승강기로 올려보내는 사람, 조건 달성하는지 감시하는 사람, 달성하면 문 열어주는 사람, 

잘 때 몰래 들어와서 피 쏟아놓은 들통 치우는 사람, 책 가져다주는 사람까지 얼마나 많았는데요. 그 사람들이 다 증인이에요.

확인한 적은 없지만, 사람이 아니면 누가 그런 걸 했겠어요?

음, 그건 아니죠. 다 죽여버리고 싶죠.

아, 네. 처음에는 책이 없었는데 그 후에 무서운 방 미션을 완수하면 책이 한 권씩 왔어요. 

음식이랑 같이요. 처음에는 아무 책이나 오다가 나중에는 저희가 원하는 책 제목을 써서 보냈죠.

접시에 머스타드 소스랑 마요네즈로 제목을 썼어요.

당연하죠. 그런데 책 제목을 쓴 게 아니면 깡그리 무시하더라구요. 그래서 기분 나쁜 일 있을 때마다 욕 같은 거 적어서 보내기도 했어요.

아뇨, 그런 걸로 쪼잔하게 굴진 않았어요. 욕은 욕이고, 미션은 미션이니까요. 

막말로 멀쩡한 사람 잡아다가 그런 곳에 가둬두지 않았으면 그런 욕을 먹었겠어요?

정말 누가봐도 이건 죽을 수도 있겠다 싶은, 그런 방에서 나갔을 때, 다음 방에서 책을 받는 식이었어요.

어우, 그럼요. 어떻게 얻은 건데 그걸 두고 가요. 나중에는 아예 도서관을 만들어도 될 정도로 쌓였는데, 절대 단 한 권도 두고 간 적이 없어요.

간단해요. 문 열리면 그 앞에 앉아서 책부터 죄다 던져넣은 다음에 마지막에 저희가 건너가는 거죠.

여러가지 방법 다 시도한 끝에 제일 나은 거 고른 거에요.

처음에는 저희가 각자 읽었던 책을 상대한테 보여주려고 주문했어요. 책 제목을 정확히 알아야 하거든요.

근데 책들 맨 앞장이나 뒷장에 보면, 같은 출판사에서 나온 책 목록을 넣어놓거나, 작가 이력을 적어두잖아요. 그걸로 처음 보는 책들도 주문했죠.

그런 적도 있어요. '응급처치학개론'이요.

알아서 그랬다기보다는, 그냥... 개론서는 대부분 제목이 거기서 거기잖아요.

얻어걸리기라도 하면 좋은 거고, 아니어도 다른 책이 랜덤으로 올 테니 밑져야 본전이었죠.

저희가 죽을 고비를 여러 번 넘겼으니까, 이제... 혼자 남지 않는다는 보장이 꼭 필요했죠.

근데 그렇다고 복잡한 이론 같은 거 담긴 의학서적이 와봐야 저희가 이해할 수 있을 리가 없잖아요.

그러니 좀 실용적이고 바로 써먹을 수 있는 게 필요했어요.

재미로 읽을 소설책, 만화책이랑... 패션 잡지 같은 거요. 그리고 저는 따로 요리책도 모았고, 걔는 역사책을 좋아했어요. 

시간만 때운 건 아니구요, 언젠가는 나갈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저는 동시통역이랑 번역도 계속 공부했고, 이 녀석은 행정학을 공부했죠.

13,153권이요.

네, 정확히 기억해요. 그곳에 갇혀있던 시간의 거의 4분의 3을 마지막 방에서 보냈거든요.

눈치챘어요? 얼마나 걸렸을 것 같아요?

그것보다 더 길어요.

더 길어요.

더.

비슷해요.

198년 4개월 6일이요. 거의 2백년이죠.

2014년 11월 20일이요.

2014년 11월 20일이라고요.

네, 맞아요. 이해하기 어렵죠.

2014년 11월 19일에 그곳에 들어가서 198년 4개월 6일을 살고 나오니 2014년 11월 20일이었어요.

그 방에서는 늙지를 않았어요. 몇 년이 흘러도 처음 들어온 날이랑 똑같았죠.

그래서 그렇게 오랫동안 같이 있어놓고도 함께 늙어갈 기회는 없었어요.

하하, 마치 처음에는 믿으셨던 것처럼 말씀하시네요.

선생님이 제가 만난 첫번째 정신과 의사라고 생각하셨나요?

건강보험 기록이나 의료 전산망 만지작거리는 건 나 정도 되는 사람한테 아무것도 아니에요. 

감히 날 강제입원시키려고 한 의사들도 여럿이었지만... 난 다시는 갇히지 않아요. 절대.

돈을 아주 많이 벌었죠.

그곳에 있으면서 연감이나 월간지도 여럿 봤거든요. 

비트코인, 평창 올림픽, 브렉시트, 코로나, 우크라이나 전쟁, 부동산 연쇄 파산, 서울 테러, 3차 대전... 아, 아직 3차 대전은 아닌가?

대충 잊어주세요. 아무튼, 미래를 안다는 건 대단한 이점이거든요. 경제적으로 활용하기 좋죠.

아뇨, 저 혼자 나왔어요.

둘 중 한 명만 나갈 수 있었으니까.

마지막 방 때문이었죠. 2백년이나 그곳에 갇혀있었는데, 그 중 150년을 마지막 방에서 보내야 했어요.

'살인해야 나갈 수 있는 방'이요.

저한테 꼭 나가서 행복하게 살아달라고 했어요. 배운 것들도 써먹고, 남부럽지 않게 살아달라구요.

네, 약속했죠. 그래서 전 꼭 살아야 해요. 제가 살기 위해서 목숨이 한 개 더 필요했거든요.

평생 못 잊겠죠.

아뇨. 더 이상은.

하아... 네, 힘들어요.

네, 그럼 오늘 상담은 여기까지인 거죠?

같은 시간에 올게요.

네, 그럼 다음 주에 봬요. 안녕히 계세요.

이제 됐지?

이제 됐잖아. 열어줘.

이만하면 완벽하잖아. 뭘 더 해야 하는데?

얼른 열어! 이만큼 했으면 됐지 나보고 어떡하라고!

이 개새끼들아! 열어! 열라고! 이 씨발!

이 씨발 개새끼들아! 어떡하라고! 나보고 어쩌라는 건데!

이 씨발... 병원놀이를 어떻게 혼자서 하냐고.

하... 보고 싶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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