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천.
가장 높은 하늘을 부르는 이름.
하지만 또다른 구천의 뜻은 땅속 깊은 밑바닥. 죽음의 세계.
어미가 둘 중 어떤 뜻으로 자신을 불렀는지는 기억하지 못한다.
하지만 그런 건 중요하지 않다.
결국 구천이 속하게 된 세계는, 저 바닥이었으니까.
살아서는 갈 수 없는 그 세계.
그 곳을 구천은 이렇게 칭했다.
귀의 세계, 라고.
빌어먹을 통행료.
귀의 세계로 들어가는 것은 대가가 필요했다.
그리고 그것은 늘, 죽음이었다.
구천이 가장 처음 죽음을 겪었던 그 물 속.
얕은 물 속이든, 깊은 물 속이든,
사람의 숨을 틀어막는 그 곳은 죽음의 장소였다.
복숭아 나무가지 하나를 끼고,
생명줄 하나만을 목에 건 채,
깊게, 그렇게 목숨의 저 밑바닥까지 가라앉는다.
끔찍하도록 묵직하게 내리찍는 고통과 함께.
그러다가 어느 순간,
그 모든 고통이 마치 없었던 듯 사라지는 것이다.
혼이, 육신을 버렸으니까.
육신을 벗어버린 혼이,
검은 원념으로 뒤덮힌 물 속을 거슬러 수면 위로 끌려 올라간다.
다시 올라온 그 곳은, 방금 전까지 구천이 보았던 화려한 궁이 아니었다.
꽃망울 하나 없이 바싹 마른 검은 가지.
이것이 진짜 궁의 모습인가.
계단 하나 돌뿌리 하나까지 뻗혀 있는 지독한 원념들.
이 궁이라는 것은 얼마나 많은 죽음과 원한 위에 세워진 것일까.
하지만 지금은 생각을 할 시간 따윈 없었다.
어린 세자가 죽어가고 있고
그 어린 몸뚱이를 살려내지 못하면 다음은 구천의 진짜 죽음일 테니까.
생강은 사내가 빠져들어간 물 밖에서 초조해 하고 있었다.
지금이라도 끌어내야 하는게 아닌가.
괜히 이 궁의 죽음만 하나 늘린 것이 아닌가.
그 순간 소리가 들려왔다.
딸랑.
생강의 귓전으로 스쳐지나가는 소리.
어릴 적부터 생강의 곁을 떠난 적이 없는 그 소리.
그 사내가 쥐고 간 자신의 방울 소리였다.
거짓말을 한 게 아니다.
그 자가 지금, 이 곳에 있다.
생강은 서둘러 달리기 시작했다.
방울 소리가 향하는 곳으로.
“세자!”
마치 허공에 스스로 떠 오른 듯한 어린 아들을 바라보며, 중전의 입에서 비명이 터져나왔다.
세자를 사지를 묶은 귀신의 검은 원념이, 그 작은 몸을 들어올리고 있었다.
온 몸이 찢어질 듯한 고통 속에서 어린 세자의 눈이 뒤집혔다.
이제 죽음이 곧, 이었다.
하지만 그 순간.
구천의 검이 원념을 찢어냈다.
복숭아 나무,
원래의 세상에서는 한낱 여인의 손에도 꺽이는 나뭇가지에 불과하지만
이 곳에서는 달랐다.
귀신을 베는, 가장 강한 검.
덩굴같이 단단히 매여 있던 원념은 고통 속에서 꿈틀거리며 물러났고,
세자의 몸도 바닥으로 털썩 떨어졌다.
바깥에 있던 궁녀들의 소란을 본 생각은 직감했다.
-그 자가 말한 것이, 바로 지금이로구나.
-영안군이 중간에 깨어날 기미가 보이면
그 쪽의 피를 보여주시오.
기회는 짧소.
알고 있다.
그리고, 생강은 절대로 이 기회를 놓칠 생각이 없었다.
단도가 여린 손바닥 위를 망설임없이 그어내렸고,
하얀 손바닥 위로 붉은 일선이 생겨났다.
아픔에 찡그릴 새도 없이, 그 손바닥으로 이마를 스윽 훔친다.
선명한 핏자국이 이마에 새겨졌다.
-보아라.
또다른 왕가의 피가, 이 곳에 있다.
세자를 감싼 구천을 내리찍던 기괴한 그것이
순식간에 문을 뚫고 밖으로 뛰쳐나왔다.
보이지 않아도 생강은 알 수 있었다.
복도에서 줄줄이 쓰러지는 궁녀들.
공간을 채우는 지독한 사기.
저 곳에 있다. 그것이.
끔찍한 증오, 원념, 한 공간에 있는 것만으로도 사람을 미치게 만들 듯한 깊숙한 어둠.
그것이 생강을 덮친다고 생각한 그 순간!
구천은 있는 힘껏,
그것의 등 뒤로 검을 내리꽂았다.
온 궁으로 뻗어나갔던 원념의 뿌리들이 순식간에 허물어진다.
-…역시 안 되네.
구천은 손을 내밀어 귀의 세계에 선명히 남은 그녀의 표식, 그 피를 닦아 내었다.
-저 놈의 정체를 모르니.
하지만 하나는 확실했다.
저 놈이 이 귀의 세계 너머, 저 여인에게 손 끝 하나 대지 못할 것이라는 것.
그가 그렇게 할 것이라는 것.
-진짜 여기 있어.
보일 리 없는데도, 왠지 생강은 알 수 있었다.
그 자가 지금, 내 앞에 있다는 것을.
그녀를 지키고 있다는 것을.
-넌 누구냐.
무슨 원한으로 왕실의 핏줄들을 죽이느냐.
이 질문이야말로, 이 모든 사태의 시작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