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존재의 쓸모를 증명하지 못할 때 헐벗는다. 세상은 그 빈자리를 무가치(無價値)라 불렀다. 인간은 그 낙인을 지우려 어금니를 깨물었다.
5%대 시청률로 종영한 JTBC 토일드라마 〈모두가 자신의 무가치함과 싸우고 있다〉(차영훈 연출, 2026년)는 그 허우적거림을 정면으로 응시했다. 드라마는 수치심과 질투의 뼈대를 시기순으로 집요하게 추적했다. 평단은 자극적 사건 없이도 인간 밑바닥의 감정을 정확히 발라냈다고 평했고, 대중은 제 안의 못난 외로움을 들킨 듯 열광했다. 5%라는 숫자는 작고 초라하다. 그러나 그 숫자가 붙잡아둔 정서의 무게까지 가볍지는 않았다.
그러나 극본을 쓴 박해영이 말하는 ‘싸움’은 끝내 위태롭다.
싸움에는 통증이 따른다. 자기 못남을 직시하고, 세상이 규정한 쓸모의 규격에 균열을 내는 일은 원래 그렇다. 그러나 박해영의 인물들이 닿는 곳은 싸움의 완수가 아니다. 서로의 가여움을 확인하는 연민의 연대다. “우리 다 불쌍하다”는 말로 눙치고, “그냥 존재해도 된다”는 위로로 서로의 등을 두드린다. 아름답다. 그러나 헐겁다.
이 드라마의 구원은 극복이 아니다. 상처 입은 자들이 서로의 무해함을 확인하는 정서적 피난처에 가깝다. 세상의 거친 모서리는 그대로 둔 채 내부의 온기만 탐할 때, 서사는 어정쩡한 무해함으로 봉합된다. 날카롭게 세워졌던 칼날이 위로 속에서 무뎌지는 순간, 인간의 존엄을 향한 싸움은 시작도 하기 전에 멈춰 선다.
두잉(Doing)의 강박, 빙(Being)의 허기
드라마의 마지막 회, 제12화의 문을 여는 것은 변은아(고윤정)의 굳은 입술이다. 인간은 제 안의 가장 깊은 어둠을 쉽게 입 밖에 내지 못한다. 한 번도 제대로 발음해보지 못한 공포다. 속수무책으로 당해낼 수밖에 없었던 시간의 흉터다. 은아는 그 공포를 “그때”라는 아득한 대명사로 불러낸다.
빨리 커버렸으면 좋겠다고 매일 밤 기도했던 시절. 세상의 눈으로 보면 과거의 상처를 꺼내는 일은 흔히 약자의 누추한 변명으로 전락한다. “그때”를 호출해 현재의 남루함을 해명하려는 태도는, 가혹한 현실 앞에서 알리바이를 구걸하는 일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모두가 자신의 무가치함과 싸우고 있다〉의 서사는 이 “그때”의 사슬을 끊어내려는 몸부림 위에 세워진다. 그러나 그 몸부림은 당사자가 아니면 보이지 않는다. 인간은 제 안의 발버둥을 증명하려고 끊임없이 무언가를 하려 든다(Doing). 존재의 무가치함을 지우기 위해 행동을 과잉 축적하는 모순 속에서, 인간은 점점 제 자신을 잃어간다.
존재(Being)를 향한 갈망이 행위(Doing)의 강박으로 기울어질 때, 인간은 불화와 무화(無化)의 경계에서 미끄러진다. 황동만(구교환)의 형 황진만(박해준)이 던지는 질문은 그래서 뼈아프다.
“인간이 영어로 뭐냐? 휴먼 뒤에 붙잖아. 빙(Being). 휴먼 빙, 그저 존재하라고. 두잉 하지 말고.”
이 대사는 박해영 작가가 전작들에서 반복해온 화두의 연장선에 놓여 있다. 〈나의 아저씨〉(2018)의 이지안이 짓눌린 삶을 버티며 닿고자 했던 곳도, 〈나의 해방일지〉(2022)의 구씨와 염미정이 “추앙”을 갈구했던 자리도 결국은 아무것도 증명하지 않아도 되는 존재(Being)의 영토였다. 존재의 증명이란 타인 앞에서는 끝내 무가치한 독백에 불과하다는 인식. 그것이 박해영 세계의 뼈대였다.
