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문오는 이강의 글을 교정하며 자신이 서사의 제어권을 쥔 창조주라고 믿는다. 그러나 실상은 소년이 구축한 허구의 세계에 종속된 유령이다. 창작자가 피조물에게 지배당하고, 비평가가 텍스트의 노예로 전락하는 이 전도는 문학적 작가성(Authorship)을 정면으로 묻는다. 진정 이야기를 지배하는 자는 누구인가. 펜을 쥔 소년인가. 아니면 그 문장을 욕망하다 삶을 잠식당하는 늙은 독자인가.
허문오가 이강의 글에 집착한 이유는 문학에 대한 순수한 열정도, 제자를 향한 시기나 질투도 아니었다. 타인의 가장 내밀한 삶을 합법적으로 훔쳐보고 싶은 병리적 욕망이었다. 예술 비평과 문학 지도라는 방패 뒤에 숨어 그는 소년의 눈을 빌려 담장 너머의 삶을 유린한다.
이강의 문장은 플로베르가 말한 일물일어설(一物一語說)처럼 치밀하고 냉정하다. 그러나 그 문장에는 치명적인 독이 스며 있다. 대상의 삶을 미적으로 승화하는 대신 살아 있는 인간을 한 조각씩 해체하고 박제하는 폭력의 도구가 되기 때문이다. 문학이 아름다울수록 현실의 윤리는 더욱 처참하게 무너진다. 미학적 성취는 도덕적 타락과 공존할 수 있는가. 오래된 이 질문은 이 드라마에서 가장 오늘의 얼굴로 되살아난다.
허문오는 이강을 안다고 믿었다. 이강의 서사 속 인물들을 오래 알고 지낸 이웃처럼 받아들였다. 그러나 그가 붙잡은 것은 소년이 파놓은 허구의 덫이었다. 그 안에서 그는 자신의 도덕성과 가정을 송두리째 잠식당한 가련한 독자가 된다. 소년은 스승의 결핍과 열등감을 정확히 읽어냈다. 그리고 그가 보고 싶어 하는 타인의 붕괴를 맞춤형 서사로 써 내려갔다.
허문오가 이강의 글에서 발견했다고 믿은 것은 문학이 아니었다. 평생 갈망했지만 끝내 갖지 못한 것들의 환영이었다. "가본 적 없는 곳에 대한 향수, 만난 적 없는 사람에 대한 그리움." 그 문장은 결국 허문오 자신의 갈망을 비추는 거울이었다. 맨 끝줄은 모두를 볼 수 있지만 누구도 자신을 보지 않는 자리다. 동시에 누구와도 관계 맺지 않는 자리다. 관계의 출발은 상대를 인식하는 일이며, 상대 역시 나를 인식한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일이다. 관음은 그 상호성을 거부한다. 그래서 애초부터 관계가 아니다.
스퀘어에 올라온 비평 몇 부분 발췌함 좀 복잡하지만 읽어보니 흥미롭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