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살카즈들은 푹신한 눈밭 위에 둥글게 모여 앉았다. 지난 몇 달 동안 이들은 수차례 머리를 맞댔다. 사방에 깔린 아겔로스에 어떻게 맞설지, 전투에 서툰 타 종족들을 구조하는 데 인력을 얼마나 할애할지, 그리고 스타게이트가 붕괴되어 두 번 다시 카즈델로 돌아갈 수 없다는 참담한 현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논의하기 위함이었다.
쉼 없이 밀려드는 파도처럼 모든 길을 집어삼킨 아겔로스 탓에, 살카즈들은 쫓기듯 북쪽 개척 거점을 버리고 물러나야만 했다. 앞길은 캄캄하고 돌아갈 길마저 끊긴 채, 또다시 뿌리 없는 신세로 전락한 것이다.
행성의 고리가 반사하는 빛은 나날이 희미해졌고, 벽에 눌러붙은 핏자국은 갈수록 짙어졌다. 바닥나가는 식량과 숨 막히는 공기 속에서 입을 여는 이들조차 점차 자취를 감추었다. 사미인들이 기꺼이 호의를 베풀었음에도 살카즈들은 여전히 무거운 침묵으로 일관할 뿐이었다.
"베헤모스의 이빨은 정말 그렇게 처리하기로 결정 난 건가? 그걸 또 다른 '생명의 척추'로 바꾼다고?" 하지만 오늘은 다르다고 플레밍은 생각했다. 오늘만큼은 모두가 입을 열어야만 했다. 그래서 플레밍이 먼저 그 무거운 침묵을 깼다.
"솔직히 이해가 안 가. 어째서 그렇게 귀중한 물건을 선뜻 내어준 거지?"
"아마 우리가 몇 차례 결정적인 군사 지원을 해줬기 때문이 아닐까."
"...하지만 베헤모스는 결국 쓰러졌잖아."
"제사장께서 우리와 관련된 예언을 언급하셨어..."
사람들의 목소리에는 여전히 막막함과 당혹스러움이 묻어났지만, 적어도 대화는 더디게나마 앞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플레밍은 적절한 타이밍에 개입해, 대화의 흐름을 자신이 원하는 방향으로 유도했다.
"너무 복잡하게 생각하지 마. 이 작은 행성은 성질머리가 워낙 고약해서, 살아남으려면 서로 돕는 수밖에 없어. 게다가 사미와 우리는 본래 인연도 좀 있잖아."
"우리뿐만 아니라 다른 이들에게도 '생명의 척추'는 필요해. 우린 북쪽으로 가서 승리하고 더 많은 사람을 구해야 해... 우린 오직 어떻게 축복을 받을지만 고민하면 된다고."
북쪽이라는 말이 나오자 살카즈들은 다시 입을 굳게 다물었다. 이 전쟁이 얼마나 더 길어질지 아는 이는 아무도 없었고, 모두가 이미 지칠 대로 지쳐 있었다.
아차. 플레밍은 이마의 식은땀을 훔쳤다. 일류 상인이라면 이토록 성급하게 속내를 드러내선 안 되는 법이다. 억지웃음을 지으며 화제를 돌리려던 찰나, 무리 맨 바깥쪽에 앉아 있던 뱀파이어가 입을 열었다. 플레밍은 그 여성과 친분이 얕아 이름조차 가물가물했지만, 목소리만큼은 퍽 부드럽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가시가 얽힌 핏빛 장창을 우아하게 짚으며 그녀가 말했다.
"기대되지 않나요?"
"테라에 머물 적에, 우리에게 도시가 몇 개나 있었죠?" 자유자재로 형태를 바꾸는 피가 허공에서 물결처럼 은은한 빛을 띠며 흐릿한 도시의 윤곽을 그려냈다. "하물며 미지로 가득한 머나먼 행성이라면요? 상상해 보세요. 만약 우리가 더욱 평화로운 시대를 열어간다면, 그 무렵 탈로스 II의 대지와 하늘은 어떨지... 제 생각엔, 이제 우리의 새로운 보금자리를 지을 때가 온 것 같네요."
"베헤모스의 유골을 뼈대 삼아 하늘을 부유하는 공중 도시. 그만의 개성도 있어야 하고, 끝내주는 이름도 지어줘야겠지." 플레밍은 무심결에 소리 내어 중얼거렸다.
"신 카즈델? 그건 너무 거창한 것 같은데... '새로운 용광로'는 어때?"
"아겔로스가 공중에서 들이닥치지 못하게 튼튼한 포대 방어선부터 둘러야 해!"
장엄하고, 숙연하며, 위풍당당한... 사람들의 얼굴에는 머지않아 두 손으로 직접 빚어낼 공중 도시에 대한 짙은 동경이 피어올랐다. 살카즈들을 옥죄던 주저함과 불안감은 씻은 듯이 사라졌고, 그 자리를 전례 없는 설렘과 들뜸이 채웠다. 웅성거리는 군중 속에서 누군가가 무심코 '세쉬카'라는 단어를 내뱉었다. 거창한 목적이 담긴 것도, 상상했던 것만큼 위엄 있는 이름도 아니었다. 그저 앞길과 귀로 사이에서 잠시 쉬어가는 곳을 뜻할 뿐이었다.
하지만 이 얼마나 아름다운 울림인가. 플레밍은 그 단어를 혀끝에 올려놓고 몇 번이고 곱씹으며, 폐부에서 뿜어져 나오는 숨결과 턱의 떨림을 가만히 음미했다. 문득 그의 마음속에 한 가지 묘안이 피어올랐다. 어째서 세상 사람들이 살카즈를 음울하고 잔인하며 전쟁에만 미쳐 있는 족속으로 여기게끔 내버려 두어야 한단 말인가? 그 도시는 거대한 유원지로 만들어야 해. 대관람차, 노천 시장, 극장... 과거 살카즈의 것이든 아니든 재미있는 것이라면 모조리 쑤셔 넣는 거다.
북쪽의 삭풍은 뼈를 파고들 만치 시렸지만, 그 덕분에 플레밍의 머릿속은 그 어느 때보다 맑게 깨어났다. 꼬리에 꼬리를 물고 수많은 아이디어가 쏟아졌다. 예를 들어 '발사 기념일', '오픈 데이', '왕정 연합 행진' 같은 축제를 여는 거다. 살카즈들은 그 축제를 발판 삼아 민들레 홀씨처럼 부드럽게 이 행성에 내려앉을 것이다.
이 도시의 상공에는 두 번 다시 전사자를 화장하는 매연이 피어오르지 않을 것이다. 그 대신 불꽃놀이처럼 훨씬 더 눈부시고 아름다운 것들이 기꺼이 축복을 내려주겠지.
다른 사람들의 속내는 알 수 없어도, 스타게이트 너머의 의장만큼은 분명 이 아이디어를 쌍수 들고 환영할 것이다. 폭발이라는 단어만 들어도 뛸 듯이 기뻐하는 분이니까.
플레밍 앞에는 자신이 훌륭한 상인임을 증명할 기회가 무궁무진하게 널려 있었다. 이제 남은 일은 이 아이디어를 사람들에게 내다 파는 것뿐이다.
카뮤네 부모님이 세쉬카 초기 라이프스파인 건설에 참여했다는데 그시절 얘기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