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호한 선택은 없다. 드라마 〈지배종〉의 한효주는 주저하는 법을 모른다. 확고한 자취를 따라 완성된 둘만의 세계가 서늘한 푸른빛으로 아른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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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배하는, 한효주
예리한 시선을 가진 ㅈㅈㅎ의 말에 따르면 한효주는 이런 배우다. “관객으로 지켜봤을 때도, 촬영장에서 가깝게 마주했을 때도 참 단단한 사람인 것 같다고 느꼈어요. 저보다 훨씬 단단한 것 같아요. 가까이에서 본 지 6개월밖에 안 된 사이라 아주 신빙성 있는 증언이라고는 장담 못하겠지만요. 예를 들면 인터뷰할 때 저는 이렇게 등도 좀 구부리고 다리도 꼬고 헐렁하게 앉아 있다면 효주 씨는 안 그럴걸요? 술을 먹더라도 저는 ‘먹으면 안 되는데…’ ‘한 잔만 마실까’ 하다가 컨트롤을 잃는 스타일이라면 효주 씨는 ‘이날은 술 좀 마셔도 된다’고 마음먹은 다음 확실하게 몸을 움직이는 쪽이죠.” 놀랍게도 <보그> 촬영이 끝난 뒤 고요해진 스튜디오에서 인터뷰를 위해 마주한 한효주는 꼿꼿한 자세로 나를 마주 봤다.
지금 모습 그대로, 한효주가 연기하는 윤자유는 인공 배양육이라는 유망한 산업을 이끄는 대기업의 총수다운 빈틈없고 카리스마 있는 모습으로 첫 화의 첫 장면을 장식했다. 뛰어난 능력치를 지닌 또 다른 캐릭터, <무빙>(2023)의 이미현과도 다르다. 윤자유에겐 사랑이라는 약점도 없으니까. “촬영하는 내내 참 외로웠습니다.(웃음) 메마른 나뭇잎처럼 바스락거리는 인물을 연기하느라 현장에서 까불거릴 수도 없었어요. 하루 종일 촬영하다 보면 한효주보다 윤자유로 지내는 시간이 훨씬 많은데 감정을 억누르는 삶이다 보니 어쩔 수 없이 영향을 받게 되더라고요. 촬영이 끝나면 온몸이 밧줄로 꽁꽁 묶여 있다가 풀려난 느낌이 들더군요. 원래는 촬영 기간에 술을 자제하는데 <지배종> 촬영하면서는 퇴근하고 숙소에 도착하면 답답하고 허한 마음을 달래려 포트 와인을 한 잔씩 마시고 잠들곤 했어요.” 한효주가 극 중에서 자신과 긴장 관계를 이루는 대한민국 국무총리 선우재(ㅇㅎㅈ) 역할에 대해 부러움을 표한 것 역시 그런 압박감 때문이었을까. “제가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인물인 반면 희준 오빠는 이렇게도 해보고, 저렇게도 해보고, 혼자 아주 변화무쌍해요. 옆에서 봐도 참 재미있게 연기하는 것 같더라고요.” 의외의 즐거움은 기업 대표를 연기하며 다채로운 스타일링에 도전하는 일에서 찾아왔다. <지배종>에서 칼같이 자른 단발머리로 등장해 서늘한 매력을 뽐내는 한효주는 우아한 트위드 드레스부터 시크한 수트까지 다양한 스타일을 소화하며 변신의 재미를 누렸다. “<무빙>도 그렇고, <독전>에서도 거의 단벌 신사로 등장했잖아요.(웃음) 윤자유는 오랜만에 스타일을 만들어가는 재미가 있는 캐릭터였어요. CEO다 보니 최근 맡은 역할 중 옷을 가장 잘 차려입을 수 있어 좋았죠. 영화 <쎄시봉>(2015)과 <무빙>에 이어 호흡을 맞춘 채경화 의상 팀과 하루에 옷을 몇십 벌씩 피팅하며 즐겁게 연출했어요.”
