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원히 이현단심 상플을 해..
드디어 나의 본래의 몸으로 돌아왔다.
눈을 떴을 땐 등짝이 불에 덴 듯 아파 기절했고,
다시 정신을 차렸을 땐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나의 원래 세계로 돌아왔다고.
고요한 밤공기. 타들어가는 장작 소리. 동굴 너머로 들리는 물소리. 풀벌레 소리.
익숙하고도 그리웠던 옷차림. 그 위로 붕대처럼 상처를 감싸고 있는 흰 천. 깨끗한 손.
누군가가 상처를 입고 정신을 잃은 나를 정성껏 돌봐준 것 같다.
아마도, 눈 앞의 저 남자.
남자가 입고 있는 옷의 끝자락이 너덜해진 채 찢겨져 있다.
내 어깨를 감싼 것과 같은 천이다.
저 남자는 대체 누구일까.
누구길래 나를 이토록 정성스레 돌봐준 걸까.
내가 신서리의 몸으로 살아왔듯, 누군가가 내 몸으로 살아가고 있었을까? 설마, 신서리?
혹시 등이 이토록 아픈 건 제자리로 돌아가는 대가였을까?
이유야 무엇이든 상관없다. 어쨌든 살아있기만 하면 장땡이니까.
몸을 일으키려다 저도 모르게 앓는 소리를 냈다.
남자가 번쩍 잠에서 깨어났다.
괜찮느냐 묻는 말에 대답도 하지 않고 다짜고짜 물었다, 누구시냐고.
남자는 텀을 두곤, 마찬가지로 대답 없이 내게 질문했다.
아무것도 기억이 나질 않느냐고. 낮고 단정한 목소리였다.
그렇다 대답했다. 남자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남자가 앉은 곳에는 그늘이 져 어떤 표정인지도 알 수 없었다.
남자가 그늘에서 벗어나 내게 다가왔을 때는 이미 표정을 지운 후였다.
남자는 내게 손을 내밀었다. 손을 잡자 남자가 나를 일으켜 앉혔다.
그 손길이 퍽 조심스러웠다.
호기심이 일어, 무슨 일이 있었냐고 물었다.
남자가 말했다. 내가 남자 대신 화살을 맞아 함께 절벽으로 떨어졌고, 운이 좋게 물 속으로 떨어져 겨우 목숨을 구했다고.
말하는 얼굴은 여전히 무표정이었다. 하지만 그게 가면인 것쯤은 누구라도 알 수 있었다.
어쩌다 화살을 맞았는지, 그 전에 신서리(추정)와 무슨 관계였는지, 왜 의원을 찾아가지 않고 여기서 숨어 나를 간호했는지..
궁금한 게 많았지만 선뜻 물어볼 수가 없었다.
그저 구해줘서 고맙다고만 했더니 남자는 떨리는 목소리로 그건 본인이 할 말이라고 했다.
..내 몸이 당신을 구했다고 해도, 내가 당신을 구한 게 아닌데. 내가 그 감사를 받아도 되나.
양심이 콕콕 찔렸다.
남자는 내게 미안하다고 했다. 도망자 신세로 평생을 살아가야 한다고.
전국에 방이 붙어, 정체를 들키면 언제든 끌려갈 수 있다고 했다.
그렇게 말하는 남자의 가면에 그제서야 금이 갔다. 괴로워보였다.
그래서, 뭐라도 말하고 싶었다.
"그럼 조선을 뜨면 되죠."
"..."
"여기가 안되면 외국 가서 살면 되죠. 지금은 여권도 없고 불체자 단속하는 것도 아닐텐데 뭐 어때요?"
"..불체자가 무엇이냐?"
"그런 게 있어요. 혹시 할 줄 아는 외국어는 있어요? 나 제2외국어 중국어였는데 다 까먹어서.. 아, 하긴. 중국이랑 지금 청은 또 말이 다르려나."
"..당최 무슨 소린지."
"쩔 수 없네, 300년 간극이 있어서."
"넌 꼭, ..다른 사람이 된 것 같구나."
"다른 사람 맞는데. 저 거의 20년만에 컴백했거든요."
