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s://sagebornsmiscellany.postype.com/post/15140979
2014년 11월 19일이요. 잠들었다가 깨어난 것도 아니고, 멍해졌다가 정신 차리고 보니까 그 방이었어요. 하나는 그냥 일반 시계였고, 두 개는 스탑워치요. 그 방에 들어간지 얼마나 지났는지 알려주는. 아, 그리고 현판이요. 천장 가까운 부분 벽에 커다란 현판이 달려있는데 거기에 방 이름이 적혀있었어요. 진짜... 바람도 전혀 없고, 덥지도 춥지도 않은 쾌적한 온도이기는 한데 뭐랄까... 그냥 조명 있는 지하실? 그런 느낌이었죠. 처음에는 그냥 장난이라고 생각했죠. 친구 중에 참 짓궂은 년이 있는데 걔가 돈 좀 깨나 썼겠다 싶었어요. 그냥... 친구들이 제 취향을 참 잘 알고 있다 싶었어요. 그 뻘쭘한 상황에서 시선 여기저기 돌리다가도 자연스레 상대 얼굴로 다시 눈이 향하더라구요. 무슨 동화 속에서 튀어나온 왕자님처럼... 키도 크고, 어깨도 떡 벌어졌고. 초등학생 때부터 보던 소꿉친구랑 입술박치기를 하라고 해도 아찔했을 텐데, 처음 본 사람하고 키스라니. 서로 인사도 하고, 자기소개도 하고, 어쩌다가 함께 이런 방에 갇히게 되었을지도 얘기했고... 그 외에 범인으로 의심되는 친구에 대한 이야기도 했어요.
그러다가 방에서 나가는 방법으로 화제가 옮겨갔고... 그냥 가볍게 이마에 입술 쪽 하는 걸 시도해봤죠. 둘 다 얼굴이 너무 화끈거려서 나란히 그 두꺼운 철문만 쳐다보고 있었거든요. 그리고 둘이서 진짜 죽을 힘을 다해서 손잡이를 당겼는데 정말 꼼짝도 안했어요. 그래서... 네, 뭐. '키스'의 정의에 대해 좀 더 진지한 대화를 나눴죠. 근데 상대는 그런 생각을 전혀 안했던 거죠. 더 깊게 갈 거라고 전혀 상상도 못한 거에요. 그냥 입술만 닿으면 그걸로 문 열리고, 서로 빠이빠이하고, 각자 갈 길 갈 줄 알았나봐요. 사람이 뭐랄까, 되게 이목구비 시원시원하게 생긴 남자다운 호감상이었고, 자신감도 꽤 있어보였는데... 그 때부터는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라서는 정말, 하. 어울리지 않게 땀 뻘뻘 흘리고 말도 더듬더라구요. 그리고 나가면 지연이년 뺨 싸대기는 몇 대를 갈겨야 하나 그 생각뿐이었어요. '와, 내가 이런 남자랑?' 이런 생각 드는... 그런 멋진 사람이었어요. 그땐 남자친구도 없었고, 혹시나 이 일로 엮이게 되지 않을까 기대를 안했다면 거짓말이죠. 내심 이 사람이랑 키스하면 어떤 느낌일까 상상도 엄청 했어요. 근데 상대가 너무 주저하니까, 하하, 자존심이 다 상하더라구요. 내가 그 정도로 마음에 안드나 싶고. 지금 생각하면 전혀 그럴 필요 없었는데. 저도 놀랬어요. '이런 얼굴을 달고 있으면서 이렇게밖에 못하나?' 싶을 정도로 너무 대충하는 거에요. '지금 내가 너무 역겨워서 이러나?' 