붉은 바탕에 하얀 글씨. ‘주민과 협의 없는 재개발은 즉시 중단하라.’ 80년대 민주투쟁, 그리고 현재 북한과 몇몇 공산주의 나라에서만 보일 것만 같은 강렬한 투쟁의 문구. 무너지고 부서진 빈 집 곳곳에 자리 잡은 전국철거민협의회 지구들.
언제 쫓겨나야 할지 모르는 주민들의 한숨이 모여 회색빛 하늘을 만들고, 주택들은 마주보고 좁은 골목을 이룬다. 반 이상이 떠나간 이 동네. 아직 반 이상은 이 곳에 남아 있는 사람들.
곳곳에 자리 잡은 방문요양센터와 지역아동센터들은 가난에 시달리는 주민들을 먹이 삼아 터를 잡고, 빈껍데기만 남은 영혼들의 안식처인 성매매업소들은 마지막 단물까지 빨아 먹으려 다양한 형태로 아직 남아 있다.
양복을 입고 위장한 용역 깡패들은 구린내를 풍기며 구청에서 작성되어 진 서류들을 들고 우르르 몰려다니며 사람들을 위협하고, 불안한 영혼들의 미끼로 장사하는 사이비 종교와 무당들은 빠져나가는 동네에 자리 잡으려 악귀처럼 몸부림친다.
그래도 살아가야지. 떠나지 못 하고 죽지 못 한 사람들이 모인 이 곳은 후미동이다.
**
유난히 어둠이 깊게 내려 앉아 목림과 수심이 앉아 있는 달동네 오르막길 초입을 깊게 덮었다. 이 동네 하늘 위 달과 별은 죽어버린 지는 오래다. 암흑 속에서 남녀 둘은 이 곳이 익숙한 듯 죽어버린 달과 별의 자리를 가만히 쳐다보았다.
수심은 목림 그녀의 긴 소매를 자연스럽게 올렸다. 할퀴어진 상처. 오래되어 딱지가 되어버린 흉터. 그리고 생긴 지 얼마 되지 않은 멍과 찰과상.
그는 그녀의 상처 위에 연고를 발라준다. 얼마나 발랐는지 약도 바닥을 드러내고 있었다. 목림은 그런 그의 얼굴을 지그시 바라보다 이마에 입을 맞춘다.
“우리 동네 신은 전지전능하지 않나봐.”
조용히 약을 발라주던 수심은 웅얼거렸다. 백옥으로 빚어져 살짝만 스쳐도 금이 가 산산조각 날 것 같은 목림의 피부에 상처를 낸 그녀의 부모에게 증오의 감정을 느낀 것은 오래되었다.
전등이 뒤늦게 켜지고, 세상에는 둘만 남아 금방이라도 증발해버릴 것 같은 감정에 휩싸였다. 수림은 그에게 자연스럽게 등의 맨살을 들이밀었다. 브라끈 밑 채찍 질 같은 길쭉한 상처들이 깊게 패여 핏물이 검게 말라 붙어있었다.
“죽여 버리고 저 멀리 나랑 떠나자.”
그는 고개를 푹 숙여 몸을 부들 떨어대었다. 매번 그런 그녀의 고통을 마주할 때 마다 습관적으로 내뱉는 말이었다.
“그럼 너랑 나랑은 이런 시간조차 가질 수 없는 거 알지? 난 지금 이 순간 자체가 좋은걸.”
그녀는 고개를 뒤로 돌려 자신보다 더 고통스러워하는 수심에게 웃어보였다. 단발보다 약간 더 기른 흑발에 대비되는 흰 피부. 눈은 양옆으로 길쭉했고, 코는 높았다. 그리고 오른쪽 눈 가장자리 아래 찍힌 점은 그런 매력을 더욱 더 상기시켰다. 그는 그런 그녀를 좋아했다. 숲속에 흐르는 물이 되어 스며들어 하나가 되고 싶었다.
저 멀리 두 명의 사람이 걸어온다. 수심은 오르막길을 올라 어둠 속에 몸을 숨겼다. 삶에 찌들어 피로가 온 몸을 덮은 중년의 여성은 입을 헤벌쭉 벌려 침을 바닥에 흘리고 있는 지체장애인 딸을 보조하고 있었다. 딸이라고 하여도 30중반은 족히 넘었지만 정신은 그녀의 신체를 따라 잡지 못 하고 과거에서 방황을 하고 있었다.
어두운 삶이 삼켜버린 그 두 모녀는 목림 앞에 섰다. 중년의 여성은 손을 가슴 앞으로 모으고 고개를 숙였다.