이 드라마가 끝내 주목했던 자리도 여기에 있다. 세상이 외면하는 무가치함의 밑바닥, 그 불편한 현실의 자화상을 작가가 어디까지 밀어붙일 수 있는가. 드라마가 펼쳐 보인 풍경은 미화될 수 없는 사실주의(Realism)의 영역에 가까웠다.
그러나 세상은 무해함이라는 장막으로 그 불편한 현실을 덮는다. 장미란이 변은아의 변시온이었음을 고백을 듣고도 아무 거리낌 없이 환대하는 포옹은 따뜻하다. 동시에 위태롭다. 이 어정쩡하고 무해한 봉합이야말로 존재를 걸고 싸워온 인물들의 투쟁을 끝내 무가치하게 만드는 형벌에 가깝기 때문이다.
〈모두가 자신의 무가치함과 싸우고 있다〉의 패착은 싸움을 끝까지 밀어붙이지 못한 그 안온한 맺음에 있다. 이는 〈나의 아저씨〉와 〈나의 해방일지〉가 부딪혔던 한계와도 맞닿아 있다. 인간 소외와 계급의 절벽을 끝까지 밀어붙여 파국이든 혁명이든 그 끝을 보아야 했으나, 드라마는 매번 화해와 위로라는 퇴로를 남겨두었다. 극 후반부에 이르러 박해영은 불편한 리얼리즘의 칼날을 스스로 거두었다. 그리고 세상의 상처를 덮는 무해한 해피엔딩의 품으로 물러섰다.
무해한 환대와 리얼리즘의 후퇴
변은아는 심리측정기 테스트를 위한 상담실 의자에 앉아 나지막이 묻는다.
“왜 이렇게 불편한 스토리를 계속 쓸까요.“
극 중 인물의 입을 빌린 박해영 작가 자신의 자문(自問)처럼 들린다. 불편한 현실의 밑바닥을 끝내 파헤치는 일은 정말 무가치한가. 세상은 지겹고 어둡다며 고개를 돌리는데, 왜 나는 이 불편한 진짜를 붙들고 있는가. 박해영은 존재의 무가치함과 싸우는 인물들의 풍경을 통해, 서사를 쓴다는 행위 자체에 스민 고독과 무력감을 응시한다.
스토리의 생생함은 감정의 골조에서 나온다. 인물이 느끼는 날 선 감정을 정확히 지면 위에 박아 넣을 때, 서사는 비로소 리얼리즘의 물성을 얻는다. 성해나의 『혼모노』(2025)가 작두 날 위의 선혈과 남영동의 좁은 창문으로 독자의 살을 베어내듯, 리얼리즘은 감정의 과잉을 걷어낸 자리에서 들려오는 정직한 마찰음에 가깝다. 감정이 엷어지고 서사의 온도가 미지근해지는 순간, 현실의 불편함은 연기처럼 흩어진다.
최근 한국 문학장과 미디어를 잠식한 ‘K-환대’와 무해한 서사들은 이 마찰을 견디지 못하는 안전 가옥에 가깝다. 무해함은 리얼리즘의 영토에 존재하지 않는다. 상처받지 않으려는 자들이 끝내 발명해낸 슬픈 판타지다.
박해영은 오래도록 불편한 리얼리즘과 무해한 판타지의 경계 위를 위태롭게 건너온 작가였다. 〈나의 아저씨〉(2018)의 이지안이 마주했던 가혹한 생계의 절벽과 〈나의 해방일지〉(2022)의 염미정이 견뎌야 했던 존재의 허기는 미화될 수 없는 실재였다. 이번 신작을 주목했던 이유도 거기에 있었다. 존재의 무가치함을 타협 없이 끝까지 밀어붙여, 파국이든 구원이든 그 끝을 보여주리라는 기대였다.
그러나 박해영은 끝내 안온한 타협 쪽으로 물러선다. 현실의 절벽 앞에서 인물들을 밀어붙이는 대신, 서로의 가여움을 환대하는 정서적 피난처를 택한다. 이 싸움의 멈춤은 결기인가. 아니면 피로인가.