이 생각이 계속 들었는데... 그 때 확신이 들었죠. 아, 내가 싫어서 이러는 게 아니라 그냥 할 줄을 모르는 거구나, 피하지 않는 걸 보니까 얘도 나름 즐기고 있구나. 그때부터는 뭐, 제가 리드했죠. 하하, 이 사람이 겉은 멀끔하게 생겨서는 숙맥도 그런 숙맥이 없었어요. 그래서 이제, 제가 좀 강제로 떼어냈죠. 그랬더니 또 화들짝 놀라가지고 '어, 죄송해요, 죄송해요.'하고 연신 사과를 하는데, 하하, 아, 너무 귀여웠어요. 그게 무슨 경고음이라도 되는 것마냥, 진짜 서로 화들짝 놀라서 빠르게 멀어졌었는데... 이제 나갈 때가 되니까, 제가 먼저 용기를 냈죠. 전화번호 달라고. 방이 크기도 똑같았고, 창문이 없는 것도 똑같았고, 소파나 테이블, 의자도 전부 똑같은 것들이었어요. 첫번째 방은 그냥 수위 높은 프랭크나 몰래카메라 같은 느낌이었는데, 두번째 방은 확실히... 잘못 됐다는 게 확실했죠. 들어오자마자 불안했어요. 일단 어이가 없잖아요. 나가는 문인 줄 알았는데 똑같이 생긴 다른 방으로 연결되어 있으니까. 그 와중에 뒤에서 문이 떨컹 하고 닫히니까 진짜... 뭐랄까, 등에 얼음팩이라도 갖다 댄 것처럼 정말 가슴이 싸늘해졌죠. 음, '섹스해야 나갈 수 있는 방'이었어요. 처음 방은 친구들이 장난친 줄 알았으니까 어영부영 응해줄 마음이라도 들었는데, 이건 뭐, 친구들하고 전혀 상관 없다는 게 확실해졌잖아요. 섹스가 무슨 뉘 집 개 이름도 아니고. 제 친구들이었으면 절대 그렇게 선 안 넘거든요. 그 때부터는 저희 둘 다 핸드폰만 붙잡고 어떻게든 바깥에 도움을 요청하려고 했어요. 문제는, 그 방이 전화랑 문자메시지는 안 터지고 인터넷만 가능하더라구요. 장난전화라고 생각하면서도 구조대원들이 어쩔 수 없이 출동하거나, 경찰이 빡칠 대로 빡쳐가지고 이 새끼 잡아다가 꼭 벌금 물린다고 달려오거나, 누구라도 일단 저희를 찾으려고 했겠죠.
그런데 인터넷으로는 대체 뭘 할 수 있겠어요? SNS에 "생판 처음 보는 사람이랑 '섹스해야 나갈 수 있는 방'에 갇혔어요. 도와주세요." 하고 글이라도 올려요? 일단 보이스톡을 하면, 말에는 뉘앙스라는 게 있으니까 진지하게 도움 요청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거든요.
근데... 저는. 저는 진짜 절박했는데... 친구들은 내내 웃기만 했어요. 특히 지연이가 쪼갤 때, 아니, 웃을 때 진짜 죽이고 싶더라구요. 이 미친년이 지금 누구는 급해죽겠는데... 아, 아무튼 그랬어요. 그 다음에는 부모님께 보톡을 걸었는데, 뭐... 112나 119에 신고 해달라고 한 삼백번은 말한 것 같아요. 다 헛짓이었지만. 첫번째 방에서 문 열리는 조건이 뭐였는지 생각하면 입이나 손으로 하는 걸로 퉁치고 넘어갈 순 없을 것 같았어요. 이제, 저랑 걔는, 그 사람은 일면식도 없다가, 갑자기 웬 방에 갇혀가지고 어쩔 수 없이 이걸 해야 하는 입장이었잖아요.
