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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프’ 설명할 시간 없어, 어서 타! [리뷰]

무명의 더쿠 | 10:42 | 조회 수 211

나홍진 감독 신작 ‘호프’ 리뷰
비무장지대에 나타난 괴물
황정민·조인성·정호연 주연
속도감 넘치는 156분 액션
“뭣이 중헌디” 초현실 버전



구구절절 쓸 필요도 없다. "세상에." 이 세글자면 모든 상황이 설명된다. 스크린 속 배우 황정민이 먼저 세상을 외치면, 관객의 입에서도 외마디의 비명 혹은 감탄사가 튀어나온다.


별안간 1980년대식 경찰차를 거칠게 드리프트하며 나타난 나홍진 감독은 관객 앞에 멈춰 서서 "설명할 시간 없어, 어서 타!" 하고 손을 내민다. 그의 신작 '호프'는 2026년의 상업영화라면 관객을 영화적 쾌감 한계치에 몰아넣고 혼을 쏙 빼놓을 줄도 알아야 한다고 말하는 듯하다. 한국영화 사상 최고 제작비 투입와 칸국제영화제 경쟁 부문 초청이라는 화려한 타이틀로 기대치를 역대 최고로 올려놓은 영화인데, 그 값어치를 충분히 증명한다. 그래서 더욱 놀랍다. 정작 이러한 괴물 같은 결과물을 내놓은 나홍진 감독은 여기서 만족하지 않는단다. 오는 15일 관객에게 최종적으로 선보이기까지 후반 작업을 이어간다는 계획이다.


무대는 비무장지대 호포항 근처의 한적한 시골 마을. 평화롭던 논밭 사잇길에 사인을 도무지 알 수 없는 소의 사체가 널브러져 있다. 파리가 들끓고 구더기는 아직 생기지 않은 걸 보니 죽은 지 24시간도 안 된 사체다. 최초 발견자인 청년 사냥꾼 성기(조인성 분)는 사냥길에 나설 때만 해도 사체가 없었다고 증언한다. 인근 산에서 발생한 산불로 지원 인력은 없고, 신고를 받고 달려온 파출소장 범석(황정민 분)은 귀찮은 일에 휘말린 것 같아서 짜증부터 치민다. 그런데 사체를 자세히 살펴보니 어딘가 기묘하다. 자동차에 부딪힌 모습은 아닌 듯하고, 곰이 습격했다기에는 살점이 긁힌 상처가 너무 크다.


범석은 파출소와 상황본부에 무전을 넣으며 마을로 돌아오던 중 형체만 겨우 남은 부동산 건물과 마주한다. 깜짝 놀라 경찰차에서 내려 상황을 살피는데 순간 총성과 괴성이 울린다. 소리를 쫓아 달려가는 곳마다 처참하게 죽은 마을 사람들이 보인다. 그 곁에 남겨진 발자국은 아무리 봐도 이 세상의 것이 아니다. 한국에서 멸종한 호랑이인가? 아니면 지구상에서 멸종한 공룡인가? 길을 가다 우연히 만난 낙연(이상희 분)은 괴성을 내지르는 존재를 이렇게 묘사한다. '괴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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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러워. 콩이나 팥 같은 색깔이었어. 구부정하고, 키가 크고, 팔이 길어."


그 시각, 성기와 청년들은 소의 흔적을 추적하다 초토화된 축사를 발견한다. 너저분한 사체들에 남겨진 자국을 보니 논밭에서 본 소와 동일한 녀석의 소행인 듯하다. 곧이어 나뭇가지에 걸린 신체 일부를 발견한다. 축사 주인장 고씨 할아버지의 한 쪽 팔이다. 험한 것의 냄새가 진하게 풍겨온다. 이들은 산으로 들어가 원인을 찾기로 한다.



오직 직진하는 인간의 생명력


"머릿속이 도대체가 정리가 안 돼." 극중 범석이 내뱉는 한마디는 영화 전체를 관통한다. 달리고, 쏘고, 부수고, 던지고, 터지고, 으스러지고... 광속으로 스치는 광경을 보며 터져 나오는 감정을 추스르기도 전에 곧바로 사정없이 다시 달리고, 쏘고, 부수는 장면이 이어진다. 나홍진 감독이 지난 6일 진행된 국내 기자간담회에서 "비주얼과 사운드로 즐기는 영화가 있는가 하면, 텍스트(이야기)로 즐기는 영화가 있다. 이번 영화는 전자"라고 단언한 대로다. 관객은 이 "X 같은" 상황을 파악하려고 애쓸 시간도, 필요도 없이 눈앞에 벌어지는 사태를 날것 그대로 즉시 소화해야 한다.