윤자유의 곁에는 ‘든든한 네 편’을 자처하는 수많은 사람이 있다. 물론 그중 누가 진짜 그녀의 편인지는 시종일관 불투명하다. 크고 작은 판단을 종용하는 주변인들 가운데서 윤자유는 투명한 창문을 고요히 응시하며 끊임없이 되뇐다. “활용해야 될 자원일까, 멀리하는 게 상책일까.” 실제 한효주는 연예계라는 비밀스러운 세상에서 타인을 곧잘 믿는 편이다. “상처받을 수 있지만, 그래서 뭐든 깊이 믿지는 않으려 노력하지만, 결국 잘 믿는 편이에요. 특히 한번 친해진 사람에게는 마음을 여과 없이 주죠.” 한효주의 인스타그램에는 친구에 진한 애정이 듬뿍 담긴 게시물이 심심치 않게 업로드된다. BH엔터테인먼트 동료 배우들과 함께 촬영한 화보, 중학교 친구들과 찍은 스냅사진, 오랜 인연을 간직한 일본인 친구를 위한 생일 축하 사진 등등. “마음만 맞으면 누구와도 친구가 될 수 있어요. ㅁㅅ 선생님이랑도 오랜만에 만나면 한 번에 8시간씩 수다 떨고 그러니까요. 우정을 포함한 소중한 관계는 지금 제 인생에서 결코 놓치고 싶지 않은 부분인 것 같아요.” 지난 20년 동안 일을 1순위로 두고 살면서 한효주는 놓친 것이 많다고 고백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친구들은 제 곁을 지켜줬어요. 지금부터라도 제가 놓쳤던 사소한 행복, 그러나 인생에서 어쩌면 가장 중요한 그것들을 꼭 붙잡고 살고 싶어요.” 몇 달 전 진행한 <보그> 인터뷰에서 순간의 기쁨을 사수하는 일에 더 많은 시간과 마음을 할애하겠노라 다짐했던 한효주는 여전히 그 마음을 지켜가는 중이다. 덕분에 애틋한 추억도 많이 쌓였다. 그녀는 <지배종>의 촬영 현장을 다소 쓸쓸한 풍경으로 회상했지만 돌이켜보면 화보 작업까지 함께 한 ㅈㅈㅎ 배우를 포함해 새로운 인연도 많이 얻었다. “윤자유의 최측근인 온산 역의 (이)무생 오빠와는 이번에 처음 만났는데 좀 더 긴 호흡으로 다른 작품에서 다시 만나고 싶을 만큼 매력적인 배우더라고요. 카리스마 있지만 동시에 주변 사람들을 아주 편하게 해주는 매력이 있어요. (주)지훈 오빠의 경호원 동기로 등장하는 ㄱㅇㅇ이라는 신인 배우가 지닌 선한 기운도 너무 좋았죠. 제가 아주 친절한 사람은 아닌데 저도 모르게 이안이를 챙기고 있더라고요. 데려가서 연극도 보여주고요.” <비밀의 숲>을 쓴 이수연 작가와 디테일한 연출의 대가라고 느낀 박철환 감독, 영화 <골든슬럼버>(2018)에 이어 오랜만에 반갑게 재회한 베테랑 촬영감독 김태성 등 믿음직한 제작진도 결코 잊지 못할 얼굴들이다. 지난해 제51회 국제 에미상 시상식에서 시상자로 나서며 한효주는 배우의 삶에서 단단한 관계가 주는 힘을 다시 실감했다. “다들 똑같더라고요. 같은 작품으로 만난 팀끼리 으쌰으쌰하는 모습이요. 하나의 목표를 위해 혼신을 다하다 보면 생기는 끈끈한 팀워크가 정말 고맙고 소중한 거라고 다시 한번 느꼈어요.”