극 중 오종희(배종옥)는 친딸 변은아를 앞에 두고 대본의 지문을 지적한다. “미친 듯이”라는 말 하나로 인물의 상태를 퉁치려는 태도는 나태한 초짜의 습관이라는 일갈이다. 반은 맞고 반은 틀린 말이다.
이야기의 힘은 단어의 과잉이 아니라 문장과 문장 사이의 여백에서 나온다. 롤랑 바르트가 말한 영도의 글쓰기처럼, 수사를 덜어내고 골조만 건조하게 남겨둘 때 실재의 비린내가 살아난다. 그러나 박해영은 후반부로 갈수록 역행한다. 인물들이 겪어내야 할 고통의 맥락을 끝까지 밀어붙이는 대신, 화해와 환대라는 거대한 지문 하나로 서사의 균열을 급히 봉합한다. 장미란이 변은아를 변시온으로 알게 되면서도 아무 조건 없이 받아들이는 풍경은, 작가가 끝내 제 안의 진짜 스토리인 변은아를 놓아버렸음을 고백하는 장면처럼 남는다.
그럼에도 변은아라는 존재는 오정희의 말대로 지독하게 근사하다. 근사함은 외양의 매끄러움과 다른 차원의 무게다. 자기 안의 남루함과 무가치함을 속이지 않고 직면하는 일이다. 두잉(Doing)의 강박 속에서도 미끄러지기를 두려워하지 않는 실존적 결기다. 박해영이 전작들에서 “추앙”이나 “근사함” 같은 낯선 단어를 반복해온 이유도 여기에 있다. 일상의 매끈한 언어로는 포착되지 않는 존재(Being)의 거친 질감을, 그 부자연스러운 기표로나마 붙들어두려 했기 때문이다.
박해영은 불편한 리얼리즘의 심연을 오래 들여다보았다. 그러나 끝내 그 온도를 견디지 못한 채, 무해한 해피엔딩의 뭍으로 걸어 나왔다. 세상의 상처를 덮는 다정한 위로가 실은 진짜와 가짜를 가르는 감각을 마취시키는 기만은 아닌가. 드라마는 종영했으나, 작가가 끝내 던지지 못한 질문의 칼날은 여전히 화면 밖으로 튀어나와 우리의 손등을 서늘하게 긁는다.
웃기게 살 거야, 그 봉합의 죄책감에 대하여
〈모두가 자신의 무가치함과 싸우고 있다〉는 전작들의 상업적 성취를 재현하지 못했다. 시청률은 평탄했고 대중의 반응도 미지근했다. 평단 일각에서는 찌질한 남성을 구원하는 근사한 여성이라는 박해영식 문법의 반복이라는 비판이 쏟아졌다. 그 폄하를 전부 받아들이기는 가혹하다. 그러나 작가가 자기 복제의 늪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했다는 인상 또한 부정하기 어렵다.
그럼에도 제12화의 닫히는 문 앞에는 매끈한 성공 대신 거칠고 비장한 고민의 흔적이 남아 있었다. 세상을 정면으로 직시하려는 변은아의 결기와, 싸움의 무가치함을 깨닫고 우주의 섭리에 자신을 의탁해버리는 황진만의 통달 사이에서 작가는 격렬하게 흔들린다. 직시와 통달. 그 먼 거리를 잇기 위해 박해영이 끝내 붙든 다리가 무해한 서사라는 판타지였으리라는 짐작은, 아쉬움을 남기면서도 한편으로 고개를 끄덕이게 만든다.
이 드라마는 작가정신이 던지는 불편한 질문과, 세상이 요구하는 무해한 답안 사이의 충돌 위에 서 있다. 서사가 번번이 뒤로 물러서는 이유는 결국 시청률이라는 현실의 압박 때문이다. 세상의 불온함을 끝까지 들추려던 작가가 자본과 대중의 요구 앞에서 안온한 해피엔딩으로 서사를 봉합하는 장면은 지독한 아이러니다. 칼날을 조금만 더 밀어붙여 파국이나 진실의 바닥을 보여주었으면 하는 열망은 결말 앞에서 끝내 꺾인다.