극중 인물들이 상황을 파악하려는 상대에게 "그게 중요한 게 아니"라고 외치듯, 결국 "뭣이 중헌디"(곡성)의 거대한 연장선이다. 지금껏 쌓아온 경험을 기반으로 상황을 분석하고 타개하겠다는 거만한 호기를 버려야 살아남는다. 간첩과 공산당이 가장 두려운 세계관 속에서 나를 위협하는 최대 악당은 나와 비슷한 얼굴을 한 '인간'과 그들이 사용하는 '무기' 정도지만, 정체를 알 수 없는 생명체를 마주한 이후의 세계는 더이상 인간을 악으로 취급하지 않는다. 손짓 하나에 목숨이 왔다 갔다 하는 유약한 존재에게 남겨진 것은 '사냥당할 것인가, 사냥할 것인가'라는 질문뿐이다. 죽느냐 사느냐 머리를 싸맨 '햄릿'이 고개를 저을 원초적인 선택지다.



당신이 무엇을 상상하든 상관하지 않는 영화의 태도는 관객이 한결 편하게 영화를 따라갈 수 있도록 돕는다. 각 미장센에 담긴 메타포는 분명하지만, 특별히 내세우거나 투명하게 드러내지 않는다. 찾으면 좋고, 아니면 다음 기회에. 어차피 영상미의 거장 홍경표 촬영감독이 진수성찬으로 차려놓은 화면을 즐기기에도 벅차다. 캐릭터 구성 역시 참 정직하다. 여성도, 노인도, 불량 사냥꾼들도 미지의 공포로부터 자신의 삶을 지켜내기 위해 총알을 난사한다. "아무리 네가 괴물이라도 이건 선 넘었지!"라고 불평불만을 내뱉을지언정 겁을 먹고 꽁무니를 빼지는 않는다. 



억지스러운 사명감이나 신파, 고구마는 나홍진 감독의 평행 지구에 얼굴을 들이밀 엄두조차 못 낸다. 이들은 대의명분 없이 '그냥' 한다. 때로는 계란으로 바위를 치면 바위가 부서질 거라고 믿는 어리석은 사람 같고, 때로는 죽을 것을 알면서도 불길에 뛰어드는 나방 같기도 하다. 하지만 이들이 보여주는 무모함에는 구차한 전사와 서사, 대사 없이도 관객들로 하여금 인물을 응원하게 만드는 힘이 있다.


물론 SF 고어 판타지를 대규모 자본으로 만드는 한국영화 최초의 시도인 만큼 전에 없던 방식이 낯설게 다가오는 관객도 분명 있을 테다. 그러나 새로운 영화적 체험을 갈망하는 요즈음 관객들에게는 이보다 더 좋은 선물이 없다. "한국영화는 안 봐"라고 쉽게 이야기하는 일부 한국 관객의 눈도 번쩍 뜨일 영화다.


실재하지 않는 존재와의 연기가 처음인 황정민과 조인성이 카메라를 앞에 두고 극도의 공포감을 표출하는 장면은 가히 압권이다. 왜 황정민과 조인성이 한국을 대표하는 영화배우로 오랜 시간 신뢰와 사랑을 받아왔는지, 그 이유를 새삼스럽게 곱씹게 한다. 두 기둥 옆에서 폴짝폴짝 뛰며 제 몫을 해내는 정호연의 첫 스크린 연기 역시 앞으로의 성장을 기대케 한다. 특히 정호연의 등장신은 2026년 한국영화 베스트 등장신으로 뽑아도 부정하는 사람이 없으리라.



다만, 강약 조절 없이 '강강강' 초고압 압박으로 밀어붙이는 직선적인 구조는 관객 성향에 따라 호불호가 나뉠 수도 있다. 긴장감이 높은 영화일수록 관객의 숨통을 열어주는 구간이 필요한 법. 나홍진 감독은 이러한 구간을 실소가 터지는 대사들로 대신하지만, 숨 가쁜 추격신과 거친 총기 액션신이 150분 가까이 반복되다 보니 극도의 아드레날린 분비 끝에 피로해지는 순간이 찾아오기도 한다. 이 집요하고 끈질긴 액션신도 칸국제영화제 버전보다 약 5분 이상 압축한 결과물이라는 후문이다. 극장을 찾은 관객은 영화를 즐기다가 끝내 당이 뚝 떨어지는 비상사태를 대비해 카라멜 팝콘을 생존 아이템으로 챙겨도 좋을 듯하다.


한편 영화는 당초 3부작으로 기획됐다는 이야기가 돌았지만, 나홍진 감독은 '호프'가 한 편의 영화로 완결성을 가지고 있다고 밝히며 후속편 제작과 관련된 말을 아꼈다.


'호프'는 15일 개봉한다. 15세 이상 관람가. 러닝타임 156분. 쿠키영상 하나.

나혜인 기자 hyeein@womennews.co.kr



https://n.news.naver.com/article/310/00001381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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