그리고 단단한 관계는 언제나 추진력을 더해줬다. 드라마 <봄의 왈츠>(2006), <하늘만큼 땅만큼>(2007), <찬란한 유산>(2009), <동이>(2010) 등으로 ㅈㅈㅎ과 마찬가지로 데뷔하자마자 주목받은 한효주는 이후 영화계에서 멜로 강자의 입지를 다졌으나 액션물과 해외 드라마 등으로 꾸준히 도전을 넓혀갔다. 고등학생 아들을 둔 히어로로 변신한 <무빙> 역시 새로운 마일스톤이었다. 다행히 대중의 너그러운 평가가 이어졌다. “사람들은 인지하지 못했을 수도 있지만 저는 늘 새로운 역할을 추구해왔어요. 30대를 기점으로 더 다양한 캐릭터와 작품 제의가 들어오는 요즘인데 그게 배우의 입장에서 나이 드는 것의 가장 좋은 점 같아요.” 대중의 찬사 혹은 수상의 영광을 몰고 온 수많은 출연작 가운데 그녀가 스스로 거머쥔 기회였던 미국 드라마 <트레드스톤>(2019)을 꾸준히 자신의 터닝 포인트 작품으로 꼽는 것은 그런 갈망의 방증일 것이다. “주변 이야기를 아예 신경 안 쓴다고 하면 거짓말이겠지만 그래도 내 선택과 행보를 객관적으로 보려 노력하는 편이에요. 그러면서 내가 사랑받을 수 있는 작품보다 진짜 하고 싶은 작품을 고르는 용기가 생겼죠. 그러다 보니 결과에 순응할 수 있게 되고요. <무빙>으로 호평받은 다음 곧바로 <독전 2>에서 혹평을 받긴 했지만 대중의 마음을 읽기는 언제나 어려웠으니 체력이 닿는 한 마음이 이끌리는 환경에서 새로운 도전을 이어가자는 생각입니다.” 지난가을 공개된 한효주에 관한 기사에서 나는 도입부를 다음과 같이 썼다. “그녀에 대해 다 안다고 생각했다. 착각이었다.” 한효주도 마찬가지였다. 도전을 거듭하며 그녀 역시 스스로에 대해 새롭게 알아가고 있다. “촬영 중인 작품이 일본 드라마라 지난 1월부터 일본에서 주로 생활하고 있어요. 역마살인지 환경을 바꾸는 데서 오는 리프레시가 있더라고요. 새로운 곳에서 새로운 사람을 만나면 생기는 에너지가 분명 있어요. 그런 라이프스타일로부터 원동력을 많이 얻는 사람이어서 지난해에는 여행도 많이 다니고, 소소하게 해보고 싶었던 일에도 도전하면서 최대한 즐겁게 지냈습니다.” 어느 순간 한효주는 확실히 달라졌다. 30대 초반까지도 행복을 불행의 전조로 여기며 은근한 불안에 떨었다는 그녀는 이제 순간을 느긋하게 음미하는 법을 안다.
<지배종>을 촬영하며 낯선 희열을 느낀 순간도 많았다. “일단 연기하는 재미가 있는 대본이었어요. 5분 정도의 긴 호흡으로 담아내는 장면을 촬영할 땐 간만에 연기하는 재미를 느꼈죠. 요즘은 한 신이 아무리 길어도 1분을 넘기는 경우가 거의 없거든요.” 소재 역시 흥미로웠다. “촬영하는 동안 ‘왜 이제까지 이런 이야기가 없었지?’ 싶었을 정도로 동시대적인 이야기예요. 배양육 화두를 선점했다는 게 행운처럼 느껴지기도 해요. <지배종>은 미래에 대한 질문을 던지고, 흥미로운 생각을 나누게 하는 작품입니다. 앞으로 어떤 선택을 하면서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에 대해 가늠해보는 기회가 될 거예요.” 확신에 찬 목소리로 배양육의 장밋빛 미래를 선언하는 윤자유처럼 한효주가 명징한 호흡으로 말을 이었다. 마지막으로 오늘 만남의 이유, ㅈㅈㅎ과 한효주가 이루는 묘한 관계성 역시 흥미로운 관람 포인트다. ㅈㅈㅎ 역시 멜로와 전우애를 오가는 윤자유와 우채운의 케미스트리가 이 작품의 매력이 될 거라 공언했다. 한효주의 생각도 마찬가지다. “로맨스는 분명 아닌데 촬영장에서 지훈 오빠와 대사를 주고받다 보면 이게 지금 사랑싸움인지 뭔지 저도 모르겠더라고요. 이 둘의 관계는 사랑일까요? 연기하는 입장에서도 헷갈렸어요. 보는 입장에서도 이 부분을 재미있게 느끼실 것 같아요.”
일본을 기점으로 생활하고 있는 한효주는 서울에서 진행된 <보그> 촬영 내내 자신만만하게 카메라 앞을 배회하며 순간을 즐겼다. 많은 것을 억누르고 절제하며 살아가는 윤자유의 외피를 완전히 벗어 던진 모습이었다. 지금 그 모습 그대로 한효주가 윤자유에게 건네고 싶은 말이 있는지 물었을 때, 그녀는 주저 없이 답했다. “그래도 살아.” 그리고 덧붙였다. “윤자유는 생에 대한 의지가 별로 없어 보여요. 자기 목숨은 물론 생명에 대한 애착이 약하죠. 그래서 연민이 가더라고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다 보면 예상치 않은 순간에 재미있는 일이 벌어지기도 할 테니 계속 살아보라는 말을 해주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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