“구원해주세요.”
그 옆에서 딸아이는 몸을 흐느적거렸고 갈 곳 없는 두 눈을 허공을 향해 바라보았다.
언제 쫓겨나야 할지 모르는 주민들의 한숨이 모여 회색빛 하늘을 만들고, 주택들은 마주보고 좁은 골목을 이룬다. 반 이상이 떠나간 이 동네. 아직 반 이상은 이 곳에 남아 있는 사람들.
곳곳에 자리 잡은 방문요양센터와 지역아동센터들은 가난에 시달리는 주민들을 먹이 삼아 터를 잡고, 빈껍데기만 남은 영혼들의 안식처인 성매매업소들은 마지막 단물까지 빨아 먹으려 다양한 형태로 아직 남아 있다.
양복을 입고 위장한 용역 깡패들은 구린내를 풍기며 구청에서 작성되어 진 서류들을 들고 우르르 몰려다니며 사람들을 위협하고, 불안한 영혼들의 미끼로 장사하는 사이비 종교와 무당들은 빠져나가는 동네에 자리 잡으려 악귀처럼 몸부림친다.
그래도 살아가야지. 떠나지 못 하고 죽지 못 한 사람들이 모인 이 곳은 후미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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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난히 어둠이 깊게 내려 앉아 목림과 수심이 앉아 있는 달동네 오르막길 초입을 깊게 덮었다. 이 동네 하늘 위 달과 별은 죽어버린 지는 오래다. 암흑 속에서 남녀 둘은 이 곳이 익숙한 듯 죽어버린 달과 별의 자리를 가만히 쳐다보았다.
수심은 목림 그녀의 긴 소매를 자연스럽게 올렸다. 할퀴어진 상처. 오래되어 딱지가 되어버린 흉터. 그리고 생긴 지 얼마 되지 않은 멍과 찰과상.
그는 그녀의 상처 위에 연고를 발라준다. 얼마나 발랐는지 약도 바닥을 드러내고 있었다. 목림은 그런 그의 얼굴을 지그시 바라보다 이마에 입을 맞춘다.
“우리 동네 신은 전지전능하지 않나봐.”
조용히 약을 발라주던 수심은 웅얼거렸다. 백옥으로 빚어져 살짝만 스쳐도 금이 가 산산조각 날 것 같은 목림의 피부에 상처를 낸 그녀의 부모에게 증오의 감정을 느낀 것은 오래되었다.
전등이 뒤늦게 켜지고, 세상에는 둘만 남아 금방이라도 증발해버릴 것 같은 감정에 휩싸였다. 수림은 그에게 자연스럽게 등의 맨살을 들이밀었다. 브라끈 밑 채찍 질 같은 길쭉한 상처들이 깊게 패여 핏물이 검게 말라 붙어있었다.
“죽여 버리고 저 멀리 나랑 떠나자.”
그는 고개를 푹 숙여 몸을 부들 떨어대었다. 매번 그런 그녀의 고통을 마주할 때 마다 습관적으로 내뱉는 말이었다.
“그럼 너랑 나랑은 이런 시간조차 가질 수 없는 거 알지? 난 지금 이 순간 자체가 좋은걸.”
그녀는 고개를 뒤로 돌려 자신보다 더 고통스러워하는 수심에게 웃어보였다. 단발보다 약간 더 기른 흑발에 대비되는 흰 피부. 눈은 양옆으로 길쭉했고, 코는 높았다. 그리고 오른쪽 눈 가장자리 아래 찍힌 점은 그런 매력을 더욱 더 상기시켰다. 그는 그런 그녀를 좋아했다. 숲속에 흐르는 물이 되어 스며들어 하나가 되고 싶었다.
저 멀리 두 명의 사람이 걸어온다. 수심은 오르막길을 올라 어둠 속에 몸을 숨겼다. 삶에 찌들어 피로가 온 몸을 덮은 중년의 여성은 입을 헤벌쭉 벌려 침을 바닥에 흘리고 있는 지체장애인 딸을 보조하고 있었다. 딸이라고 하여도 30중반은 족히 넘었지만 정신은 그녀의 신체를 따라 잡지 못 하고 과거에서 방황을 하고 있었다.
어두운 삶이 삼켜버린 그 두 모녀는 목림 앞에 섰다. 중년의 여성은 손을 가슴 앞으로 모으고 고개를 숙였다.
“구원해주세요.”
그 옆에서 딸아이는 몸을 흐느적거렸고 갈 곳 없는 두 눈을 허공을 향해 바라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