"컴백?"
"네. 진짜 제 몸으로 돌아왔다구요."
"..."
내 말을 들은 남자의 표정이 복잡해보였다.
개소리로 들릴 걸 알았지만 남자에게는 이상하게도 솔직하고 싶었다.
목숨을 구해준 사람을 기만하고 싶지는 않았다.
남자가 내 말을 믿을 때까지 계속 설득할 순 없겠지만,
적어도 거짓은 말하지 말아야지.
-
남자가 구해다준 옷으로 갈아입었다. 내겐 조금 컸다.
옷가지를 여럿 껴입어서 덩치를 키워봐도 불편하기만 할 뿐 여전했다.
남자는 삿갓을 썼고, 나는 목화솜이 달린 패랭이를 썼다.
상인으로 위장한 채 조선을 벗어나기로 했다.
만약 바다를 건너면, 우리는 계속 함께 사는 건가?
묻고 싶었지만, 묻지 않았다.
남자는 나를 박 씨라 불렀고, 내게는 나으리라 부르라고 했다.
남자는 내 이름을 알고 있지만 나는 남자의 이름을 모른다.
물어본 적 없으니 말해주지 않은 거겠지, 본인의 이름을 새삼 말해주는 것도 이상하겠지.
어쩌면 기억을 되찾아 이름을 떠올리길 바랄지도 모르고.
하지만, 그 기억은 내 것이 아니니 돌아올 리 없다.
알면서도 이름을 묻지 않은 건.. 글쎄, 망설여지는 이유를 모르겠다.
-
바다를 건너는 배를 타기 위해 나루터로 이동을 해야 했다.
걸어서 꼬박 사흘은 걸리는 거리라고 했다.
벌써 몇 시간 째 비포장 산길을 걸었더니, 와씨, 다리가 후달렸다.
더 가면 진심 죽을 것 같아서 산길 한복판에 주저앉았다.
내 우는 소리에 앞서가던 남자가 다시 뒤돌아 왔다.
내 앞에 한쪽 무릎을 꿇어 내 얼굴을 살폈다.
남자는 곧장 말했다. 고생 시켜 미안하다고.
"..이 아저씨 사과가 습관이네."
"아저씨?"
"이런 것까지 나으리 탓을 하시면 어떡해요? 그러다 나중에 내가 진짜 하나부터 열까지 다 트집 잡으면 어쩌려고."
"..네 트집이야 내 기꺼이 감당해야지."
답답함에 한숨을 내쉬었다. 남자를 노려보았다.
남자는 눈을 피하지 않았다.
대체 신서리(추정)랑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이 남자는.
"혹시 신, 아니.. 강단심 좋아해요?"
"무, 뭐?"
"아잇, 지금의 나 말고. 이전의 강단심을 좋아했어요?"
"..."
"전의 나를 좋아한 거 맞죠? 그러니까 이렇게까지 책임감을 느끼고, 미안해하는 거고. 그쵸?"
"..."
"근데도 처음부터 남친이나 남편이라고 말 안했으니까,"
"..남친?"
"짝사랑?"
"..."
"아님 이미 까였거나?"
"까였, 하.."
필사적으로 태연한 척 떠봤더니, 남자가 헛웃음을 지으며 먼 곳을 바라본다.
헛웃음도 웃음이라고, 남자가 웃으니 나도 모르게 따라 웃고 싶어져서 입술에 힘을 주었다.
그래서 신서리(추정)랑 사귀었냐고 아니었냐고. 대답은 않고 왜 웃기만 해. 내멋대로 이미 까인 짝사랑이라고 생각해 버릴라.
웃느라 얇게 휘어지는 눈 아래로 흉터가 눈에 띄었다.
삿갓을 쓰면 그림자 때문에 남자의 눈이 잘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인지 남자는 삿갓을 잘 벗지 않았다. 삿갓을 써도 항상 고개를 살짝 숙이고 다녔다.
흉터가 부끄럽다는 듯이.
"..뭐 하나만 더 물어봐도 돼요?"
"또 뭐가 궁금한 것이야? 물어보거라."