그런 상황이었는데도 저를 싫어하거나, 제 몸을 역겨워한다거나 하는 인상은 못받았어요. 생각해보세요. 갑자기 처음 보는 사람하고 그걸 해야 하는데 그게 솔직히 기분이 좋겠어요? 근데 그런 티를 그 사람은 전혀 안냈어요. 제가 사람이 아니고 푸딩이라서 조금만 세게 만져도 망가질 것처럼 되게 부드럽고... 그래서... 분명히 시작했을 때는 걱정이 태산이었거든요. 이걸로 임신하면 어떡하나, 이렇게 했는데도 문이 혹시 안 열리면 어떡하나, 회사 며칠 못 나갔는데 짤렸으면 어떡하나. 정말이지, 이 거지 같은 방에서 나가야 하니까 어쩔 수 없이 하는 거라는 마음이 강했는데, 다 끝났을 때는 하, 다리에 힘이 풀려서, 아, 왜 웃어요! 하하! 웃지 마요! 하하. 지금 생각하면, 음... 고맙죠. 자기도 나 못지 않게 불안했으면서... 있는 그대로 말해달라면서요. 있는 그대로 말씀드리잖아요. 제가 거기서 좀 많이 울었어요. 너무 분하고, 짜증나고... 핸드폰 배터리도 다 나갔으니까 그냥 바깥세상하고는 완전히 단절된 채로 갇힌 거잖아요. 그러니 정상일 수가 없었죠. 그 때 걔가 많이 위로해줬어요. 자기도 불안하면서. 방 자체는 좋게 받아들일 수가 없죠. 얼마만에 나왔는지는 기억 안나요. 아마 CCTV 같은 걸로 섹스테이프라도 녹화하지 않았을까요. 서로 바깥 얘기 할 때마다 제 얘기도 되게 잘 들어주고. 울고 싶을 때마다 귀신 같이 알아채고 뒤에서 끌어안아줬어요. 걔한테 그렇게 안겨있으면 그것만으로도 위로가 돼요. 갑자기 뜬금없이 터져나오는 그... 와, 뭐라 말이 안나오네. 이건 당해봐야 돼요. 직접. 그래도 무서운 방 미션 중에서는 이게 수행하기 쉬운 편이었어요. 그냥 혈관에 삽관 박아서 피 좀 모으면 그만이거든요. 적어도 처음 몇 번은 그랬죠. 제가 문과지만, 동맥은 절대 손상되면 안되고, 정맥이 파란색인건 알고 있었거든요. 마지막에는 지혈할 기운도 없어서 제가 과다출혈로 갈 뻔한 적도 있어요. 그래서 2L 요구를 맞닥뜨렸을 때는 저희가 하루에 각자 100ml씩 열흘동안 뽑아서 그걸 채우려고 했어요. 근데 자고 일어나 보니까 그 들통이 조금은 차있어야 하는데 텅텅 비어있는 거에요. 깨끗했어요. 그 들통에서 피비린내 진동하는데 그걸 끌어안고 자기도 해보고, 한 사람만 피를 뽑고 다른 사람은 불침번을 서기도 했는데. '니네가 왜 이러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뭘 원하는지는 알았으니 주겠다.' 대충 이런 마음이었던 거 같아요. 거기까지만 보고 제가 중간에 기절했는데, 이제, 이 녀석이 일어나서 제가 한 짓을 본 거죠. 뭐. 한 사람 죽으면 다른 사람은 내보내준다는 보장이 있는 것도 아니었고. 제가 바보짓 한 게 맞아요. TV, 휴대폰, 책, 아무것도 없는, 아니, 나중에 가면 책은 주긴 했지만, 아무튼, 그런 방에 혼자 남는다는 생각만으로도 충분히 미칠 수 있거든요. 제가 알죠. 저도 그런 상상 많이 했으니까. 반대로 걔가 그렇게 피를 많이 흘려서 죽을 수도 있는 상황까지 갔다면, 그래서 제가 혼자 남을 뻔했다면 저도 똑같이 화냈을 거에요. 처음 몇 년은 할 게 그것밖에 없기도 했고, 할 때는 일단 세상에 저희 둘밖에 없잖아요. 