불편함의 극단은 현실의 장벽 앞에서 자꾸 미끄러진다. 그 결과 드라마는 소외된 자들의 기사회생을 보여주는 대리 만족의 서사로 후퇴한다. 문학과 드라마가 감당해야 할 위로는 다른 곳에 있다. 바닥을 끝까지 응시함으로써 낙하의 깊이를 견디게 하는 서늘한 태도. 그 냉정한 시선이야말로 서사의 마지막 윤리다.
드라마는 “봄이 오나 봐요”라는 대사 한마디로 모든 상흔을 덮듯 막을 내린다. 그리고 작가는 이 봉합의 죄책감을 황진만의 선문답으로 변호한다. “인생의 목적이 뭐야”라는 질문에 황동만(구교환)은 답한다.
“웃기게 살 거야.”
세상의 모든 스토리는 결국 “나는 여기 존재한다”는 단독자들의 아우성이다. 인간은 한 줌의 재로 사라질 허무 앞에서 정신없이 이야기를 만들고 지어낸다. 박해영은 그 허무의 심연 앞에서 하나의 답을 내린다. 살아 있는 한 스토리를 멈출 수 없다면, 차라리 웃기게. 비참을 웃음으로 버텨내면서.
황진만은 문학특강의 교단 위에서 지친 목소리로 말한다.
“시를 쓴다는 정체성, 이런 말이 목구멍에 턱턱 걸려요. 시를 쓰는 것보다 용접이 좋습니다. 용접은 불꽃을 지지고 있으면 그대로 일이 되고 물성이 남습니다. 마음이 번다하지 않고, 일하는데 쉬는 것 같습니다. 네, 당신들의 시보다는 용접이 좋습니다.”
문학이라는 기표의 허위를 깨부수고 육체 노동의 실재로 돌아가고 싶다는, 작가 자신의 지독한 고백처럼 들린다. 그래서 작가는 황동만이라는 비현실의 총체를 내세웠는지도 모른다.
그리하여 황동만은 현실의 인물이라기보다 하나의 거대한 판타지에 가깝다. 그것은 동만이 찍으려는 영화의 제목처럼 인간의 힘으로는 도달할 수 없는 “날씨를 만드는 일”과 닮아 있다. 날씨는 인간의 손아귀로 통제되지 않는다. 박해영이 구축한 무해한 결말 또한 통제 불가능한 현실을 통제 가능한 온도로 바꾸려는 부자연스러운 기적, 곧 판타지에 가깝다.
박경세(오정세)라는 낭만적인 양아치를 추앙하는 황동만의 꿈 역시 비참하고 슬픈 삶의 스토리를 어떻게든 웃기는 것으로 바꾸어내려는 눈물겨운 연금술처럼 보인다. 그 양가의 감정 사이에서 오래 고뇌했을 작가의 분투를 이해하면서도, 차기작만큼은 세상의 불편한 진실을 타협 없이 끝까지 밀어붙이기를 바라게 된다. 서사 예술의 본령은 결국 안온한 위로의 장막을 찢고, 세상이 외면하는 불편한 이야기를 끝내 건네는 고독한 소명에 있기 때문이다.
세상은 끝내 불편한 이야기를 원하지 않는다. 대중은 바닥을 응시하는 대신 따뜻한 뭍을 원하고, 자본은 그 욕망에 충실하다. 박해영이 매번 칼날을 거두어드는 자리에는 그 거대한 압력이 있다. 그러나 문학의 소명은 원래 그 압력에 맞서는 일이었다. 위로란 상처를 덮는 것이 아니라, 상처의 깊이를 정확히 재는 일이어야 한다. 박해영은 알고 있을 것이다. 진짜 싸움은 아직 시작되지 않았다는 것을.
글‧박철웅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한국어판 에디터
작가‧문화평론가
연세대학교 노어노문학 전공
IBM과 NTT에서 마케팅과 컨설팅 담당
2011년 『원순씨를 부탁해』 출간
비평적 글쓰기, 사회, 문화 예술과 인간을 관통하는 글을 쓰고 있다
https://www.ilemonde.com/news/articleView.html?idxno=30074