남자와 시선을 맞췄다. 양쪽 눈동자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남자의 눈동자가 흔들린 것도 같다.
짝녀(추정)와 같은 얼굴을 하고 있으니, 아마 남자는 아직도 이 얼굴에 흔들리는 거겠지.
얼굴만 보고 좋아한 거면 좋겠지만, 이 남자 성정이 그럴 것 같진 않다.
"눈가에 그 흉터는 어쩌다 생겼는지 궁금해요."
"..이건,"
남자가 손을 들어 얼굴 한쪽을 쓸어내렸다. 망설이며 대답했다.
"큰 형님 대신 살아남았다는 증거이자, 작은 형님이 내린 벌이지."
흠. 저게 무슨 말이지. 나는 걍, 어디에 긁혔다거나 누구랑 싸웠다고 짐작했는데.
남자가 더 입을 열 생각은 없어 보이니, 저 대답으로 상황을 유추할 수밖에 없다.
삼남 중 막내. 큰 형님은 돌아가셨고, 작은 형님이랑은 사이가 안좋고.
근데 몽타주까지 붙은 수배자. 한자를 모르니 무슨 죄인지는 모르겠는데, 군관들이 쫓고 있으니까 나라에서 잡는 걸 테고.
말투나 행동을 봐선 높은 신분에.. 이거 꼭 사극 속 인물 설정 같네.
...잠만. 설마?
"..혹시, 나으리.., 왕족이에요?"
"..."
"우리 지금 왕한테 쫓기는 거예요?"
"...두려우냐?"
"헐. 그럼 대군이에요?"
"...그랬지."
"우와, 대박! 나 왕족 첨 봐요. 완전 신기해."
또 남자가 웃었다. 이번엔 헛웃음이 아니라 박장대소다. 이번에는 나도 참지 못하고 따라 웃었다.
남자는 눈물까지 흘렸는지 소매로 눈가를 닦으며 말했다.
"역적을 눈앞에 두고 그런 반응을 하는 사람은 나도 처음 보는 구나."
"역적은 무슨. 희생양이겠죠."
"..."
"나 나름 사극드라마도 꽤 해봐서 알거든요? 왕위에 오르면 제 형제들 견제하느라 유배 보내고 사약 먹이고, 어거지로 역적 만들어서 죽이는 거."
"..."
"안 들키고 조선 탈출하게 해줄게, 걱정 마요. 내가 서울에선 발연기였어도, 여기선 진짜 장돌뱅이 메소드 함 보여준다."
"네가 하는 말은 대체 하나도 알아들을 수가 없는데..,"
"..."
"이상하게 마음이 편해지는 구나."
남자가 옅게 미소를 띤다.
그 웃음에 갑자기 심장이 빨리 뛴다. 이런 미친. 대미친. 진짜 미친 거 아냐?
벌떡 일어나 호들갑스럽게 바지를 털어댔다.
반면 남자는 우아하게 그 자리에서 일어났다.
거리가 묘하게 가까워져서, 은근슬쩍 한 걸음 물러났다.
"이, 이제 다 쉬었으니 어서 가요."
"..정녕 괜찮겠느냐? 넌 등의 상처도 아직 다 낫질 않았는데."
"그럼 쫓기는 사람이 어디 태평하게 쉬겠어요? 빨리 청이든 이역이든 어디든 튀자고요."
"..그래. 그러자꾸나. 어디든 튀자."
앞서서 빠른 걸음으로 걸었다. 뒤따라 오는 남자의 발소리마다 꼭 심장이 더 크게 뛰는 느낌이 들었다.
그니까, 나 지금 신서리(추정)를 짝사랑(추정)하는 남자를 짝사랑하게 된 거지? 나한테는 이름도 안알려주는 남자를?
"그쪽이 아니라 이쪽이다."
"아, 죄송. 길치이슈."
남자는 이제 내가 하는 말의 반은 흘려듣기로 했는지 대꾸도 없다. 얌전히 남자의 뒤를 따랐다.
물끄러미 등을 올려다보다가, 엄한 생각이 들어 남자의 발 끝으로 시선을 내렸다. 심장이 더 거세게 뛴다.
...와씨, 진짜 큰일 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