주변에 뭐가 결여되어 있는지 전혀 신경쓸 필요도 없고, 그냥 상대만 바라보고 기뻐하면 되니까. 떡 굳은 걸 충분한 크기로 잘라서 거기에 압정을 꽂았어요. 뾰족한 부분 튀어나오지 않는 거 확인까지 다 마친 다음에 알약 먹는 것처럼 물하고 꿀꺽 삼키는 거죠. 그리고 바로 토했어요. 화끈한 고통이 아니라 길고 오래가는 고통이었죠. 화장실에서 볼일보고 뒷처리하는 게 대표적인 '해결 안되는 일' 중 하나에요. 그 때 녀석이랑 진짜 볼 거 다봤죠. '도미노를 세워야 나갈 수 있는 방이랑', '술래잡기를 해야 나갈 수 있는 방', '가위바위보에서 연속으로 여덟번 비겨야 나갈 수 있는 방' 다음에... '한 달 동안 침묵해야 나갈 수 있는 방', '한 달 동안 금욕해야 나갈 수 있는 방'에다가... 또 몇 개 더 있었던 거 같은데. 지금 생각해보니 다 '좋은 방'들이네요. 가만히 앉아있으면 그냥 평생 갇혀있는 것밖에 안되는 반면에, 미션이라도 성공하면 다음 방에는 뭔가 새로운 게 나타날지 모르잖아요. 운 좋으면 실마리 같은 거라도 얻어서 나갈 수 있을지 모르구요. 그러니 아무리 위험해도 할 수밖에 없었죠. 새끼손가락은 엄지에서 가장 멀리 떨어져있으니 보조라도 하죠. 안중근 의사도 이 손가락을 자르신 걸로 알고 있어요. 그리고 그 때쯤에는 저희가 굉장히 오랫동안 함께 한 뒤였거든요. 스톱워치였어요. 둘 중 하나는 새로운 방에 들어갈 때마다 리셋됐는데, 다른 하나는 제가 나올 때까지도 계속 작동 중이었죠. 그래서 얼마나 오래 됐는지 항상 알 수 있었어요. 저희를 위해 음식 만드는 사람, 그걸 승강기로 올려보내는 사람, 조건 달성하는지 감시하는 사람, 달성하면 문 열어주는 사람, 잘 때 몰래 들어와서 피 쏟아놓은 들통 치우는 사람, 책 가져다주는 사람까지 얼마나 많았는데요. 그 사람들이 다 증인이에요. 음식이랑 같이요. 처음에는 아무 책이나 오다가 나중에는 저희가 원하는 책 제목을 써서 보냈죠. 막말로 멀쩡한 사람 잡아다가 그런 곳에 가둬두지 않았으면 그런 욕을 먹었겠어요? 근데 책들 맨 앞장이나 뒷장에 보면, 같은 출판사에서 나온 책 목록을 넣어놓거나, 작가 이력을 적어두잖아요. 그걸로 처음 보는 책들도 주문했죠. 얻어걸리기라도 하면 좋은 거고, 아니어도 다른 책이 랜덤으로 올 테니 밑져야 본전이었죠. 근데 그렇다고 복잡한 이론 같은 거 담긴 의학서적이 와봐야 저희가 이해할 수 있을 리가 없잖아요. 그러니 좀 실용적이고 바로 써먹을 수 있는 게 필요했어요. 시간만 때운 건 아니구요, 언젠가는 나갈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저는 동시통역이랑 번역도 계속 공부했고, 이 녀석은 행정학을 공부했죠. 그래서 그렇게 오랫동안 같이 있어놓고도 함께 늙어갈 기회는 없었어요. 감히 날 강제입원시키려고 한 의사들도 여럿이었지만... 난 다시는 갇히지 않아요. 절대. 비트코인, 평창 올림픽, 브렉시트, 코로나, 우크라이나 전쟁, 부동산 연쇄 파산, 서울 테러, 3차 대전... 아, 아직 3차 대전은 아닌가? |
괴담/미스테리 키스해야 나갈 수 있는 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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